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선생은 생후 처음으로 술값을 지불하여 본다. 더욱이 맥주 두 병과 오징어 한 접시에 자기의 사오일 동안의 생활비가 달아난다는 것은 이것도 처음 당해보는 현실감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득주의 말대로 현실에서의 원치원의 생활체生活體란 너무 빈약한 것이로구나'
원선생은 명치좌 앞 큰길로 나섰다. 도회지의 하늘이나 목장에서처럼 푸르다. 어디선가 프로펠라 소리가 우렁차게, 경쾌스럽게 울려온다. 명치좌 앞에 줄을 지어 섰는 사람들이 일시에 하늘을 본다. 원선생도 쳐다본다. 기체는 보이지 않는데 어느새 프로펠라 소리는 먼데로 사라진다.
'날으는 강철 !'
원선생은 마음속에 중얼거린다.
'청춘은 인생의 강철! 날으자 날으자 녹슬기 전에……'
허턱 본정으로 올라온다.
[...]
이들은 다시 명치좌로 몰리었다.
사진은 '디아나 더어빈'[Deanna Durbin, 패트리샤 카드웰 역]의 주연으로 세계적 명지휘가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가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소녀'[One Hundred Men and a Girl, 1937]이다.
사진은 비치기 시작하자 장면과 장면이 빠른 '템포'로 바뀌어 나간다. 주연 소녀의 성격이 몇장면 보지 않아서 이내 그 눈치 빠르고 날쌔고 꾀 많고 명령하고 귀염성스럽게 구성되어 버린다.
"걔가 뚝 생긴 섯두 은실이 같구나!"
옆에 앉은 경순이란 동무의 감상이었다.
"내게 저런 명랑이 있음 좋게!"
"뭘 또 네가 그리 심각허세서……."
사진은 발전해 나갈수록 재미가 난다.
그중에도 은심은 '스토코프스키'가 나오는 장면이 좋았다. 영화이면서 배우 아닌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진실한 맛이 좋았고 '스토코프스키'의 머리 흰 풍모와 노력이라기 보다 신성한 맛을 내는 예술인다운 일동일정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무조건하고 경건스럽게 눌러 놓는 것이다.
이날 은심은 여간 즐겁지 않았다. '오케스트라의 소녀'에서 받은 자극은 영화 그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국이란 한 나라의 일면을 다시 인식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미국이라면 역사가 없는 나라 여기저기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들은 글자 그대로의 합중국, 일조일석에 금광이나 해서 돈벼락을 맞은 집처럼 외관으로 번지르르할 뿐 문벌이라거나 전통이라거나 정신적인 것에는 아무 보잘것이 없는 것으로만 여겨 왔었다. 그러나 그렇게만 여긴 미국의 한 영화 '스크린' 위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스토이코프스키'가 나타나는 것을 목격할 때 은심은 '미국의 힘'을 새로 한 가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태준, 『청춘무성』, 1940.)
대경성大京城 60만 부민府民을 부르는 영화예술전당 '명치좌'
대경성도시계획을 앞둔 서울은 모든 현대문명의 호화豪華와 정취精粹를 한데 모아 '문화경성'의 면모를 널리 세상에 빛내이랴고 함이 작금昨今의 대경성의 외관外觀이다.
실로 서울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내일은 어떻게 변해 갈지 알 수 없는 미지수의 일이다. 문화주택[文化家宅]이 자꾸 늘고 온갖 오락장이 여기저기에 생겨진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는 은행.회사 등의 4,5층 건물이 하루에도 몃 개씩 설계되고 건축된다.
이러한 서울이라 그리 놀라울 것은 없으나 우리들의 시선을 모으게 할 또한 커다란 '뉴스' 하나가 생겨나고 있음이 사실이다.
