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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 전차가 희극을 낳아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4. 27. 11:45

 

첫여름밤의 해맑은 바람이란 그 촉각이 극히 육감적이다. 그러므로 가끔 가다가는 우리가 뜻하지 않았던 그런 이상스러운 장난까지 할 적이 있다.
청량리역에서 동대문으로 향하여 들어오는 전차노선 양편으로는 논밭이 늘여놓인 퍼언한 버덩으로 밤이 들면 언뜻 시골을 연상케 할만치 한가로운 지대다. 더우기 오후 열한 점을 넘게 되면 자전거나 거름구루마 혹은 어쩌다 되는대로 취하여 비틀거리는 주정꾼 외에는 인적이 끊어지게 된다.

휑하게 터진 평야는 그대로 암흑에 잠기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허전한 고적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불어오는지 나긋나긋한 바람이 연한 녹엽을 쓸어가며 옷깃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마치 자다가 눈부빈 사람모양으로 꾸물거리며 빈 전차가 오르내린다. 왜냐하면 기차시간 때나 또는 많은 때라면 물론 승객으로 차복이 터질 지경이나 그렇지 않고 이렇게 늦어서는 대개가 공차다. 이 공차가 운전수, 차장 두 사람을 싣고 볼일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전차도 중앙지中央地의 그것과 대면 모형도 구식이려니와 그 동작조차 지배를 여실히 받는다. 허나 전차가 느린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놈을 속에서 조종하는 운전수가 하품을 하기에 볼일을 못 본다. 그뿐 아니라 지칫하면 숫제 눈을 감고는 기계가 기계를 붙잡고 섰는 그런 병괘病卦까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차장은 뒤칸에서 운전수 못지않게 경쟁적으로 졸고 섰는 것이 통례다. 
"표 찍읍쇼?"
"표 안 찍으신 분 표 찍읍쇼."

이렇게 다년간 외어오던 똑같은 소리를 질러가며 돌아다니기에 인둘리어 정신이 얼떨떨했을 게다. 게다가 솔솔바람에 뺨이 스치고 보매는 압축되었던 피로가 그만 오짝 피어올랐을지도 모른다. 차가 뚤뚤 뚤뚤 가다가 우뚝 서면 그는 눈도 뜨지 않고 신호줄만 흔드는 이골난 차장이었다. 하기야 동대문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종차이니까 얼른 차고에 부려놓고 집으로 가면 그만이다. 
영도사[현 안암동 개운사] 어귀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여전히 졸면서 발차신호를 하자니까 
"여보! 살마 안 태요?"
하고 뾰로진 소리를 내지르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는 맑은 정신이 안 날 수 없었는지 다시 차를 세워놓고 돌아보니 깡뚱한 머리에 댕기를 들인 열 칠팔 되어보이는 여학생이 허둥허둥 뛰어오른다. 그리고 금년에 처음 입학한 듯싶은 사각모자에 말쑥한 세루양복을 입은 청년이 뒤따라 올라온다.

그들은 앉을 생각도 안하고 손잡이에 맞붙어 서서는 소곤소곤하다가 한번은 예약이나 한 듯이 서로 뻥긋 웃어보이고는 다시 소근거리기 시작한다.
이걸 보면 남매나 무슨 친척이 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였다. 다만 젊은 남녀가 으슥한 교외로 산책하며 여지껏 재미스러운 이야기를 맘껏 지껄였으나 그래도 더 남았는지 조금 뒤에 헤어질 것이 퍽 애석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차장에게는 그 사정쯤 알 것이 없고 도리어 방해자에게 일종의 반감을 느끼면서 콘트롤 통에 기대어 다시 졸기로 하였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이따 냉면 한그릇 먹고 가서 푹신한 자기의 침구 위에 늘어지리라는 그런 생각이 막연히 떠오를 뿐이었다. 신설리 근방을 지났을 때까지도 차장은 끄덕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표 찍어 주서요오."
"여보시요! 이 표 안 찍어줘요?"
색시가 돈을 내대고 이렇게 요구하였으나 그래도 차장은 눈하나 떠보려지 않으므로 
"아니 여보! 표 안 찍우?"
이번에는 사각모가 무색해진 색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하여 위엄 있는 어조로 불렀으나 그래도 역시 반응이 없다.
"표는 안 찍구 졸고만 있으면 어떡해?"
"어젯밤은 새웠나?"
"고만 두구려, 이따 그냥 내리지."
그들은 약간 해어진 자존심을 느끼면서 이러게들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청량리행 전차승차장 간판

