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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 빨강치마를 입던 날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4. 4. 09:52


나는 종종 해질 무렵의 본정本町 거리[진고개, 혼마치]를 걷기를 좋아한다. 별반 산보를 좋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데 차를 타고 어디 멀리 가보고 싶다든가 아는 사람들이 신경에 무거운 때라든지 저녁노을이 붉어서 모든 얼굴들이 곱게 보이려니 짐작되는 때라든지 원고가 쓰기 싫어지는 때라든지 오스시가 먹고 싶은 때라든지 이런 때는 늘상 나는 본정을 걸어야 한다.

본정은 건물들도 크지 않고 또 자동차나 인력거가 다니지 못하리 만큼 도로도 좁다. 본래부터 웅장한 것보다 아담한 쪽을 좋아해서 그런지는 모르나 나는 이 웅장하지 못한 건물과 넓지 못한 도로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또 그 거리에 맞는 남산의 배경이 더욱 좋다. 미관상이라든가 위생적이라든가 이런 어려운 문구를 다 그만두고라도 우선 하늘이 그 남산 때문에 더 높은 것 같고, 하늘이 높기 때문에 다리가 건득건득 들리는 것도 유쾌하겠지만 다리가 건득건득 들리기 때문에, 많은 구두 소리가 요란스러워진다.

▲미나카이 三中井  백화점

나는 웬일인지 이 요란스런 구두소리 속을 걷노라면 온 세상에 나 혼자인 듯한 정적精寂을 맛을 보게 되는데 그렇게 되노라면 나는 무한히 슬퍼지면서 다른 때에 하지 못하던 아주 멋진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빨강치마를 입은 탓인지, 책상 우에 일이 매우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커텐 거친 창으로 줄달음질 친다. 아무래도 나는 책상 우에 일을 다 제쳐놓고서래도 본정 거리를 걸어야 하나보다.

오늘은 삼중정三中井[미나카이 백화점] 바로 옆에 있는 차茶 상점 앞을 지나지 않겠다. 전에는 언제나 그 앞을 지났다.

▲ 종방 스테이션 (가네보)

그 차 볶는 냄새가 아주 구수하고 말할 수 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전 저녁 무렵에 그 앞을 걷다가 나는 그만 그 냄새 좋은 차를 사고 말았다. 산 데까지는 그럴듯한데 집에 가지고 와서 정작 대려 먹게 되고 본 즉, 그 앞을 지나면서 냄새 맡던 때만 도무지 못했다.

명치정明治町을 지나서 본정 4정목 쪽을 걸으리라. 화장품점에도 안 들리고, '가네보-'(종방鐘紡)에도 안 들리고 '환선'[서점]에도, 꽃집 앞에도 그냥 모르는 체 지나겠다. 오스시 집에도 안 들리겠다. 요만치 비 오던 날도 오스시를 너무 많이 먹어서 사흘이나 고생하지 않았던가. 지하실 찻집에도 안 들리겠다. 어느 날 밤 레코드가 아주 조용하길래 커피를 두잔씩이나 먹어서 그 밤을 말뚱말뚱 새지 않았던가.

오늘은 오직 그 수 많은 발이 높은 하늘 아래 경쾌한 소리를 내는 속을 내 치맛자락이 사람 물결 속에 지나치든 말든, 나는 혼자서 온 세상에 나 혼자인 듯이 아주 멋진 생각을 하리라. (최정희, '빨강치마를 입던 날', 『가정지우家庭之友』, 1940.12.)

 

▲ 본정 1, 2정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