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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 길을 가는 마음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3. 29. 09:19


"가을은 벙어리같이 슬픈 때다.
그저 성가시게 어디론가 가고 싶어서 길을 떠난다.
당분간 편지 말어라."

벗은 아마도 어느날 아침 이러한 엽서를 받았을 게다.

사실 나는 낮 동안이나마 회합과 방문과 약속과 출근부의 감시에서 풀려서 길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호주머니 속에 다만 기차시간표와 지도와 약간의 현금을 쑤셔놓고 도망하는 것처럼 기차를 잡아탔다. 나는 차창에 기대서 오래간만에 철교의 근방에 몽크러선 백양나무 숲에 눈을 빼앗겼다. 그리고 푸른하늘로 향하여 팔을 벌린 그 나무가지들의 방향에서 무한에로 타는 나무들의 생명의 의지를 본다.
일찍이 '다다'의 한 사람은 흰 종이 위에 한 방울의 '잉크'를 떨어뜨리고 '성모마리아'라고 화제畵題를 부친 일이 있다. 당시의 파리 사람들은 그 그림 앞(?)에서 오직 조소와 경멸을 감추지 못했다. 어떠한 시대에도 범인凡人의 눈은 낡은 질서에 대한 새로운 정신의 타오르는 부정의 불길에 대하여 가엾은 한 장 종이임을 면치 못한다. 그 반역의 정신을 설명하는 것은 오직 생명의 말뿐이라는 것을 나는 기차 속에서 우연히 느꼈다.

한동안 서울의 시민들은 권투에 대하여 거의 탈선적인 열광을 보인 일이 있다. 그래서 권투구경이라고만 하면 삽시간에 시합장은 초만원이 되는 것이 의례였다. 흑인 '뽀비'의 이름은 실로 '나폴레옹'의 이름에 필적했다. 얼마 동안 나는 이 현상의 원인을 몰라서 흥미를 가지고 생각해 본 일이 있는데 역시 기차 속에서 갑자기 그것을 깨달았다. 즉 권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다른 어느 경기보다도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치열한 육체와 육체의 충돌에서 발산되는 생명의 불꽃의 이상한 매력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피로한 도시인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향수가 그들의 권투열에도 숨어있나 보다. 거기에 환경에 억압된 투쟁본능의 부단不斷한 발효醱酵도 그 한 원인일 것은 물론이다. 우리 문단에서는 평론이라는 것은 우선 싸움이 아니면 아니되는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이러한 곳에들 그 원인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

멀리 마을에서 들로 나가는 중간에 마른 개천이 있고 개천에는 비에 젖고 바람에 씻겨 엉성한 나무다리가 엎드려 있다. 그것은 마치 '엔진'에 끌려가는 소란한 '근대문명'을 조소하는 듯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오래된 다리의 거만을 책망할 아무 근거도 그 순간에는 준비하지 못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쉴 새 없이 문명에게 쫒겨 다니는 도시인의 생활에서 피로의 빛을 찾은 것 같다. 딴은 거리를 몰려다니는 그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흐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활기인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긴장의 가면인 것같다. 달리는 전차나 자동차는 물론, 신문배달도 교통순사도 '아이스크림' 장사도 '타이피스트'의 손가락도 모두 긴장해야만 한다.
그러한 활기는 우거진 풀 숲속에서 식물의 종족들과 벗하여 사는 사람들의 혈관 속을 흐르는 활기와는 다른 것같다. 하나는 자연 그 속에 뿌리를 박았고 다른 하나는 삐뚜러진 문명에게 시달리는 자의 주의注意의 연속連續이 꾸며내는 활기의 허세 [원문은 擬勢]인 것같다.

여행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한 사람의 생명찬미론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단상들에 대하여 다른 때의 글에서와 같이 엄숙하고 싶지는 않다. 왜그러냐 하면 될 수 있는대로 가볍기를 바라는 나의 여행에 그처럼 무거운 책임을 지우기는 싫은 까닭이다. 그것은 때때로 예기하지도 않았던 신기한 감격이나 인상이나 사색의 단서를 공급하기도 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것을 나는 여행에 향하여 기대한다. 그 이상으로 '자본론'이나 '논어'에 대한 것과 같은 일을 여행에 향하여 바라지는 않는다.

길을 가는 마음은 다만 시詩를 읽는 마음이다. 9.2. (『비판』, 19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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