바로 장소는 대경성에서도 심장이라고 할 만한 명치정明治町의 십자로十字路 점點. 시간 여유가 있는 분은 한번 그리로 가보면 알리니, 그 곳에는 미키 합명회사[三木合名會社]의 청부請負로 진행중에 있는 커다란 공사장工事場 하나가 언뜻 눈에 띄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차 머지 않아 우리들 눈 앞에 황홀 찬란하게 나타나게 될 영화예술映畵藝術의 전당殿堂이다.
그러면 이 영화예술의 전당을 건설하는 주인공은 과연 그 누구인가? 원적原籍을 나가사키현에 두고 일찍이 도선입경渡鮮入京하여 실업계 등 다방면으로 크게 활동하고 있는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 씨란 개인의 손에서 장차 생겨날 것이다.
이시바시 씨의 말을 들으면 건평수 856 평이나 되는 광대한 땅에다 67,000 원이라는 실로 놀라울만한 거대한 공사비를 던져 지하 2층, 지상 4층, 합 6층의 철근콘크리트의 최신형 영화극장으로서 작년[1935] 11월 경에 착공하였는데 늦어도 올해 7월 내지 9월까지에는 준공되게 모든 것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듯이 굉장하고 대경성이 아직도 가져 보지 못한 화려극치華麗極致한 영화예술의 전당에서는 어떠한 영화예술을 개봉할 것인가? 또 씨는 말한다. 소위 만선쇼치쿠영화[滿鮮松竹映畵]의 개봉장으로 하기로 이미 작정되었으며 재경 일본 내지인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고 한걸음 나아가서 대경성 60만 부민 전부를 상대로 할 것이라 하니 그 사업계획이 얼마나 여하如何히 큰가 함을 가히 알만하다.
그러나 요금은 대중적으로 누구나 이 예술전당을 찾어 오도록 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올 가을 이 사업진행이 완성되는 날에는 제1회 공개축하기념흥행으로 멀리 동경, 오사카 등지에서 최승희 여사를 초대하고 '가부키歌舞伎'를 불러오고 다카라즈카寶塚[여성가극] 레뷰와 쇼치쿠 松竹레뷰단團까지 동원시켜 대경성 60만 부민의 안목을 황홀케 할 작정이라고 한다.
뒤따라 그 뒤에도 연 4, 5 회는 동경, 오사카에서 이러한 '가부끼' 레뷰단을 초청해다 만도남녀滿都男女에게 절호絶好한 서비스로 제공하리라 한다.
그러면 이 극장의 이름은 어떠케 지어질 것인가? 일반의 투표에 의하여 가장 훌륭한 명칭을 부치기로 되었는데 얼마 전 '명치좌'로 결정지었다.
금년 43세의 장년 실업가로서 카페 '마루비루丸ビル'를 경영하는 씨의 금후의 수완 활동도 手腕活動도 볼만하려니와 이 문자 그대로의 경성 초유의 대영화예술전당의 앞날이 가히 볼만하다 할 것이다. (『삼천리』, 19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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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명치좌'의 약사略史]
- 1945. 8.15. 해방 직후 미군정청 명치좌 건물 접수.
- 1946.1. '국제극장'으로 개칭하여 운영
- 1947.12. 서울시 시영市營의 '시공관市公館'으로 개관.
* 1950.2. 일제시대 경성부민관을 중앙국립극장으로 개관.
* 한국동란 직후 대구로 국립극장이 옮겨감. 서울의 중앙극립극장은 민의회 건물로 사용됨으로써 서울에는 일시적으로 국립극장이 존재하지 않게 됨.
- 1956.5. 서울시 시공관을 시립극장으로 개칭
- 1957.6. 시립극장(시공관) 건물을 서울로 뒤늦게 '환도'한 국립극장으로 공동 사용.
- 1961.6. 서울시민회관 개관으로 시립극장이 옮겨가며 국립극장 전용이 됨.
- 1973.10. 남산 국립극장 개관.
- 1975. 명동 구舊 국립극장 대한투자금융에 매각.
- 2009.6.5. 국가에서 재매입 복원.증축하여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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