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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사람들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3. 30. 10:04


이태준 - 수연산방壽硯山房
성북동城北洞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 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 주었다.
서울이라고 못난이가 없을 리야 없겠지만 대처에서는 못난이들이 거리에 나와 행세를 하지 못하고, 시골에선 아무리 못난이라도 마음놓고 나와 다니는 때문인지, 못난이는 시골에만 있는 것처럼 흔히 시골에서 잘 눈에 뜨인다. 그리고 또 흔히 그는 태고 때 사람처럼 그 우둔하면서도 천진스런 눈을 가지고, 자기 동리에 처음 들어서는 손에게 가장 순박한 시골의 정취를 돋워 주는 것이다. (이태준, '달밤', 『중앙』, 1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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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벼르던 안채를 물자物資 제일 귀한 금년에 더욱 초복에 시작해 말복을 통해 치목治木을 하며 달구질을 하며 참으로 집 귀한 맛을 골수骨髓에 느낀다.
목수 다섯사람 중에 네 사람이 육십객客들이다. 그 중에도 '선다님'으로 불리는 탕건 쓴 이는 칠십이 불원不遠한 노인으로 서울 바닥 목수치고 이 신申 선다님더러 '선생님'이라고 안하는 사람은 없다 한다. 무슨 대궐 지을 때, 남묘南廟, 북묘北廟 지을 때, 다 한 몫 단단히 보던 명수名手로서 어느 일터에 가던 먹줄만 치고 먹는다는 것이다. 딴은 선재選材와 제단製斷은 모두 이 선다님이 해놓는데 십여 칸 남짓한 소공사이기도 하거니와 한 가지도 기록을 갖는 습관이 없이 주먹구구인 채 틀림없이 해내는 것만은 용한 일이다.

나는 처음에 도급으로 맡기려했다. 예산도 빠듯하지만 간역看役[집을 짓거나 고치는 일을 보살핌]할 틈이 없다. 그런데 목수들은 도급이면 일 할 재미가 없노라 하였다. 밑질까봐 염려, 품값 이상 남기려는 궁리, 그래 일재미가 나지 않고 일재미가 나지 않으면 일이 솜씨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솔직한 말에 나는 감복하였고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이조李朝 건축의 순박, 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라 이런 구식 공인工人들의 손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므로 다행이라 여겨 일급日給으로 정한 것이다.
이들은 여러모로 시속時俗과는 먼 거리에 뒤진 공인들이다. 탕건을 쓰고 안경집과 쌈지를 늘어뜨린 허리띠를 불두덩까지 늦추었고 합죽선合竹扇에 일꾼으로는 비교적 장죽長竹인 담뱃대, 솜버선에 헝겊 편리화便利靴들이다. 톱질꾼 두 노인은 짚세기다. 그 흔한 '타월' 하나 차지 않았고 새까만 미녕[무명]쪽으로 땀을 닦는다. 톱, 대패, 자귀, 먹통 모두 아무 상호도 붙지 않은 저희 수예품들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역시 구수해서 두어 가지 들은 대로 기록해 본다.

"내 연전에 진고개루 가 일 좀 해보지 않었겠수. 아, 고찌 고찌 하는 말이 뭔가 했더니 인제 알구 보니 못釘이더랬어."
"고찌가 못이야? 알긴 참 여불 없이 알어맞혔군 흥!"
"그럼 뭐람 고찌가?"
"고찌가 저기란 거야 저기…… 못은 국키구."
"국키…… 국키가 요즘 천세라지?"
"여간해 살 수 없다더군……."

그들은 별로 웃기지도 않고 말문이 이내 다른 데로 돌아갔다. 하루는 톱질꾼 노인들이 땀을 씻느라고 쉬었다가 물들을 마시었다.

