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때가 되었다. 이학기 시험이 끝나는 날이다. 이날 저녁에 학교에서는각 과科마다 '크리스마스' 축하회가 있어서 밤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함박눈이 펄펄 날리었다. 은심은 대문 앞까지 와서는 새삼스럽게 집에 들어가기가 싫여진다. 어디고 눈을 맞으며 끝없이 걷고 싶어진다. 은심은 손목에서 열한 시가 가까운 것을 들여다 보고도 그만 책가방을 든 채 발길을 돌려 놓는다.
은심은 종로로 내려와 남대문통을 걷는다. 벌써 상점들은 문을 닫은 데가 많다. 불빛 흐린 포도鋪道에는 도리어 눈송이 날리는 것이 아름답다. 장갑을 벗어도 손은 시리지 않다. 손등에, 얼굴에 목덜미에 눈송이의 체온은 착근거린다. 발에는 벌써 뽀드득 소리가 날만치 눈은 두껍게 덮이었다.
'끝없이 걸었으면!'
은심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학교에서 노래하고 온 찬송가 구절을 다시 부르며 어느덧 조선은행 앞까지 이르렀다.
눈은 그저 한결같이 내린다. 은심은 머리와 어깨에 눈을 털고 장곡천정으로 들어섰다. 이내 조선호텔이 나온다. 불빛이 창마다 휘황하다. 자동차 한 대가 뚜우뚜 경적을 울리며 남대문쪽에서 들어와 눈 덮인 호텔의 넓은 마당으로 들어간다.
'한평생 여행하다 죽었음!'
지난봄 학교에서 원선생한테 한 말이다. 은심은 멀거니 서서 호텔 안을 들여다보다가 미국 가 있는 사촌오빠 생각이 났다. 그리고 가까이 동경 가 있는 중학 동창들도 생각이 났다.
'동경이나 갈까보다!'
'구다니찌' 고등음악학원에 다니는 최양순이, '오자노미즈' 고등사범에 다니는 김정선이, 그 중에도 김정선이는 작년까지도 편지 내왕이 있었고 방학에 나와 고향으로 가던 길에 서울에 내리기만 하면 의례 은심을 찾아주었다. 같이 하루밤 실컷 이야기나 하고 싶은 때가 많았으나 늘 동행으로 그의 오빠가 있어 그날로 데리고 가버리군 하였다.
'나두 진작 동경이나 갔더면!"
원치원을 알게 된 것이 지금 다니는 학교에 들었기 때문인 것을 후회하면서 부청 앞을 건너 조선일보사앞으로 왔다. 조선일보사 정면에 달린 시계는 벌써 열한점 반이나 되었다. 그제야 은심은 소긋하고 종종걸음을 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편지가 한 장 와 있었다. 색다른 양봉투, 영어에 서양 우표다. 사촌오빠에게서 해마다 오는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이태준, 청춘무성, 1988[1940], 서음출판사, 166-8)
[...]
그때다. 옆방에서 웬 찬송가 소리가 난다.
"누가 죽었나?"
득주는 얼른, 아직 눈물 흔적 있는 뺨을 닦으며
"성탄 찬민데요!"
하고 일어선다./
"오! 오…… 만백성 맞으라…… 아 천지간 만물들아…… 오! 벌써 크리스마스!"
"오늘이 이십사일이군요 참!"
치원은 천정을 향해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는다.
문이 똑똑 울린다. 득주가 대답한다. 간호부가 들어서더니,
"학생들이 성탄축하루 위문들 왔세요. 그런데 여선생 한 분이 따라왔는데 아주 미인이겠죠."
하며 방안을 치인다.
"어느 학교 학생들이요?"
웬일인지 가슴부터 선뜩해지는 득주가 묻는데 간호부가 대답할 새도 없이 방문에 노크소리가 난다. 간호부가 문을 연다. 능금처럼 건강이 이글이글한 학생들이 들어선다. 득주도 치원도 깜짝 놀란다. 바로 득주가 다니던 학교 교복들이다. 그러나 득주와 치원은 인전 모르는 학생들뿐이다. 득주와 치원은 또 한번 놀랐다. 학생들 뒤에 따라 들어서며 문을 닫는 여선생, 어제 보고 오늘 보는 듯,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는 바로 고은심인 것이다.
"아!"
치원, 득주, 다 '아!' 소리만 내였다. 은심도 이쪽을 얼른 알아본다. 그러나 눈이 놀랄뿐 학생들을 헤치고 나서지는 않는 침착이다. 학생들은 이내
"참 기쁘다 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부르기 시작한다. (같은책, 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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