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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 청량리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3. 28. 11:58


때때로 나는 서울을 미워도 하다가 그를 아주 버리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에는 그는 그 교외에 약간의 사랑스러운 산보로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들어 있다. 산보는 군의 건강에는 물론 사상의 혼탁을 씻어버려 주는 좋은 위생이기도 하다. 몸만 허락하면 매일이라도 좋지만 비록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아침에라도, 동대문에서 갈라져 나가는 청량리행 전차를 잡아 타기를 나는 군에게 권고하고 싶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종점은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군도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아담한 산보로의 하나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종점에서 전차를 내려서 논두렁에 얹힌 좁은 길을 따라가면 북으로 임업시험장[홍릉수목원] 짙은 숲속에 뚫린 신작로에 쉽사리 나설 수가 있다. 세상소리와 흐린 하늘을 피하여 우리는 숲속에 완전히 몸을 숨길 수도 있다.
군은 고요한 숲을 사랑하는 우량한 사상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일찌기 아리스토텔레스도 그 철학을 숲속에서 길렀다고 하지 않는가?
숲 가장자리에는 그리 높지 않는 방천[防川]이 좌우 옆에 갈잎을 흔들면서 맑은 시냇물을 데리고 길게 돌아간다. 이 방천을 걸으면서 군은 서편 하늘에 짙어가는 노을을 쳐다볼 수가 있을 것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손바닥에 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은모래 위를 조심스럽게 흘러가는 그 맑은 시냇물에 군의 불결한 사상을 가끔 세탁하는 것은 군의 두뇌의 건강을 위하여 충분히 청량제가 될 수 있는 일이다.
숲속의 산보로─ 나는 때때로 붓대를 책상귀에 멈추고는 생각을 그 길위로 달리기로 한다. (『조광』, 1935.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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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의 가을
괜히 남의 구미만 당기게 합니다 그려!
금강산을 못 보앗으니 꼭 가보고 싶습니다. 가을뿐이 아니라 어느 때고 가고 싶엇고 또 금년뿐만 아니라 발서 몇 해를 벼르나 돈이 없어 가지를 못햇습니다. (아마 보고 죽지 못할껄요)
웨 금강산을 가고자 하느냐고요?

그거야 모르지요. 내가 아직 금강산을 보지 못하엿으니 무엇이 어떠케 좋아서 가랴고 한댈 수야 잇습니까?
그저 예부터 좋다고 하고 가본 사람마다 좋다고 하니 좋을 것이야 물론이겟지요.
숨은 명승지라고는 별로 발견(?)하지 못햇습니다. 본시 여행을 싫어하지는 아니하지만 어려운 터에 틈 없이 지나는 팔자라 다니어 볼 생각조차 내이지 못합니다만은 굳이 말하라면 신통치 못하나마 한 곳 있기는 합니다.
청량리를 나가서 지금 경기도 임업시험장이 된 숲 속으로 들어섭니다.
그 속이 발서 주인 없는 큰 정원을 들어선 듯하여 마음이 후련한데 그곳을 지나 그 구내區內를 벗어나면 시냇물이 흐릅니다. 드라이브하는 자동차 등속은 물론 그림자도 없고 인적이 드문 솔숲과 모래 바닥을 소리 없이 굴러가는 얕은 시냇[물] 뿐입니다. 내가 이곳을 처음 간 것이 작년 가을인데 미상불 서울 근교에서 하루의 산책지! 더욱이 가을 날로는 매우 좋은 곳 인줄 여겼습니다. 더구나 이 시내를 끼고 좀 더 가면 정말 시골이 나오고 그곳에 두어 곳 과수원이 있어 포도니 배니 하는 과실을 재미있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같은 황금부족증黃金不足症의 평생고질平生固疾에 걸린 흥치객興致客에게는 안성맞춤인 줄 여깁니다.
금년에는 아직 못갔습니다. 포켓 속에 '영감' 한 장만 들어오면 두 다름질을 처서 뛰어갈 터입니다. (채만식, '가을의 유혹, 가을이면 내가 가는 숨은 명소는 어디어디'라는 설문에 답하며, 『동광』 1932.10.)

▲ 임업시험장 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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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에 공장이 노는 틈을 타서, 경수는 인학을 찾아갔다. 동대문 밖 용두리에서, 사글세방살이를 하는, 인학이는 집에 있었다.

[...]

