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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 심청] 깍정이들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3. 25. 11:35

거반 오정이나 바라보도록 요때기를 들쓰고 누웠던 그는 불현듯 몸을 일으키어 가지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매캐한 방구석에서 혼자 볶을 만치  볶다가 열벙거지가 벌컥 오르면 종로로 튀어나오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그러나 종로가 항상 마음에 들어서 그가  거니느냐 하면 그런것도 아니다. 버릇이 시키는  노릇이라 울분할 때면 마지못하야 건성  싸다닐뿐 실상은 시끄럽고 더럽고 해서 아무  애착도 없었다. 말하자면 그의  심청[심술]이 별난 것이었다. 팔팔한 젊은친구가 할 일은 없고 그날그날을 번민으로만 지내곤하니까 나중에는 베짱이 돌아앉고 따라 심청이  곱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의 불평을 남의 얼굴에다  침 뱉듯 뱉아붙이기가 일수요  건듯하면 남의 비위를 긁어놓기로 한 일을  삼는다. 그게 생각하면 좀 잗달으나 무딘 그 생활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향락일런지도 모른다.

그가 어슬렁어슬렁 종로로 나오니 그의  양식인 불평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자연은 마음의 거울이다.  원체 심뽀가 이 뻔새고 보니 눈에 띠는것마다  모두 아니꼽고 구역이 날 지경이다. 허나 무엇보다도 그의  비위를 상해주는 건 첫째 거지였다.

대도시를 건설한다는 명색으로  웅장한 건축이 날로 늘어가고 한편에서는 낡은 단층집은 수리조차 허락지 않는다. 서울의  면목을 위하야 얼른 개과천선하고 훌륭한 양옥이 되라는 말이었다.  게다 각 상점을 보라. 객들에게 미관을 주기 위하여 서로 시새워 별의 별짓을  다해가며 어떠한 노력도 물질도 아끼지 않는 모양 같다마는 기름때가  짜르르한 헌 누데기를 두르고 거지가 이런  상점 앞에 떡 버티고서서 나리! 돈한푼 주우……  하고 어줍대는 그 꼴이라니 눈이 시도록 짜장 가관이다. 이것은 그 상점의 치수를 깍을 뿐더러 서울이라는  큰 위신에도 손색이 적다 못할지라. 또는 신사숙녀의  뒤를 따르며 시부렁거리는 깍정이의 행세좀보라. 좀 심한 놈이면  비단껄이고 단장뽀이고 닥치는 대로 그 까마귀발로 웅켜잡고는 돈 안낼테냐고 제법 훅닥인다.  그런 봉변이라니 보는 눈이 다 붉어질  노릇이 아닌가! 거지를 청결하라. 땅바닥의 쇠똥말똥만 칠게 아니라 문화생활의 장애물인 거지를 먼저 치우라. 천당으로 보내든, 산채로 묶어 한강에 띄우든…….  

머리가 아프도록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어청어청 종로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입으로는 자기도 모를 소리를 괜스리 중얼거리며…….

"나리! 한 푼 줍쇼오."

언제 어데서  빠졌는지 애송이 거지 한 마리(기실 강아지의 문벌이 조금 더 높으나)가  그에게 바짝 붙으며 귀찮게 조른다. 혓바닥을 길게 내뽑아 웃입술에 흘러내린  두 줄기의 노란코를 훔쳐가며 졸르자니 썩 바쁘다.

"왜 이럽쇼, 나리! 한푼 주세요."  

그는 속으로 피익, 하고 선웃음이 터진다.  허기진 놈 보고 설렁탕을 사달라는 게 옳겠지 자기 보고 돈을 내랄적엔 요놈은 거지중에도 제일 액수[재수] 사나운놈일 게다. 그는  들은 척 않고 그대로 늠름히 걸었다.  그러나 대답 한번 없는데 골딱지가 났는지 요 놈은 기를 복복 쓰며  보채되 정말 돈을 달라는 겐지 혹은 같이 놀자는 겐지, 나리! 왜 이럽쇼, 왜 이럽쇼. 하고 사알살 약 올려가며 따르니 이거 성이 가셔서라도 걸음 한번 머무르지 않을수 없다. 

그는 고개만을 모루 돌리어  거지를 흘겨보다가 

"이꼴을 보아라!"

그리고 시선을 안으로 접어 꾀죄죄한 자기의 두루마기를 한 번 쭈욱  훑어 보였다. 하니까 요 놈도 속을 채렸는지 됨됨이 저렇고야, 하는 듯 싶어 저도 좀 노려보더니 제물에 떨어져 나간다.


이걸 보고 그는 잔뜩 상이 흐렸다.  이 벌레들을 치워주지 않으면 그는 한걸음도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전차길을 건너서  종각앞으로 오니 졸지에  그는 두 다리가  멈칫하였다. 그가 행차하는 길에 다섯간쯤 앞으로 열댓살  될락말락한 한 깍정이가 벽에 기대여 앉았는데 깜박깜박 졸고 있는 것이다.  얼굴은 노란 게 말라빠진  노루가죽이 되고 화루전에 눈 녹듯 개개풀린 눈매를 보니 필연 신병이 있는데다가 얼마 굶기까지 하였으리라. 금시로 운명하는 듯 싶었다. 거기다 네 살쯤 된 어린 거지는 시르죽은 고양이처럼 큰 놈의 무릎 위로 기어오르며 울  기운조차 없는지 입만 벙긋벙긋. 그리고 낯을 찌푸리며 투정을 부린다. 꼴을 봐  한즉 아마 시골서 올라온지도 불과 며칠 못되는 모양이다. 