"내 한번 비싼 물 사먹어봤지!"
"어디서?"
"저어 개명 앞 가 일허구 오는데 그때두 복[伏]지경이었나봐. 일손을 떼구 집으루 오는데 목이 여간 말러야지. 마침 뭐라나 이름두 잊었어…… 그런데 참 양떡으루 만든 고뽀가 다 있습디다그려. 거기다 살짝 담아주는데 으수 덛물[얼음이 괴어 있는 물]진 푸석얼음이야. 목구녕은 선뜩선뜩 허더군……."
"오, 거 앗싸구리[아이스크림]로군 그래."
"무슨 구리래나…… 헌데 그런 날도적놈이 있어!"
"으째?"
"아 목젖이 착근착근하는 맛에 두 고뿔[컵을] 먹지 않었겠수."
"을말 물었게?"
"고작 물에 설탕 좀 타 얼쿤거 아니겠소?"
"그렇지. 물 얼쿤거지. 어디 얼음이나 되나. 그게 일테면 얼쿠다 못 얼쿤게로구려."
"그러니 얼쿤거래야 새누깔만헌데루 밀이 한 사발이나 들었을거야. 그걸 숫제 이십 전을 물라는군!"
이십 전! 딴은 과용이군."
"기가 안 막혀? 이십 전이면 물이 얼마야? 열 지게 안요? 물 스무 초롱 값을 내래 그저…… 그런 도적놈이 있담!"
"앗싸구리란게 워낙 비싸긴 허대드군."
"그래 여름내 그 생각을 허구 온 집안이 물을 다 맘대루 못먹었수……."
"변을 봤구려!"

또 한 번은,

"의사란 것두 무당판수나 마찬가진겨!"
"으째?"
"병을 안대니 그런 멀쩡헌 수작이 있담?"
"그러게 조화속이지."
"요지경속이 어떠우? 아, 무슨 수로 앓는 저두 모르는 걸 남의 속에서 솟은 걸 안대?"
"그렇긴 해! 무당판수두 괜한 것 같지만 시월에 고산 한 번 지낼거드군."
"그건 으째?"
"고사나 아님 우리네가 평생 떡맛 볼테요?"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 전에 대어와서 해가 져 먹줄이 보이지 않아야 일손을 뗀다. 젊은이들처럼 재빠르진 못하나 꾸준하다. 남의 일 하는 사람들 같지 않게 독실하다. 그들의 연장은 날카롭게는 놀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내키는 대로 힘차겐 문지른다.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집은 아무리 요새 시쳇時體집이라도 얼마쯤 날림끼는 적을 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 (이태준, '목수들', 『문장』, 19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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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상허常虛의 경독정사耕讀精舍에서 몇 사람의 벗이 저녁을 먹은 일이 있다. 그 자리에서 시인 이상李箱은 쥘 르나르의 '전원수첩' 속에서 읽은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가을날 방안에 가두어 두었던 카나리아는 난로불 온기를 봄으로 착각하고 그만 날개를 후닥이며 노래하기 시작하였다고─

우리는 르나르의 기지와 시심을 일제히 찬탄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시가 조류의 심리까지를 붙잡은 것은 아니다. 사실은 시인이 그 자신의 봄을 그리는 마음을 카나리아의 뜻없는 동작 속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 이야기를 꺼내 놓은 이상李箱의 마음에도 역시 봄을 그리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 그 감정을 그러한 실 없는 듯한 이야기 속에서라도 풀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두 장의 재판소 호출장과 한 장의 내용증명 우편물과 한 장 내지 두 장의 금융조합 대부독촉장을 항상 가지고 댕겨야 하는 이 시인과 온갖 찬란한 형용사에 의하여 형용되는 다채스러운 봄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 봄은 그러면 영구히 달콤한 것인가?

이 이야기 뒤에 그 초당주인은 남쪽으로 뚫린 창을 가졌으며 산과 수풀과 시냇물에 둘려있는 이 초당에서 겨울을 지낼려면 봄을 기다리기가 안타까워서 못 견딘다고 말하였다. 이른 봄날 싹 돋은 뜨락의 풀이 찬서리에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양은 마음이 아깃자깃할 지경으로 애타는 일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게다. 도시의 홍진을 성북城北에 피한 이곳에서는 봄이 가고 오는 소식도 자세히 알 수 있으련만, 거리의 복판에서는 가을이 겨울로 변하고 겨울이 봄으로 옮겨가는 그 경계선의 미묘한 음영은 도시 알 수가 없다. 붉은 벽돌이 그것을 말하지 않고 검은 기왓장의 물결 위에는 계절의 표정이 나타날 줄을 모른다. 그저 벚꽃구경 광고를 전차 안에서 보고야 봄이 짙어 가는 줄 알고 김장배추 수레가 오고 가는 것을 보고야 어느새 가을을 다 지나보낸 것을 새삼스럽게 아까워하는 도시인의 생활이다. 그렇게 황망하게 왔다가 가는 사이에 봄은 한 번도 우리들의 기대를 채워주고 간 일이 없다. 딴은 봄은 동산마다 수없는 꽃을 피워놓고, 강마다 풍만한 물로써 축여 주었지만 '오늘도 벚꽃……', '내일도 벚꽃' 하는 틈에 부대껴 사월 초하룻날 펴놓았던 책장은 그 달 그믐까지도 그대로 있었고, 석양마다 집에 돌아와 보면 와 있는 편지는 납세독촉서는 백화점의 광고지나 원고독촉 통지나 최악의 경우에는 이상李箱처럼 내용증명우편이다. 나의 생활을 놀래 줄만한 아무러한 편지도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 (김기림, '봄은 사기사',『중앙』, 1935.1.)


