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보 좀 허구 오리다."
빨래하던 손을 멈추고 놀라 멍멍히 쳐다보는 아내에게 말해버리고 기호는 집을 나섰다.
暮雲千里色 모운천리색
無處不傷心 무처불상심
─ 형숙荊叔
거리에는 벌써 저녁빛이 어리고 있었다. 이따금 산뜻산뜻 불어오는 바람이 맑고도 차다. 하늘에는 붉게 놀이 뜨고 그 빛이 집집 지붕 위에 던져져서 역광선으로 보면 그 모든 지붕이 마치 눈부시는 황금색 테를 두른 것같이 보인다.
창경원 문앞까지 왔을 때 기호는 문득 발을 멈추고 지붕 추녀끝을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보통 때는 때묻어 보이고 무겁고 둔해 보이는 추녀였으나 이렇게 맑은 가을하늘 밑 황금색 저녁 햇빛에 비쳐보는 감각은 무슨 아름다운 꿈을 품고 금시로 푸른 하늘로 내딛을 듯이나 가볍고 산뜻해 보인다. 보고 있는 동안에 기호의 눈은 점점 경이와 찬탄과 기쁨의 빛으로 가득해갔다. 조선식 건축에 그런 아름다운 감각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감각의 둔함을 비웃을 사람이 있을지는도 모르나 지금까지 모든 교양을 조선의 전통과는 아무 관계없이 받고 쌓고 해온 기호로서는 또한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하기는 비단 건축뿐 아니라 근래에 와서 기호의 이르는 곳에서 전에는 당초에 생각해본 일도 없는 조선적인 아름다움을 하나씩 둘씩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쓰레기통 속같이 더럽고 지저분한 것만이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이라고 생각하던 그로서 우리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가 사실은 진주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을 그속에 남겨놓으셨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은 또한 큰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기호의 심정은 마치 <파랑새>의 동화와도 같았다. 가을 하늘에 솟은 지붕 추녀의 감각도 이러한 동화의 한마디이기는 하리라. 그러나 그 동화는 이왕에 그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사진을 보고 느끼던 감격보다는 더 깊은 가슴속 영혼에 깃들고 포근하게 혈관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기호는 몸이 제법 거든거든해지는 것을 느끼고 원남정 네거리에서 오른편으로 꺾여 사람이 적은 종묘 뒤 큰거리를 휘적휘적 서편으로 걸어갔다. 육교를 지나서니 눈앞에 탁 트이는 해질 무렵의 거리의 풍경이 속이 시원하다. 기호는 문득 오래 만나지 못한 화가 홍림弘林을 생각했다. 어째 그런지 홍림을 만나면 말이 서로 맞을 것 같았다. 그래 그는 돈화문 앞 파출소 옆에서 운니정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홍림은 마침 집에 있었다. 이층 아틀리에서 레코드를 틀어놓고 침대에 누웠다가,
"어, 김군, 이거 웬일인가. 어서 오게."
하며 반가와 벌떡 일어난다. 검은 나사羅紗의 나이트 캡, 자주빛 공단 나이트 가운. 가죽 슬리퍼를 끌고 나오며 손을 내민다.
"이거 괜히 실례했군. 남의 가정단란을 깨뜨려서."
기호는 문을 열어준 홍림의 부인과 홍림과를 번갈아 보면서 미안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원 별소릴 다. 자, 이리 앉게. 레코드를 한 장 새로 사왔기에. 가만 잠깐만 기다리게."
레코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기호는 음악을 잘 몰라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으나 어쨌든 고요한 아름다운 곡조였다. 레코드가 끝나자,
"어쩔까요?"
"마저 걸지 뭐."
조선에는 몇개 없는 단파수신기까지 장치되었다는 홍림이 일상 자랑하는 유성기에서는 이번에는 여울물같이 급하고 격한 곡조가 사람의 가슴을 쥐어뜯듯 쏟아져나왔다. 웬 심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호탕하고 장쾌한 품이 기호가 듣기에도 무슨 명곡임에는 틀림없었다.
"좋지?"
곡조가 끝난 후에 홍림은 몹시 감격한 얼굴로 기호의 동감을 구한다.
"좋으네. 무슨 곡존가?"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제 이번. 스토코프스키 지휘의. 자네 저번에 <오케스트라의 소녀> 안 봤는가?"
"내가 어디 구경다니나."
하녀가 홍차하고 과자하고 가지고 들어온다.
"그래두 그것쯤은 봐둘걸 그랬네. 자넨 원체 집속에 들어앉아 혼자만 꿍꿍대는 성미니."
"그러기에 이렇게 산볼 나섰다네. 자네한테 최신 소식두 들을 겸."
"나헌테서 최신 소식? 자네 요샌 말솜씨 늘었네그려. 난 벌써 세상을 버린지 오랜 사람 아닌가."
