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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 여우목도리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3. 29. 10:16


어느 관청에서 고원雇員 노릇을 하는 최 군은 '보너스' 경기[景氣]에 불려 파해 나오는 김에 동료들과 오뎅 집에서 곱부 술을 서너잔이나 마셨다.
'일금 2원57전'을 뜯긴 덕택에 거나하게 취해서 일부러 비틀거름을 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래야 7원짜리 남의 집 곁방이지만 오늘저녁만은 시꺼먼 판장문이 소슬대문만치나 드높아 보였다.
"밥 다 됐수?"
목소리도 전에 없이 컸다.
"왜 인제 오셔요? 또 술을 잡쉈구료?"
침침한 부엌에서 나올망정 저녁 화장품을 곱다랗게 하고 맞아들이는 아내의 얼굴은 첫날밤 만치나 어여뻐 보였다.
"아암 한 잔 허구말구, 오늘 같은 날 민숭맨숭허게 지낼 수야 있나"
하고 최 군은 툇마루에 펄석 주저앉았다. 아내는 구두끈을 끌르다가 옆집에 들리지 않도록,
"상여금 탔죠?"
최 군은 양복 안 포켓에서 배가 불룩한 누런 봉투를 끄내더니 자랑스러이 흔들어 보인다.
"얼마?"
"2할"
"에게─, 단 20환……?"
아내는 실망하는 눈치다.
"예─끼, 바─보. 월급의 2할이니깐 90원이야. 90원. 그만 셈수두 못친담"
최 군은, 음푹하게 움틀진 아내의 볼을 손가락으로 쫙 벌렸다.

아내는 90원이란 말만 들어도 흐뭇한 듯이 방으로 따라들어와 외투를 벗겨주다 말고 은행꺼풀 같은 눈을 깜박이더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나 아서요?"
하고 남편의 불콰한 얼굴을 빤히 쳐다 본다.
"상야금 탄 날이지, 무슨 날이야"
하다가 최 군은, 벽에 붙은 일력을 멀거니 쳐다보더니,
"아, 참!"
하고 그제야 깜짝 놀라 무릎을 탁치며,
"1주년 기념이구료!"
그는 부르짖듯하고 생그럽게 아내의 어깨를 껴안는다.
"일력을 보구야 깨달으시니 참 장하시군요"
아내는 금새 뾰로퉁해졌다.
"설마 결혼한 날짜야 잊어버렸을 리가 있나. 저─ 두 말 말구 나갑시다."
"저녁을 다 해놨는데, 나가긴 어디 나가요?"
"오늘 저녁만은 먹구 싶은거 실컷 먹구, 사구 싶은건 뭐든지 사줄테니…… 자, 어서 어서 어서!"
최 군은 웃목에 식지를 덮어놓은 밥상을 발길로 밀어놓고 아내가 옷을 갈아입기가 무섭게 떠다밀듯하면서 골목 밖으로 나왔다.
얼큰한 판이라,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가 엄동설한에 손등이 터지도록 고생을 시키는 것이 새삼스러이 가엾은데, 더구나 첫아기를 밴 생각을 하니, 내일은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상감님 감투 사러 가는 돈이래도 수중에 있다면 흥청망청 쓰고 싶었다.
양식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최 군은 정종을 서너 '도꾸리'[호리병]나 마셨다.
"장비야 내 배 다칠라"
하는 듯이 떡 버티고 큰길로 나와, 눈이 부시도록 전등불이 휘황한 백화점으로 아내를 앞세우고 썩 들어섰다.
백화점 속은 인간사태가 밀린 듯한데, 어깨로 간신히 사람의 물결을 헤치고 맨 먼저 귀금속을 파는 데를 갔다.

"반지 사료?"
직업을 얻기 전에 집세에 몰려 결혼반지를 잡혔다가 떠나려 보낸 생각을 한 것이다.
"……"
아내는 머리만 짤래짤래 흔든다.
"그럼 우데마낀?"
팔뚝시계는 월 전에 고쳐준다고 끼고 다니다가 어느 카페에서 술값으로 쳐맡기고 여태 찾지를 못하였다.
"……"
아내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그럼 윗층으로 올라갑시다"
내외는 나란히 승강기를 탔다. 최 군은 '핸드백'이나 '코티'분[粉] 같은 화장품이나 사려나보다 하고 벌떼처럼 뒤를 따르는데 아내는 이것도 저것도 다 마다하고 모물毛物을 늘어놓은 진열장 앞에가 발을 멈춘다.

