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맑음晴
나는 어제 하루를 논 후에 오늘은 야근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동대문서 청량리를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 오후 여덟시나 되어 날이 몹시 추워졌다. 바람도 몹시 불기를 시작하여 먼지가 안개처럼 저쪽 먼 곳으로부터 몰아온다. 여름이나 봄 가을에는 장 안의 풍류 남아 쳐놓고 내 손에 전차표를 찍어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일요일은 일요일이지만은 나뭇잎은 어느덧 환란이 들어서 시름없이 떨어지고 수척한 나무들이 하늘을 뚫을 듯이 우뚝우뚝 솟았는데, 갈가마귀떼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간지도 얼마 되지 않고 다만 시골의 나무장수와 소몰잇군들의,
"어디어! 이놈의 소"
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탑골승방[현 보문동 미타사], 영도사[永導寺, 현 안암동 개운사] 또는 청량사 들어가는 어구는 웬일인지 전보다 더욱 쓸쓸해 보인다.
우리 차는 다시 동대문에 갖다 놓았다. 내가 추로리를 돌려대고 다시 차 안에 올라서서 차 떠날 준비를 하려 할 때, 차 안을 들여다보니까 그저께 새벽에 만났던 여자가 그 안에 앉아 있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여 한참이나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타기를 그쳤던 그 피가 다시 한꺼번에 활짝 타오르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속으로는,
"얘! 이거 자주 만난다!'
하는 생각이 나면서 웬일인지 차디차게 식은 땀이 뒷잔등이에 솟아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전차가 떠나기를 시작한 후 전차표를 받으러 속으로 들어갈 때에 나는 또다시 그에게 그의 손으로 주는 차표를 받을 생각을 하니까 웬일인지 공연히 마음이 두근두근하여지는 것이 온몸이 확확 달은 듯하였다. 두어 사람의 표를 찍어준 뒤에 나는 그 여자 앞에 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때 나의 생각은 관습적으로 나의 손을 내밀면 으레 전과 같이 지갑을 열어서 그 속으로부터 돈을 끄집어내려니 하였다. 그러면 내 손으로 찍어서
내 손으로 주는 전차표를 그 여자는 가지고 앉아 있다가 그것을 다시 운전수에게 주고 내리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의 손 내미는 것은 본체만체 하였다. 도리어 성난 사람처럼 암상스런 얼굴로 딴 곳만 보고 앉았다.
"표 찍으시오"
하고 나는 그에게 주의하기를 재촉하였으나, 그는 역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나를 한번 흘끔 쳐다보는 게 어쩐지 거만한 듯하였다. 그러더니 다시 저쪽 두어 사람이나 격하여 앉아 있는 사람 하나를 고개를 기웃하고 건너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앉아 있는 사람이 잊어버렸던 것을 깨달은 듯한 표정을 하더니 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내며,
"여기 있소!"
하며 금테 안경 너머로 꺼먼 눈동자를 흘기며 나를 불렀다.
"이게 웬 것이냐?"
하는 놀라운 생각이 나며 하는 수 없이 그 남자 편으로 가려하나 그 여자를 다른 사람처럼 그대로 본체만체 홱 돌아설 수 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여자를 훑어본 후 그 남자─ 금테 안경 쓰고 웃수염을 까뭇까뭇하게 기르고, 두 눈 가장자리가 푸루뚱하고 콧날이 오똑한 삼십이 넘을락말락한 사람으로, 얼핏 보며는 미두 시장이 아니면 천냥만냥패 같은 사람─에게로 가니까 그는 자랑스러운 듯이 지갑 속에서 일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할인 승차권 하나를 사더니 석 장만 찍으라 하였다. 나는 석 장 찍으라는 소리에 그 옆에 앉아 있는 양복 얌전하게 입고 얼굴이 대리석으로 깎은 듯한 '기시리아'[그리스] 타입의 청년이 같이 가는 남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차표를 다 찍어주고 차장대에 나와 섰을 때에 웬일인지 그 차표 내주던 남자가 밉고 또는 더럽고 질투성스러워 못견디었다.