미구에 인학은 중절모자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나왔다. 그들은 전찻길로 나와서, 청량리를 향하여 걸어갔다. 사월 초생의 따스한 일기는, 오늘이야말로 봄 기분의 농후한 색채를, 유난하 푸른 하늘빛과 아울러, 먼 산의 자줏빛 아지랑이 속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경수는 기분이 유쾌하였다. 청량리 앞, 다리를 당도하자, 담배 한 개씩을 피우고 가자고, 걸음을 멈춰 섰다. 다리 밑으로는 백사장 위를 맑은 물이 쫄쫄 흐른다. 그는 담배값을 꺼내서, 인학이와 한 개씩을 피워 물었다. 오래간만에, 교외를 나와 보니, 어느덧 십년 전으로 흘러간 물 같은, 옛날의 방랑 시절이 눈앞에 다시 온 것 같다. (이기영, '십년 후', 『삼천리』, 1936.4.)


청량리 [옛]홍릉, 조선 전차의 발상지

  •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 시해
일본인 소촌실小村室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매우 영리하였으므로 민후閔后가 사랑하여 항시 대궐로 불러들였다. 삼포오루三浦梧樓는 그에게 일병日兵을 따라 배우들과 함께 연극을 보게 하고 민후閔后의 초상肖像 수십 개를 간직하게 하였다가 하루 속히 거사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모를 시해하면 죄가 발각될까 싶어 대원군과 내통한 후 한밤중에 공덕리[공덕동]로 가서,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인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민후의 초상을 하나씩 들고, 소촌실의 딸은 그들을 인도하여 곤녕전坤寧殿에 도착하였다. 궁중에는 횃불이 훤하게 밝아 개미도 다 볼 수 있었다. 그는 이경직李畊稙을 만나 민후가 있는 곳을 물었으나 이경직은 모른다고 말한 후 소매를 들어 그들의 시선을 차단하므로, 그들은 그의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을 잘라 죽였다. 이때 민후閔后는 벽에 걸려 있는 옷 뒤로 숨어 있었으나 그들은 민후의 머리를 잡아 끌어내었다. 소촌실의 딸은 민후를 보고 확인하였다. 민후는 연달아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일병들은 민후를 칼로 내리쳐 그 시신을 검은 두루마기에 싸가지고 녹산鹿山 밑 수목 사이로 가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운 후 그 타다 남은 유해 몇 조각을 주워 땅에 불을 지르고 매장埋葬하였다. (『매천야록』, 1895)
  • 1896년 2월 11일. 고종, 경복궁에서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김 [아관파천]
  • 1896년. 시호는 명성, 능호는 홍릉.
순경왕후純敬王后의 시호를 명성明成[명성왕후]으로 바꾸고 능호는 홍릉洪陵, 전호殿號는 경효景孝라고 하였다. 처음에 시호를 지을 때 문성文成이라고 하려다가 고종도 그 시호가 알맞지 않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 다음에 올린 망첩望帖대로 하였다. (『매천야록』, 1896)
  • 1897년 2월 25일. 고종, 정동 덕수궁으로 환궁.
  • 1897년 10월 12일 고종, 원구단圜丘壇에서 대한제국 황제 즉위.
  •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를 청량리 홍릉에 예장.
[음력] 10월 27일 오후 7시경에 큰 뇌성이 울렸다. 그리고 28일[양력 11월 22일]에는 명성황후를 홍릉洪陵에 예장하고 아흡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처음에 고종은 민황후의 능제陵制를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청나라 남경南京으로 사람을 보내어 명나라 고황후高皇后의 효릉孝陵을 그려 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 계척과 난간을 모두 옥玉으로 각刻하여 문채를 만들었음을 보고, 그 경비는 우리 국고의 1년 경비에 해당하여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하므로 그 일을 포기하고 부득이 생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전후로 든 비용은 거액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조國朝의 산릉山陵 중에서 가장 훌륭하였다. 제육가祭肉價만 해도 6만냥이 들고 호여전[호轝錢]은 6만2천여 냥, 거군轝軍은 7천명, 등롱燈籠은 준비한 이외에도 1,100쌍을 더 진열하였으며, 수능복호전守陵復戶錢은 105결結이나 되었다. 다른 비용도 이와 상당하여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고종은 황후의 신당神堂에 들어가 땅을 치며 통곡하여 눈물이 방울방울 얼어붙어 있어, 군신들은 한기寒氣로 인하여 옥체가 감손減損될까 싶다고 간하였으나 끝까지 듣지 않았다. (『매천야록』, 1897)
  • 1899년 5월 17일.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홍릉] 9.7Km 구간 조선 최초의 전차운행 개시
홍릉洪陵에 전차를 신설하였다. 고종이 자주 행차하므로 신속하게 가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전차가 매우 빨라 날마다 바퀴에 깔려죽는 아동의 수가 수 명이나 되었다. (『매천야록』, 1899) ※ 황제전용전차까지 마련되었다고 하나, 공식기록에서 고종 황제가 전차를 탔다는 기록은 찾지 못함.
  • 1919년. 고종황제 사후 홍릉을 경기도 남양주 금곡으로 옮겨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