수달피, 너구리털, 여우털 목도리가 수없이 걸렸는데 기생퇴물인 듯한 조바위를 쓴 여자가 서넛이나 여우목도리를 흥정하고 섰다. 아내는 층층이로 매어달린 크고 작은 여우꼬리를 차례차례 쓰다듬어도 보고 뺨을 갖다대고 살그머니 부벼도 본다. 그러다가 뚤레뚤레 둘러 보더니 진열장 꼭대기의 유리갑 속으로 시선이 달렸다. 기다란 꼬리를 세우고 쭈그리고 앉은 짙은 회색 바탕에 은빛이 도는 커다란 짐승을 가리키며 콧소리를 섞은 응석조로,
"나, 저거어"
하고 추파를 던지듯이 남편을 힐끗 돌려다 본다.
"저겁쇼? 저건 은호銀狐 올시다"
점원은 '정말 살테냐'는 듯이 여자 손님의 아래, 위를 슬쩍 훑어보고는 은호 목도리를 두 손으로 받들어 내려놓는다.
"거 얼마요?"
"오백원이올시다"
"응? 오백원?"
최 군은 취중에도 입이 딱 벌어졌다. 꼬랑지에 정가표 붙은 것을 뒤집어보니
¥=500이 틀림없다.
최 군은 하도 엄청나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슬그머니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무안에 취한 듯 귀밑까지 발개져 가지고 머리를 푹 스으리고 선 그 모양!
"그럼 저건 얼마요?"
"35원이올시다"
아내는 점원이 꺼내는 여우가 겨우 쪽제비만한 것을 곁눈으로 보고,
"난 갈테야요!"
하고 싹 돌아선다. 그러나 최 군은 남편인 체면상, 또는 여러 손님들과 점원의 눈 앞에서 그대로 돌아서기에는,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여보, 그럼 은호는 만져나보구 저 눔이나 사[서 목에] 둘르고 갑시다"
최 군은 용기를 백 배나 내어 중간치쯤 되는 80원짜리를 끌어내려, 정가표를 떼어 던졌다. 그리고는 상여금 봉투를 꺼내어 거꾸로 들고 훌훌 털었다.
학생시대부터 둘르던 때묻는 목도리는, 최 군이 싸들고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라오는데 아내는 유리로 해 박은 노란 눈깔이 유난히 반짝이는 여우에게, 그 하얀 모가지가 휘감겨, "인제야 평생소원을 풀었다"는 듯이 백화점문을 나섰다.
전차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려니, 북악산 석벽을 깎으며 내려 지르는 찬바람에 최 군은 술이 번쩍 깨었다. 양복바지에 손을 찔러보니 은전 서너 닢과 백동전 몇 푼이 쩔그럭거릴 뿐…….
'제─기, 외투하구 양복 월부는 어떡한담'
혼자 중얼거리며 뒷통수를 긁적였다. 두 달씩이나 상여금 핑계만 하고 [외상을] 밀려오던 싸전과 반찬가게며 나뭇장 앞을 죄진 놈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지나쳤다.
아내는 의기양양해서 구두 뒷축이 얼어라고 골목 속으로 달랑거리며 들어가는데, 몸이 출석거리는대로 목에 휘감긴 누런 짐승이 꼬리를 살레살레 내젖는다.
최 군은 어쩐지 여우에게 홀린 것 같았다. 아내가 목도리에 홀린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이 두 눈을 뜬 채 정말 여우한테 홀려서 으슥한 골짜기로 자꾸만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동아일보 1936.1.25)

 


겨울이 왔다. 도회의 여성이 털보가 되는 때다. 여우털, 개털, 쇠털, 털이면 좋다고 목에다 두르고 길로 나온다. 구렁이도 털이 있다면 구렁이 가죽도 목에다 들렀을까?

(안석영, 가두풍경, 「털시대」, 조선일보 1932.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