전차가 영도사 들어가는 어구에 정거를 하자 그들은 거기서 내렸다. 이것을 보고서 나는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차표를 사던 남자가 나의 눈으로 보기에 어쩌 부랑자성을 띤 듯하였고, 또는 그 눈이나 입 가장자리가 몹시 음탕하게 보였으며, 그가 그 여자를 데리고 음부탕자가 비교적 많이 오는 절로 들어가는 것이, 장차 무슨 음탕한 사실이 그 속에서 생길 듯하여 공연히 그 남자가 미운 동시에 끌려가는 그 여자에게 동정이 갔다. 전차 차장의 직업이 그리 귀하지도 못한 것을 나는 안다. 비교적 얕은 지위에 있어서 어떠한 계급을 막론하고 날마다 그들을 만나게 되는 동시에 이와 같이 수상스런 사람들을 많이 보지마는, 이러한 수상스러운 남녀를 볼 적이면 공연히 욕도 하고 싶고 그들을 잠깐이라도 몹시 괴롭게 하고 싶은 생각이 나는데, 이번에 본 이 여자로 말하면 처음에 그와 같이 남루한 의복에다가 또 한 푼 없이 나에게 전차표를 얻어가던 자로서 오늘 와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몹시 거만하고, 또는 작은 은혜나마 은혜를 모르는 것이 가증한 생각이 들기는 들면서도 웬일인지 나의 가슴 가운데 있는 정서를 살살 풀리게 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떼어 보낼 때 나의 마음은 또다시 섭섭하였다.
12월 15일 맑음晴
오늘 일기는 따뜻한 일기다. 그런데 어저께 나는 우리 동료들에게서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들었다. 내가 맨 처음 어느 날 새벽에 파고다 정류장에서 만났던 때와 같이 그 여자가 역시 새벽마다 전차를 타고 의주통으로 향하여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 모습과 또는 행동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나의 기억으로 내 머리 속에 그려놓은 것이 꼭꼭 들어맞은 까닭에 그 여자로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일종의 호기심이 생기어서 나의 당번도 아닌데 남이 가지고 가는 새벽 첫차를 같이 탔다. 그러고서는 전차가 파고다공원 앞에 정거를 할 때에 나는 얼핏 바깥을 내다보았다. 혹시 내가 탄 전차와 상치나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어서 많은 요행을 기대하는 생각으로 그 여자를 만나보려 할 때 과연 그 여자가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뿐만 아니라 아니라 그 옆에는 어떠한 남자 하나가 그 여자의 어깨에 자기 어깨가 닿을 만큼 붙어서서 무슨 이야기인지 정답게 하는 것을 보았다.
전차에 오르는 여자는 그 전에 몸을 차리던 것과 판이하여졌다. 전에는 머리를 쪽지고 신을 신었더니, 지금 와서는 양머리에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전에 볼 적에는 몰랐더니 지금에 이 여자를 보고 전에 그 여자를 생각하니까 전에 있던 시골티와 어색한 것이 모두 없어지고 도리어 무엇엔지 시달려서 손때가 쪼르르 흐르는 듯하였다. 날이 추우니까 몸에다가는 망토를 입었는데, 쥐었다 펴기도 하고 꼼지락꼼지락 하는 손가락에는 한 달 전에 없던 금반지가 전등불에 비치어 붉은 빛을 반짝반짝 반사한다. 그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여러 번 만나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이 익숙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도 전차를 탔다. 그 남자라고 하는 사람은 한 달 전에 영도사를 나갈 적에 같이 가던 그 양복 입은 젊은 사람이었다. 영도사를 나갈 적에는 이 젊은 사람이 뒤떨어져서 홀로 비싯비싯 쫒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은 자기가 이 여자를 독차지하고서 승자의 자랑스러운 모양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귀찮아서 죽을 뻔하였어"
그 여자는 아양이라면 아양, 응석이라면 응석이라고 할만한 말소리로 그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진작 오실 일이지 시간이 지나도록 오시지를 않으셨소? 어떻게 기다렸는지 모르는데……"
남자는 차 안에서 그런 말을 하면 딴 사람이 들으니 아무 말도 않는 것이 좋다는 듯이 그 말대답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눈치를 챈 여자는 입을 다물더니 무안한 듯이 고개를 돌이키고 전차가 정거할 정류장의 붉은 등만 기다리는 듯이 내다보고 있다.
