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랑정이란 대원군 집정시대에 선전관으로 이조판서 벼슬까지 지내던 나의 삼종 증조부 되는 서강대신 김종호가 세상이 뜻과 같지 않아 쇄국의 꿈이 부서지고 대원군도 세도를 잃게 되자 자기도 벼슬을 내놓고 서강-지금의 당인정 부근-강가에 있는 옛날 어떤 대관의 별장을 사 가지고 스스로 창랑정滄浪亭이라 이름 붙인 후 울울한 말년을 보내던 정자 이름이다. 내가 처음 창랑정을 갔던 것은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일곱 살이나 잘 해야 여덟 살 먹었을 적이었으니까 이럭저럭 스물 일여덟 해 전 일이다.
[1920년 이전] 이른 봄─ 봄이라도 냉이 순이 파릇파릇 내밀 무렵이었으니까 삼월 중순이나 하순께쯤이었을까. 나는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 가서 며칠 동안을 지낸 것이었다. 그 며칠 동안에 보고 듣고 한 기억이 이상스레도 어린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서 거의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가끔 내 추억의 나라 속을 왕래하며 때로는 달디단 일종의 향수가 되어 내 마음을 안타깝게 까지도 하는 것이다. 창랑정은 서강이라 해도 당인리 편으로 가까운 강가 솔 숲 우거진 조그만 봉우리가 강으로 향해 비스듬히 얕아지다가 별안간 깍아지른 듯이 낭떠러지가 된 바로 그 위에 있는 칠십 간이 넘는 큰 집 이었다. 서강 동네를 지나 강가에 나서서 서편을 바라보면 보통 때는 물 한 방울 없는 개울 건너 저편 언덕 위에 좌우로 줄행랑이 늘어서고 가운데 소슬 대문이 우뚝 솟은 큰집이 보인다.
"자 인제 다 왔다. 저기 저 집이 창랑정-서강 할아버지 댁이다."
왼손으로 타박거리는 내 바른편손을 붙들고 아버지는 바른편손으로 단장을 들어 개 건너 큰 집을 가리키셨다. 저녁해를 비스듬히 받은 그 큰 집의 인상이 얼마나 이상스러웠던지 처음으로 아버지가 그집을 서강 할아버지 댁이라고 가리켜 주시던 그 순간의 광경이 엊그제 일같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가까이 가보니 창랑정은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지은지 몇백 년이나 됐는지 행각 기둥이 이리저리 기울고 쓰러진 아주 퇴락한 옛집이었다.
[...]
어른들의 이야기가 너무 오래 계속되므로 나는 갑갑함을 참다 못해가만히 자리를 일어나서 웃목 두껍닫이를 열고 누마루로 나갔다. 누마루도 문은 사방으로 다 닫혔으나 저녁 햇볕을 받아 정신이 번쩍나게 환하게 밝았다. 장식은 별로 없으나 이곳에도 가뜩 쌓인 책과 대들보에 걸린 '청랑정滄浪亭'이라는 현판이 역시 나의 호기심을 끌었다, 나는 창랑정이라는 현판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옳지 창랑정 창랑정 하더니 찰 滄자 물결 浪자 정자 亭자로구나 하고 그것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 몹시 기쁘고 뽐내고 싶었다. 현판은 서강대신이 스스로 쓴 것이어서 끝에는 '수암濤庵'이라는 서명까지 있었다.
한참이나 현판을 쳐다보다가 나는 마룻가로 가서 강 편으로 향한 덧문을 밀어 보았다. 의외에도 덧문은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리며 예기하지 못했던 창랑정의 웅대한 풍경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아! 그 일순간에 소리도 없이 내 눈 속으로 확 달려들던 창랑정의 대관, 그것도 역시 내 눈에 선하다. 바로 눈 아래 보이는 검푸른 물결. 물결 건너로 눈에 가득하게 들어오는 넓고 넓은 백사장, 그 백사장 저편 끝으로 멀리 멀리 하늘 끝 단 데까지 바닷물결 치듯 울멍줄멍한 아득한 산과 산-나는 그 장대한 풍경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 곳에 섰었다.
[...]
서강대신 대상 때에는 벌써 집터까지 남의 손으로 넘어가 창랑정은 텅 비인 껍데기 뿐 이었다. 그때 여러 해만에 아버지를 따라 정든 고향을 찾아들 듯이 다시 창랑정을 나간 나는 너무나 심한 그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득시글득시글 하던 옛날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고 집은 무너지는 대로, 마당의 잡초는 나는 대로, 거기다가 그 큰집에 그 날 모인 사람들이라고는 불과 십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을순이와 놀던 동산에 볼만한 나무 한 주 없고 남치마 입은 새댁들이 득시글거리던 대청에서는 까만 생쥐 같이 초라한 형수가 늙은 어멈 하나를 데리고 제수를 차리고 있었다. 저이가 그 달덩이 같이 보이던 형수인가,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날 밤 서강대신이 거처하던 큰사랑에는 나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일여덟 분이 둘러앉아 보슬비에 젖은 것 같은 얕은 음성으로 가지가지 회고담을 하고 계셨다. 그때는 나도 나이 열 여섯이라 어른들 말씀을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임진란에 창랑정이 진터가 되었었다는 이야기로부터 대원군 시절에 선교사를 학살한 것 때문에 블란서 해군제독 로즈 장군이 '프리모게' 이하 군함 세 척을 거느리고 강화도로부터 한강을 쳐 올라와 조정을 빨끈 뒤집히게 하며 여러 날을 정박하던 곳이 바로 창랑정 마당 앞이었다는 이야기, 그때에 조정에서 가장 맹렬하게 '양이배척'을 주장하던 이는 다른 이가 아니라 선전관으로 계시던 서강대신 바로 그분이었다는 이야기들을 밤이 이슥토록 하고 계셨다.