그러자 문득 한 호기심이 그를 긴장시켰다. 저쪽을 바라보니 길을 치고  다니는 나리가 이쪽을 향하야  꺼불적꺼불적 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뜻밖의 나리였다. 고보 때에 같이 뛰고  같이 웃고 같이 즐기든 그리운 동무. 예수를 믿지 않는 자기를 향하여 크리스찬이  되도록 일상 권유하든 선량한 동무이었다. 세월이란  무언지 장래를 화려히  몽상하며 나는 장내  톨스토이가 되느니 칸트가 되느니 떠들며  껍적이든 그일이 어제같건만 자기는 끽[고작] 주체궂은[몹시 주체스러운] 밥통이 되었고 동무는 나리로.. 그건 그렇고 하여튼 동무가 이 자리의 나리로 출세한것만은 놀램과 아울러 아니 기쁠수도 없었다. 

▲ 걸인들 (1949)

"아야야 으으 응 갈테야요.."그는 멀찌감치 섰는 채 조바심을 태워가며 그 경과를 기다리었다.  따는 그의 소원이 성취되기까지 시간은 단 일분도 못걸렸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았다. 

"이자식! 골목안에 백여있으라니깐 왜 또 나왔니..   기름강아지같이 뺀질뺀질한 망할 자식!" 

"아야야.. 갈텐데 왜이리 차세요, 응, 응."

하며 기름 강아지의 울음소리는 차츰차츰 멀리  들려온다.

"이자식! 어서 가라, 쑥 들어가아." 하는 날벼락!

소란하던 희극은 잠잠하였다. 그가 비로소 눈을  뜨니 어느덧 동무는 그의 앞에 맞닥뜨렸다. 이게  몇해만이냔 듯 자못 반기며 동무는 허둥지둥  그 손을 잡아 흔든다. 

""아 이게 누구냐? 너 요새 뭐하니?"

그도 쾌활한 낯에 미소까지 보이며

 "참. 오래간만이로군! "  하다가

 " 음. 틈틈이 가지 내 사무란 그저 늘 바쁘니까..."

"대관절 고마우이.. 보기 추한  거지를 쫓아주어서 나는 웬일인지 종로 깍정이라면 이가 북북 갈리는걸!"

 "천만에 그야 내 직책으로 하는걸 고마울거야 있나" 하며 동무는  거나하야 흥 있게 웃는다.

이 웃음을 보자 돌연히 그는 점잖게 몸을 가지며,

"오, 주여! 당신의 사도  베드로를 나리사 거지를 치워주시니 너머나 감사하나이다." 

하고 나직이 기도를 하고 난 뒤에  감사와 우정이 넘치는 탐탁한 작별을 동무에게 남겨놓았다. 

자기가 '베드로'의 영예에서 치사를 받은 것이 동무는 무척 신이나서 으쓱이는 어깨로 바람을 치올리며 그와 반대쪽으로 거러간다. 

때는 화창한 봄날이엇다. 전신줄에서 물찍똥을 나려깔기며,

 "비리구 배리구"

지저귀는 제비의 노래는 그 무슨 곡조인지 하나도 알려는 사람이 없었다. (1932 탈고)


**

[...] 얼마 동안은 역시 혼인집답게 온 집 안이 부산하였다.

그러자 대문간에, 갑자기 우락부락한 젊은 놈 말소리가 들렸다. 거지들의 '둘째 대장'이라는 녀석이, 바로 잔칫집이라고 달려든 것이다. 이 구차한 집에 대체 무엇을 얻어먹으러 왔느냐고, 이쁜이 어머니는, 그 주근깨투성이 조그만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입이 아프게 말하였으나, 끝끝내,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수장국에다 한 푼의 오십 전 은화를 얹어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아, 이제 딴 녀석이 또 와두 우린 모른다"

점룡이 어머니가 다지는 말에,

"아, 염네 맙쇼."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 지성사, 2005[1936], 67-8쪽)

[...]

정작 피해는, 그러나 개천 속 깍정이들의 몸 위에 좀더 컸다. 세차게 불어드는 바람에도 빗줄기는 그렇게 깊은 다리 밑까지는 들이차지 안핬으나 갑자기 불은 개천 물은, 잠깐 사이에 개천의 모래바닥을 덮어, 그들이 황겁하여 잠을 깼을 때는 이미 거적조각이 흠씬 물에 젖은 뒤였다. 깡통이며 냄비며 누더기 보통이며, 그러한 그들의 살림 기구를 분담하여 들고서 부랴부랴 빨래터 사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물은 그동안에도 불어, 그들의 여러 해 때가 더깨더깨 앉은 정강이에까지 찼다. (같은 책, 215쪽)


**

혜련은 문임이가 손을 잡아끄는 대로 걷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혜련의 가슴 속에는 아버지의 가여운 모양(그것은 비참하다할이만큼 혜련에게는 가여운 모양이었다)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아버지가 때묻은 젖은 누더기를 입고 녹쓴 양철통과 냄새나는 주머니를 메고 청계천 다리 밑에서 덜덜 떨고 있는 늙은 거지와도 같이 가엽고도 더럽게 보였다. (이광수, 『애욕의 피안』, 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