차가 종로에 와 서자 그 두 사람은 알아서 내렸다. 나는 오늘 생각한 바가 있음으로 그들을 따라서 내렸다. 나는 그들이 재판소[1929년 이후 종로경찰서] 앞 정류장을 향하여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혹시 그들에게 의심을 사지나 않을을까 하여 멀찍이 서서 뒤를 따랐다.그들이 사면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회로 생각하고서 서로 손목을 잡는 것을 나는 보고서 나의 온몸이 불덩어리 같아지고 내가 창피한 생각이 났다.
재판소 앞에 가더니 그들은 멈칫하고 섰다. 그리고 무엇이라 무엇이라 하더니 다시 그들은 재판소 옆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가까이 쫒아가보리라 하고서 뒤를 바짝 쫒으매 그들은 내가 따라가는 줄도 모르고서 이야기를 정답게 하면서 갔다.
"오늘 제가요! 그이더러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해버렸지요. 그러니까 껄껄 웃으면서 알았다 알았다 하며 얼핏 승낙을 하던데요"
"무엇을 알았다고?"
"당신하고 이렇게 된 것을 말이요"
"눈치야 챘겠지!"
"그렇지만 그이는 남의 생각은 조금도 해주지를 않아요. 같이 살려면 같이 살 도리를 차려준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으니 너와 나와 깨끗하게 갈라서자고 한다든지, 무슨 말은 없고 그저 질질 끌면서 오늘 낼 오늘 낼 하기만 하니 어떻게그런 사람을 바라고 살아요? 날마다 밤중이면 사람을 끌어다가 새벽이면 보내면서 한 번 바래다주기를 하나요"
남자는 아무 말이 없다가,
"우리 집에 가서 몸이나 좀 녹혀가지고 가지……"
"너무 늦으면 어떻게 해요?"
"무얼 집에 가면 또 무엇을 해? 할 것도 없으면서……"
"할 거야 별로히 없지마는 너무 자주 가면 딴 방 손님들이라도 이상히 알지 않겠어요?"
"괜찮아! 누군지 아나?"
"왜 몰라요, 눈치를 채지요"
이렇게 말을 하는 동안에 어느덧 어떠한 여관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여관문 개구멍으로 손을 넣어 고리를 벗기더니 두 사람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나는 다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앞 길을 탁 막아논 것 같이 멀거니 서 있기만 하였다. 그 여관 속에는 반드시 무슨 수상한 일이 있을 것을 알았으나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멍멍히 돌아올 때 그 집 담모퉁이를 돌아서려니까, 불이 환하게비치는 들창 속에서 남자와 여자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며 미닫이를 닫는 소리가 들리었다. 나는 '옳지! 이 방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조금은 아무 말이 없어서 공연히 나의 가슴이 아슬아슬하여졌다. 그러더니 옷이 몸뚱이에서 미끄러져 벗어지는 소리가 연하게 들리더니 기침 소리 두어 번이 나며 전깃불이 확 꺼지었다. 나는 모든 것이 더러웠다. 내 가슴 속에서 부드럽고 따뜻하게 타던 모든 것이 그대로 꺼져버렸다. 옆에 있는 개천에 침을 두어 번 뱉고서 큰 길로 돌아섰다. - 끝 - (『개벽』,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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