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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심은 오늘부터 방학이라 느직이 조반을 먹고 진고개로 나섰다. 눈이 아직 녹지 않은 것이 좋았다. 은심은 꽃집 앞을 지나다 발을 멈춘다. 얼음쪽 같은 유리창 안에는 희고 붉은 '카네이션'과 새파란 '아스파라거스'가 무데기무데기 어울어졌다. 발에서 꺾듯이 급하게 들어가 서너송이를 골라 샀다. 그 길로 찻집에 들어가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었다. 입에서는 '커피' 향기, 품에서는 '카네이션'의 향기, 은심은 더욱 '서양'이 문명'이 즐거워진다. 그 길로 '마루젠'[환선서점] 이층으로 왔다. 서양 잡지들이 꽃집처럼 색채 현란하게 꽂혀 있다.

은심은 이책 저책 뽑아보기 시작했다. 4·6배판보다도 더 큰 호화스러운 표지들, 매끄러우면서도 부드러운 고급 '아트'지의 감촉, 채색 잉크들은 새로 끓인 쵸콜렛처럼, 잘 익은 토마토처럼 무르녹았다.
그 중에서 은심은 '레이디스 홈 저널'[Ladies' Home Journal]이란 부녀잡지를 한 책 사 들었다. 나오기 전에 문뜩 여기서 원치원을 만났던 생각이 난다. 입술이 이상하게 붉던 것을 쳐다보던 것, 원치원이 무에라고 말을 붙이었으나 대꾸도 인사도 하지 않던 것, 모두 다 어제처럼 소상하다. 

은심은 그런 생각이 불쾌할 뿐이어서 다른 책장으로 가지 않고 나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집으로는 가기가 싫던 차에 '가네보' 앞에서 반동무 서넛과 부딪쳤다. 그들은 아직 아무것도 사들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아무것도 사들지 않았다.
다투어 은심이가 사든 것을 뺏어 들었다.
"아아주 감각파구나! 꽃만 들구!"

▲종방 스테이션 (가네보)

"어쩐 말이냐. 레디스 홈 저널만 읽으시는데!"
"기지배들두!"
"한턱 내라 얘."
"곷든 사람이 한턱 내겠지 뭐!"
이들은 한떼가 되어 '명치제과'로 왔다. 아직 오전중이어서 '복스'는 여기저기 비어 있었다. 제일 구석 '복스'를 차지하고
"난 커피."
"난 쵸콜렛."
"난 레몬티."
"난…… 뭐 젤 맛나냐?"
"난 뭐든지 기숙사서 못 먹어보던 것 좀 실컷 먹었음!"
하고, 무엇보다도 웃음에들 주리었던 것처럼 히살댄다. 

▲ 본정2정목

"우리가 이게 마지막 방학이구나!"
"그렇지 참!"
"속상해!"
"인제 한학기문 우리두 뿔뿔이 헤지는구나!"
"너까짓것하구 헤지는건 눈두 깜짝 안허겠다 얘."
'망할거!"
"이중에서 누가 젤 멀리 갈까?"
"거야 순열이지 뭐."
"순열이 참 미국 구경하구 좋겠다!"/ 
"그래두 신학神學만 해야 된대니 어떡허니!"
"구경 삼아 가지 뭐 공부하러 가니 뭐!"
"기지배두……."

"미국보다 더 먼데 갈 사람은 없나?"
"있지."
"누구야?"
"경순이지 누구야."
"경순이가 어딜 가게?"
"시집."
"하하하……."
이들은 다시 명치좌로 몰리었다. (이태준, 『청춘무성』, 서음출판사, 1988[1940]) 

 

▲ 은심이와 친구들의 진고개 동선(추정)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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