차장은 비록 눈은 감고 졸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귀 거친 소리는 다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생각에는 표 찍을 때 되면 어련히 찍을려구 저렇게 발광들인가, 속으로 썩 괘씸하였다. 몸이 날척지근하여 움직이기도 싫거니와 한편 승객의 애 좀 키우느라고 의식적으로 표를 찍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색시가 골을 내가지고,
"돈 받아요."
거반 악을 쓰다시피 하는데는 비위가 상해서라도 그냥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차장이 어슬렁어슬렁 들어와서 하품을 한번 더 치고는
"어디로 가십니까?"
"종로로 가요. 문안차 아직 끊어지지 않었지요?"
"네, 아직 멀었습니다."
그리고는 2구표[2구간표] 두 장과 돈을 거슬러준 다음 돈가방을 등뒤로 쩍 젖혀메고 차장대로 나오려 할 때였다.
손잡이에 의지하여 섰던 색시가 별안간

"아야!"
비명을 내지르더니 목매 끌리는 송아지모양으로 차장에게 고개가 딸려가는 것이 아닌가. 사각모는 이 의외는 돌발사에 눈이 휘둥그래서 저도 같이 소리를 질러야 좋을 어떨지 그것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덤덤히 서서는 색시와 차장을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다. 왜냐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차장의 돈 가방이 교묘하게도 색시 댕기의 한끝을 물고 잡아챈 까닭이었다.

색시는 금새 안색이 변해가지고 어리둥절하여 돌아섰는 차장에게
"이런 무례한……."
이렇게 독설을 놀리려 하였으나 고만 말문이 콱 막힌다. 이것은 너무도 도를 넘는 실례이라 호령도 제대로 나오지를 못하고 결국 주저주저 하다가
"남의 머리를 채는 법이 어디 있어요?"
"잘못 됐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길에 그렇게 됐습니다."
"몰르긴요!"
하고 색시는 무안한 생각, 분한 생각에 눈에 눈물까지 핑그르르 돌며
"몰랐으면 어떻게 댕기가 가방 틈으로 들어가요?"
"몰랐길래 그렇게 됐지요. 알았다면 당신께서라도 그때 뽑아냈을 게 아닙니까? 그리고 또 잡아채면 손으로 잡아채지 왜 가방이 물어차게 합니까?"
차장은 늠름히 서서 여일같이 변명하였다. 딴은 돈가방이 물어대렸지 결코 손으로 잡아대린건 아니니까 조금도 꿀릴 데가 없다. 

▲ 동대문 전차승차장

이렇게 차장과 승객이 옥신각신하는 서슬에 승객도 딱 서서는 움직이길 주저하였다. 운전수도 졸립던 차에 심심파적으로 돌아서서는 재미로운 이 광경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때 처지가 몹시 곤란한 것은 사각모였다.
연인이 모독을 당하였을 때에는 목이라도 베어 내놓고 대들려는 것이 젊은 청년의 열정이겠다. 마는 이 청년은 그럴 혈기도 보이지 않거니와 차장과 시비를 하다가 파출소에까지 가게 된다면 학생의 신분이 깎일 것을 도리어 우려하는 모양이었다. 색시가 꺾인 자존심을 수습하기 위한 단 하나의 선후책으로 전차가 동대문까지 도착하기 전에 본권과 승환권을 한꺼번에 차장에게로 내팽개치
"나 내릴테야요. 차 세워주서요."
그리고 쾌쾌히 내려올 제 사각모도 묵묵히 따라내려와서는
"에이참! 별일두 다 많어이!"
하고 겨우 땅에 침을 배앝았다.

이것이 어떤 운전수가 나에게 들려준 한 실담이었다. 그는 날더러 그러니 아예 차장 업신여기지 말라 하고
"아 망할놈, 아주 심술궂은 놈이 아니야요?"
하고 껄걸 웃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컨대 그 행동이 단순히 심술궂은 데서만 나온 것이 아닐 듯싶다. 물론 저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시달리는 몸으로, 교외로 산보를 할 수 있는 젊은 남녀를 볼 때 시기가 전혀 없을 것도 아니요 또는 표 찍고 종 치고 졸고 이렇게 단조로운 노동에 있어서 

때때로 유머나마 없다면 울적한 그 감정을 조절할 기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이성에 대한 동경과 애정의 발로일는지 모른다. 누군 말하되 사랑이 따르지 않느 곳에는 결코 참된 미움이 성립되지 못한다 하였다. 그럼 이것이 그 철리[哲理]를 증명하는 한 개의 호례이리라.
여기에는 차장이 색시에게 욕을 보이기 위하여 그런 흉계를 꾸몄다 하는 것은 조금도 해당치 않은 추측이다. 말하자면 첫여름밤 전차가 바람을 맞았다 하는 것이 좀더 적절한 표현일는지 모른다.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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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9 - [근대문학과 경성] - 나도향 -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