김용준 - 노시산방老枾山房

지금 내가 거居하는 집을 노시산방이라 한 것은 3, 4년 전에 이 군[이태준]이 지어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7,80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2,3주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뽀족뽀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이 군이 일러 노시사老枾舍라 명명해 준 것을 별로 삭여볼 여지도 없이 그대로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

나는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이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고 따라만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김용준, '노시산방기老枾山房記',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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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에 포도송이가 보기좋게 익어가는 초가을이면 성북동의 호젓한 길녁은 산보하는 청춘남녀로 가득차고 맙니다. 그들의 코스는 으레 포도를 사서 들고 청룡암靑龍魔으로 뚫린 아늑한 산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집이 이 길녁에 있기 때문에 산 속에 사는 나일망정 한 주일에 한번씩은 도회의 첨단을 힘들이지 않고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일요일날 나는 성북동의 농부가 되어 뜰에 쌓인 낙엽을 비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지나가던 한 쌍의 산보객(하나는 단발미녀, 하나는 사각모였었다)이 우리 문에서 발을 멈추고 이렇게 지껄여댑니다.
"애그─저 가암 봐 어쩌면!" "좀 팔라구 그래볼까?" "곱기두 해!" 단발미녀는 우리집 뜰에 선 감나무에 가시 찢어질 듯 익어 어우러진 감을 보고 이러한 감탄사만으로는 못견디겠다는 듯 나에게 직접 교섭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보세요 (농부님). 저 감 한 가지枝 파세요. 네?"
그러나 이 무지한 농부는 (그는 나를 농부로만 알았다) 도회의 여성을 경멸하였습니다.
연탄연기, 가솔린 냄새, 비단옷, 뾰족한 구두, 그리고 어찌하면 코티 화장료로만 얼굴을 만지는 팔자가 될까, 어찌하면 걸음을 원 스탭식으로만 걸을 수 있을까…… 하는 허영밖엔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한 도회의 엔젤들에게 여지 없는 포탄을 던졌습니다.
"안파오!"라고.
도회의 미녀는 애원하듯 조르다가 결국 가고 말았습니다.
도회의 사람들은 불쌍합니다. 그들은 자연의 품속에 묻혀 살면서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연이 그들을 낳게 한 것이었건만 자연이 그들의 생명의 한 끝임을 알지 못하는 가련한 방랑자입니다.
그들은 이 썩가는 조그만 초옥草屋의 주인공이 몇 개만 매어달린 감 한 가지를 돈 원圓이나 주마는 데 안 팔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에 돈을 싫다고 할 농부가 있을까' 하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시골 있는 생질이 서울 구경을 왔습니다. 산으로 '그애'를 인도하였는데 '그애'는 주위를 한번 휘 둘러보더니 필경 한다는 말이 "아저씨 댁은 왜 이 모양입니까. 아저씨는 왜 이런 산골에서 사십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얘, 너는 이런 산 속이 심심하냐. 너 이 학생들 단체에 데려다 주마" 하였더니 '그애'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펄펄 뛰며 좋아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너무나 간사한 것인가 합니다. 도회에서 자란 애들이란 나뭇가지에 매달린 감만 보아도 요술이나 되는 것처럼 신기하게 여깁니다. 시골서 자란 애들이란 그따위 것쯤 심상타 못해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둘이 다 불행한 인간인가 합니다. (김용준, '서울 사람 시골 사람', 『조광』, 1936.1.)


▲심우장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한용운 - 심우장尋牛莊
티끌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깎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새암을 팠다.
구름은 손인 양하여
스스로 왔다 스스로 가고
달은 파수꾼도 아니건만
밤을 새워 문을 지킨다.
새소리를 노래라 하고
솔바람을 거문고라 하는 것은
옛사람의 두고 쓰는 말이다.

님 그리워 잠 못 이루는
오고 가지 않는 근심
오직 작은 베개가 알 뿐이다.

공산空山의 적막寂寞이여
어디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오는가.
차라리 두견성杜鵑聲도 없이
고요히 근심을 가져오는
오오 공산空山의 적막이여.

(한용운, '산거山居', 조선일보, 1936.3.27.)

 

▲ 성북동사람들 거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