[...]
그후 다시 거의 이십 년, 나의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나는 내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창랑정은 아주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말았다. 종근형의 식구가 서울 살림을 다 파헤치고 시골 일가 촌중으로 낙향해 간지도 이미 오래다. 그동안 나는 창랑정을 잊지는 않았어도 별로 그렇게 심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올 봄 들어서며 웬 일인지 연속해 세 번이나 창랑정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반드시 나는 도로 일곱 살의 소년이며 창랑정 앞 하늘에는 노을이 뜨고 큰사랑에는 서강대신의 은실 같은 수염과 거물거리는 황촛불이 있으며 아버지는 단장을 들어 창랑정을 가리키시고 뒷동산에서는 나와 을순이가 저녁 햇빛을 받고 노는 것이다.
세번째 꿈을 꾸었을 때 아침에 일어나니 나는 어젯밤 꿈이 하도 역력해 그리운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서강대신의 제삿날 밤 이후 거의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창랑정에 가 본 일이 없는 것이다. 마침 공일이요 거기다가 시절도 바로 삼월이라 나는 점심을 먹은 후 산보 겸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섰다.
처음 타보는 당인리행 기동차를 타고 서강에서 내려 나는 옛날 기억을 더듬어 창랑정을 찾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상스레도 그 산이 어느 산 이든가, 그 집이 어느 집 이든가, 꿈속에서는 그렇게 똑똑하던 곳이 실지로 가보니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근사해 보이는 곳을 찾기는 하였으나 집 뒤 산이던 곳은 발간 북더기요 그 밑 창랑정이 있던 듯이 생각되는 곳에는 낯모르는 큰 공장이 있어 하늘을 찌를 듯한 굴뚝으로 검은 연기를 토하고 있었다.
너무나 심한 변화에 실망한 채 나는 한참이나 공장 앞마당 석탄재 쌓인 위를 거닐며 꿈속의 기억을 되풀이하여 보려고 하였다. 마당 앞 낭떠러지 밑 푸른 강물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출렁거리고 있다. 그러나 음산하게 찌푸린 하늘에서는 봄이라 해도 오슬오슬 쌀쌀한 바람이 불어 내려올 뿐 끊임없이 왈가닥거리고 돌아가는 기계 소리는 애써 옛 기억을 더듬으려는 내 머리를 여지없이 혼란시킨다.
창랑정은 추억의 나라, 구름과 안개에 싸인 꿈의 저편에만 있을 수 있는 존재였던가? 나른한 추억에 잠겼던 내 정신은 차차로 굳센 현실 앞에 잠 깨 온다. 문득 강 건너 모래밭에서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린다. 건너다보니 까맣게 먼 저편에 단엽 쌍발동기 최신식 여객기가 지금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여의도 비행장을 활주 중이다. 보고 있는 동안에 여객기는 땅을 떠나 오십미터 백미터 이백미터 오백미터 천미터 처참한 폭음을 내며 떠 올라갔다. 강을 넘고 산을 넘고 국경을 넘어 단숨에 대륙의 하늘을 무찌르려는 전금속제全金屬製 최신식 여객기다.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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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주위에는 많은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에서는 왕실이나 군신간의 연회를 베풀거나 특별한 손님을 접대하기도 하였으며,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으면서 국정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자를 무대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시적 교류를 맺으면서 시회詩會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는 등 정치적·문화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이곳 한강가의 정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던 곳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한강의 어제와 오늘』,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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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개통해 100년 동안 사람과 화물을 실어날랐던 용산선이 27일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이날 오전 11시30분 마포로를 가르며 지나가던 마포철교 상판(길이 60m)이 마지막으로 철거되는 것이다. 철도공사는 그동안 경의선(용산~가좌구간)과 인천공항철도(용산~수색) 지하화 공사를 벌여왔다. 2008년까지 이 구간의 지상철로를 걷어내고 지하 10m의 ‘저심도’엔 경의선을, 지하 40m의 ‘고심도’엔 인천공항철도를 놓는 계획이다. 공덕역·홍대입구역은 기존의 지하철역에 덧붙여 경의선·공항철도 정거장의 구실을 맡게 된다. 효창역·서강역 등 경의선 전용 역도 생겨난다. 기존에 서울역에서 신촌역으로 이어지던 경의선은 회차 차량을 위한 예비 철로로 남겨진다.
이 공사가 마무리되면 철길이 있던 자리에 길이 7.1㎞의 빈터가 긴 띠처럼 생겨난다. 마포구는 이 띠의 주변지역까지 포함해 7만500평에 이르는 녹지공간으로 만들어 주민들에게 되돌려줄 계획이다. 27일 공덕역에서 벌어지는 ‘마포철교 철거 기념식’은 철길의 죽음과 녹지축의 탄생을 동시에 기리는 의미다.
용산선은 일제가 1906년 경의선 총 구간을 완공하기에 앞서 가설돼 건설자재를 실어날랐던 용산~수색 구간의 철로다. 당시엔 지금의 신촌역을 지나는 대신 용산역에서 수색으로 직접 이어지는 코스를 이용했다. 1906년엔 서강역을 설치하고 여행객들을 받았다. 29년 3월엔 동교동에서 당인리화력발전소까지 이어지는 석탄화물 전용 철로가 생겨났다. 발전소로 이어지던 철로는 발전소 연료가 석탄에서 액화천연가스(LNG)로 바뀌며 철거된 이후 주차장으로 쓰이다 일부 구역은 ‘걷고싶은거리’로 단장했다. (한겨레, 200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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