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인생에 피로한 자여! 겨울 황혼의 '한강'을 찾지 말라.
죽음과 같이 냉혹한 얼음장은 이 강을 덮고, 모양 없는 산과 벌에 잎 떨어진 나뭇가지도 쓸쓸히, 겨울의 열 없는 태양은 검붉게 녹슬어 가는 철교 위를 넘지 않는가?……
나는 그 곳에 인생의 마지막──그러나 '인생의 마지막'으로는 당치않은 어수선하고 살풍경한 풍경을 발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강가에 스무 명도 더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얼음 깨는 기구를 가지고,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이고 있는 사람이 섞여 있었다. 순사巡査가 두 명 무엇인지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의 낫세밖에 안 되어 보이는 사람들었다. 두 명의 순사가 지휘하는 대로 그대로 그들은 움직이었다. 두 명의 순사 중에 한 명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동정에 여우털을 단 외투를 입고 있으면서도, 그 순사는 어인 까닭인지 시퍼런 코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이십오 년 평생에 시퍼런 코를 흘리는 순사를 그에게서 비로소 발견하였다.
인도교와 거의 평행선을 지어 사람들의 발자국이 줄을 지어 얼음 위를 꺼멓게 색칠하였다. 인도교가 어엿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얼음 위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었나? 그들은 그만큼 그들의 길을 단축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무슨 크나큰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들의 고무신을 통하여, 짚신을 통하여 그들의 발바닥이 감촉하였을 너무나 차디찬 얼음장을 생각하고,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서리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가방을 둘러멘 보통 학교 생도가 얼음 위를 지나갔다. 팔짱 낀 사나이가 동저고리 바람으로 뒤를 따랐다. 빵 장수가 통을 둘러메고 또 뒤를 이었다. 조바위 쓴 아낙네, 감투 쓴 노인, …… 그들의 수효는 분명히 인도교 위를 지나는 사람보다 많았다. 강바람은 거의 끊임없이 불어 왔다. 그 사나운 바람은 얼음 위를 지나는 사람들의 목을 움츠리게 하였다. 목을 한껏 움추리고 강 위를 지나는 그들의 모양은 이 곳 풍경을 좀더 삭막하게 하여 놓았다.
나는 그것의 마지막 걸어갈 길을 너무나 확실히 보고,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악연愕然[몹시 놀람]하였다……. (박태원, '피로', 1933)
한강빙漢江氷 채취
지난 4일부터 기온이 급히 내려 한강은 일시에 얼음이 얼어서 9일 오전 열시에는 다섯치 오푼이나 되도록 얼었는데 경기도 위생과에서 이것을 시험한 결과 극지질이 양호함으로 내일부터 채빙을 허가하였다. (동아일보, 1930.1.11.)
오십만 납량納凉 식량 한강채취허가
▲ 한강 얼음 채취(1957)
여름...
주인 노파는 처음에는 이형식을 후리려고 나오는 추한 계집으로만/ 여겼더니 차차 이야기를 들어 보니 본래 양가 여자인 듯하고, 또 신세가 가이없는지라, 자기 방에 혼자 울다가 거리에 나아가 빙수와 배를 사가지고 들어와 영채를 흔든다.
"여보, 일어나 빙수나 한잔 자시오. 좀 속이 시원하여질 테니..." (이광수, 무정, 1995[1917], 동아출판사,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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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순이는 통째 짓무를 듯싶은 등어리를 견디지 못하여 먼젓번에 쉬어 가던 나무 그늘에 지게를 벗어 놓는다. 땀을 들여 가며 아내를 가만히 내려다보니 그 동안 고생만 시키고 변변히 먹이지도 못하였던 것이 갑자기 후회가 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면 동넷집 닭이라도 훔쳐다 먹였을 걸 싶어,
“울지 말아, 그것들이 뭘 아나 제까짓 게!”
하고 소리를 뻑 지르고는,
“채미 하나 먹어 볼 테야?”
“채민 싫어요.”
아내는 더위에 속이 탔음인지 한길 건너 저쪽 그늘에서 팔고 있는 얼음냉수를 손으로 가리킨다. 남편이 한푼 더 보태어 담배를 사려던 그 돈으로 얼음냉수를 한 그릇 사다가 입에 먹여까지 주니 아내도 황송하여 한숨에 들이켠다. 한 그릇을 다 먹고 나서 하나 더 사다 주랴 물었을 때 이번에 왜떡이 먹고 싶다 하였다. (김유정, '땡볕,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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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여자는 확실히 어여뻤다. 그는 혹은, 구보가 이제까지 어여쁘다고 생각하여 온 온갖 여인들보다도 좀더 어여뻤을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다. 남자가 같이 가루삐스[칼피스]를 먹자고 권하는 것을 물리치고, 한 접시의 아이스크림을 지망할 수 있도록 여자는 총명하였다.
문득, 구보는, 그러한 여자가 왜 그자를 사랑하려드나 또는 그자의 사랑을 용납하는 것인가 하고, 그런 것을 괴이하게 여겨본다. 그것은, 그것은 역시 황금인 까닭일 게다. 여자들은 그렇게도 쉽사리 황금에서 행복을 찾는다. 구보는 그러한 여자를 가엾이, 또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 사내의 재력을 탐내 본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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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타고 미쓰코시 상층까지 올라온 신철이는 의자에 걸어앉아 멍하니 분수를 바라보았다. 곁의 의자에 앉은 어떤 남녀는 빙수를 청하여 놓고 먹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다가는 호호 웃었다. 그때마다 신철이는 그들이 자기의 초라한 모양을 바라보고 웃는 듯하여 한참이나 그들을 노려보다가 휙 돌아앉았다.
그리고 그는 도리어 그들을 대하여 떳떳한 길을 밟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아! 하고 소리쳐 주고 싶은 생각을 억지로 해보았다.
곁에서 빙수를 마시며 호호…… 하하…… 하는 두 젊은 남녀의 웃음소리에 비위가 상해서 신철이는 그만 돌아앉았으나 그들의 시선이 그의 잔등과 뒷덜미를 향하여 여지없이 쏟아지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햇볕이 못 견디게 내리쪼인다.
▲ 냉차와 아이스크림 노점상(1964년)
그는 포켓에서 수건을 내어 이마를 씻었다. 수건 역시 이것이 마지막이다. 집에서 나올 때 사오 개 가지고 나왔지마는 동무들에게 하나하나 빼앗기고 그나마 해어진 것 이것이 있을 뿐이다. 그는 곁에서 빙수를 먹는 여자의 음성이 차츰 옥점의 그 음성과 흡사
하였다. (강경애, 『인간문제』,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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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엊그제 하룻날, 장안에서 소비된 음료빙의 수량을 들어 더위에 허덕이고 있는 경성 시민들의 꼴을, 그러한 방면에서 엿보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광교 한모퉁이에서의 점룡이 '아스꾸리'[아이스크림] 매상고에도 숫자 위에 더위는 또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박태원, 『천변풍경』, 문학과 지성사, 2005[1936], 2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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