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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비슷한 두 처녀, 한 벤치 위에 되도록 서로 마주 앉았다. 서로 얼굴을 뜯어본다. 서로 눈웃음이 넘치면 소리로 웃는다. 웃다가 시계를 본다. 시계를 보고는 큰길쪽을 내본다. 내다보다가는 다시 서로 얼굴을 본다. 웃는다. 그러나 말은 못한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다 모이기 전에는 한마디도 먼저 이야기를 해선 큰일나기로 짠 것이었다.

꼭 다섯달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삼월 구일 졸업식날 헤어지고는 팔월 구일, 이날 파고다공원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

오전 열한시 정각에 팔각정 앞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정각에 마주친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미처 못올 때에는 서로 인사도 하지 못하기였다. 쌓고 쌓였던 이야기를 첫 한마디부터를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서야 봉절하기로였다.

[...]

둘이는 거의 반시간 동안이나 벙어리 노릇을 하다가야 다른 한 동무를 발견하였다. 그는 이들이 내다보던 앞문으로가 아니라 탑 있는 쪽에서 나타났다. 둘이는 일시에 뛰어가 한손씩 잡았다.

[...]

셋이는 소리내 웃으며 큰길로 나왔다. 이내 어느 사진관으로 들어왔다. 셋이는 짙은 브라운으로 은은한 숲을 그린 배경 앞에 장의자를 놓고 가지런히 앉았다. 아직 좁은 채의 날신히 솟은 가슴들, 여섯폭 모시치마의 넓은 둘레들, 그 아래 뾰족한 구두코를 모아 뻗은 다리들, '드가'의 춤추는 소녀들'다운 청초한 선율이 흘렀다.

[...]

이들은 사진관을 나와 남대문통을 걸었다.

"어디, 음식 맛있구 조용헌 데루 가야지?"

"여기 너 어딘 줄 아니?"

하고 화옥이가 묻는다.

▲ 남대문통2정목

"남대문통이지 어디야."

소춘의 무심한 대답이었다.

"흥 잘못 알았어! 그렇게 알구 너 어떻게 소설 쓸려구 그러니?"

"그럼 여기가 어디람?"

"여기가 다 사회란 데다."

해서 셋이 또 웃었다.

"참 오래간만에 웃는다!"

"사회 남대문통을 이렇게 우리가 웃으며 활보하니 또 통쾌하지 않니?"

"저널리스트의 말씀이 역시 다르시군!"

"저널리스트란 건 좀 불명예지만 단연 이젠 내가 인생으로 선배지!"

▲ 남대문통 2정목 10번지 치요다빌딩

그들의 인생 선배 순남은 두 동무를 그때 새로 개점한 '치요다 그릴'[치요다빌딩 구내]로 안내하였다. 쿨락(Clerk)에 파라솔을 맡기고 선풍기 앞에서 뽀이를 기다리는데, 우선 주위가 호젓하니 순남이가 화옥을 꼭 찔렀다.

[...]

식당에 들어서니 테이블마다 사람이 찼다. 남의 테이블을 한참이나 지나 그중 구석자리였다. 이들도 자리를 잡고 '네프킨'을 펴는 때였다. 건너편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중이던 한 중년신사가 마시던 맥주컵을 이쪽을 향해 번쩍 드는 것이다. 화옥이가 먼저 보고 소춘을 쿡 찔렀다. 소춘도 모르는 남자였다. 그제야 순남이가 보더니 얼른 그 신사에게 허리를 굽힌다.

[...]

이내 음식이 날려 왔다. 순남은 뽀이에게 음료를 탄산으로 지적했으나, 탄산을 가져와 컵에 따를 때에는 순남은 자기의 컵만은 반에서 정지를 시키고 제법 신선한 목소리,

"삐루 하나만."

하였다. 화옥과 소춘은 물론 놀랐다.

"너 술 뱃니?"

"배는 중."

화옥은

"아이그머니나!"

하였고, 소춘은,

"건 뭣하러?"

하였다.

"너희들 남자보구두 이렇게 놀래구 이런 질문을 허구 허니?"

둘이는 멍하니 탄산에 맥주를 반이나 타서 마시는 순남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너 그럼 담배두 밸련?"

화옥이가 암만 생각하여도 거기까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물었다.

"것두 집에서 연습허는 중이다."

"연습꺼정 하면서 배야헐건 뭐냐?"

"배기 위해 연습은 아니나 연습이란 말은 잘못나간 말이구 좀 친하기 시작한단 말이지."

"건 친해 뭐세 쓰니?"

"너이 나쓰메[夏目漱石]의 산시로三四郞란 소설 읽었니?"

이번엔 소춘이가,

"거기 봄 담배연길 철학의 연기라구 예찬허긴 했지."

"우리 여자생활이라구 철학하는 시간이 없으란 법 있니?"

화옥은 '콜치킨'을 한참이나 오물거려 넘기고,

"여장부란 말은 있지만 너같이 이쁜여자가 여장분 돼 뭘 허련?"

"여장부?"

순남은 하하 웃었다.

"술먹구 담배 피구 허는걸 덮어놓구 와일드헌거루만 보는건 인식부족이다 너?"

"그런건 좀 인식부족이라두 몰상식은 아닐 거 같은데……."

화옥은 역시 동감할 수 없다는 태도였으나 소춘은,

"허긴, 우린, 요즘의 소위 신여성이란 데선 일보 나서야 할 어떤 위기에 이른 것두 같어…… 그래서 난 사실이지 순남이처럼 능동적인 사람헌테 기대가 크다."

"너두 문사한테 다니더니 말주변이 아주 문학적이구! 기대는 무슨 기대?"

"누가 아니, 그런 궤도 위에서 전무후무한 한 훌륭한 새성격의 여성이 완성될런지?"

"술과 담배에서부터?"

"기지배두!"

"참!"

화옥은 포크와 나이프를 고추세워 테이블을 딱 쳤다. (이태준, 『행복에의 흰손들』, 1942 *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37-8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