홍림이 세상을 버렸다고 자처하는 것은 이유가 없는 소리도 아니다. 그도 기호들이 동경 있을 때에 역시 동경서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한때는 미술에 대한 평론도 쓰고 좌익적인 연극 단체에 관계해 배경도 더러 그려주고 하던 사람이나 서울로 돌아와서 아틀리에에 붙은 문화주택을 지은 후로는 평론은 커녕 가장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무슨 <예술가>되는 것은 단념했으나 그대신 음악, 영화, 스포츠, 문학, 무용, 연극 등 모든 방면으로 순을 뻗쳐 그 각 방면의 가장 새로운 뉴스에도 정통하고 있었다. 요새 와서는 골동품 취미가 또 유행이라 그도 돈은 있겠다 골동품도 더러 사들이곤 하였다. 그런 생활 태도를 가장 속물적인 것이라 해서 기호는 일상 은근히 속으로 업신여겨온 것이나 어째 요새 와서는 도리어 홍림이 선각자인 것같이 생각되어 그에 대해 슬그머니 친근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거 한 장 마저 틀까요?"
홍림부인이 또 붉은 딱지 붙인 십이 인치 판을 들고 홍림을 쳐다본다.
"틀어."
부인에게 말하고 나서 기호를 보고,
"이포리토프 이바노프Ippolitov-Ivanov 작곡. 코카서스의 풍경. 몹시 포퓰러한 곡조니까 자네도 알겠지만."
유성기에는 이번에는 호궁胡弓을 켜는 듯한 애초로운 소리가, 그러나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홍림은 침대 위 쿠션에 비스듬히 누워 해태 연기를 귀찮은 듯이 내뿜고 있다. 기호도 안락의자에 푸근히 기대어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역시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몹시 동양적인 정서가 흐르는 곡조다.
"그런데 말이야……"
별안간 홍림이 말을 꺼냈다.
"……거 이상허지. 전엔 음악도 서양것이라야만 덮어놓고 좋더니 요샌 웬일인지 이런 이국적 동양적인 것이 좋단 말이야. 그야 베토벤인 둥 모짜르튼 둥 차이코프스크 둥 좋기야 좋지만 그저 좋을 뿐이라고 이렇게 우리 살속으로 핏속으로 스며들지는 않는단 말일세. 자넨 어떤가. 우리 동양사람에겐 역시 동양것이라야……"
"그것도 시세요 유행이니까"
"유행?
"홍림은 약간 불쾌한 낯을 했다. 동시에 기호는 어느새에 자기 얼굴에 사람을 비웃는 미소가 뜬 것을 자각하고 몹시 당황해 했다. 불과 삼십 분 전에 창경원 문 지붕 추녀를 쳐다보고 감격했던 자기가 아닌가. 자기와 홍림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기는 차이가 아주 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인지 기호는 얼른 스스로 분석할 수 없었다.
홍림 부부에게 붙들려 간단한 저녁 대접을 받고 그집을 나왔을 때에는 벌써 땅거미 때를 지나 어둑어둑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기호는 허탈한 사람같이 아무 생각도 없었다. 벌써 바람은 꽤 찼으나 저녁을 먹은 바로 뒤라 동네 애들이 뿌듯하도록 나와 이리저리 뛰놀고 있었다. 소학교 운동장을 떠다논 것모양으로 야단법석이다. 그중에서 별안간,
"왓쇼 왓쇼(영차 영차) !"
하는 여러 아이가 소리를 모아 지르는 함성이 유난스레 요란하게 들려왔다. 기호는 자다 깬 사람 모양으로 걸음을 멈칫하고 소리나는 편을 바라보았다. 여러 아이들이 떼를 지어 떠들며 좁은 골목을 이편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왓쇼! 왓쇼!"
소리는 점점 가까와지며 내내 기호의 눈앞에 아이들 무리가 나타났다. 오미고시[[お神輿] 장난을 하는 것이었다. 맨 앞에 좀 큰 아이가 서고 새끼줄을 두 갈래로 늘여서 그 새끼줄에 좀생이들이 청어[비웃]두름 모양으로 주렁주렁 매달려서 왓쇼! 왓쇼! 소리를 치며 뛰는 것이었다. 새까맣게 더러운 남루한 옷을 걸친 것으로 보아 소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는 이 근처 행랑이랑 남의 집 곁방이랑에 사는 사람들의 애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애들은 의기가 등등해 지나가는 어른들에게도 막 부딪쳤다. 기호는 아이들을 피하느라고 잠깐 길옆으로 비켜섰었으나 웬 아이인지 한가 달려들어 구두를 질컷 밟고 뛰어 지나갔다.
등까지 싸늘해지는 바람이 얼굴을 획 스친다. 기호는 스프링코트의 동정을 세우며 오늘이 시월 스무닷새 경성신사의 추기대제를 지낸 지 일 주일밖에 안되는 것을 생각하였다. 기호는 건강이 나쁜 탓으로 온 경성 사람들이 모두 들끓어 나서는 이 추기대제 때에도 벌써 삼년째나 집속에 들어 엎드렸던 것이다.
─ 본정을 가면, 이렇게 생각한 기호는 별안간 예정을 변해 버스 정류장에서 동소문행을 타지 않고 대화정[필동]행을 탔다. (유진오, '가을',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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