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골이 좀 아파서 누어야겠어……"
꽃분이는 아픈 표정을 한다는 것이 신 살구 먹는양을 하면서 어머니의 눈치를 훔쳐 보았다.
"눕든지 자빠지든지 뒈지든지 하렴 경칠 년……"
어머니가 부엌으로 나가자 꽃분이는 미지근한 아랫목에 아랫배를 깔아붙이며 땀내 나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얇은 벽을 통하여 부엌에서 풀 끓는 소리가 풀럭풀럭 울려 오는 것이 자동차의 '모터' 소리 같아서 자동차면 이렇게 흔들리겠지 하고 궁둥이를 겁실겁실 놀려도 보았다.
꽃분이는 정말 골이 아파서는 아니었다. 한참이라도 낮에 미리 자놓아야 밤에 정신이 나고 더욱 눈을 샛별처럼 빛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대로 잠은 날래 오지 않었다.
'어서 어두웠으면! 얼른 보았어도 꽤 잘 생긴 사내야! 안집 아들녀석 따위는 피―. 그런데 요전 그녀석처럼 영어나 자꾸 지껄이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끌탕을 하면서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백을 끌어드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꼬깃꼬깃한 종이쪽 하나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연필로 흘러 쓴 글을 다시금 읽어 보았다.
―저는 당신을 아는지가 오랩니다. 여기다 길게 말씀드릴 수 없어 우선 저녁이나 한 때 조용한 데 모시고 가 먹을 기회를 청하오니 실례지만 내일 오후 다섯시까지 제 주인집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주인집은 KK동 일번지입니다―
꽃분이가 어제 저녁에 D극장에서 어떤 남자와 눈이 맞었다가 파해 나오는 판에 그에게서 받은 종이쪽이었다.
꽃분이는 안집 시계가 네 시를 치는 것을 듣고는 일어나 바들바들 떨면서 찬물에 세수를 하였다.
윤곽은 고왔으나 빈혈을 상징하는 그의 누른 얼굴 빛은 늘 그의 자존심을 상해 놓았기 때문에 꽃분이는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독에서 찬물을 떠다 하였다. 그리고 세수라기보다 마찰식으로 비비고 닦는 것이었다.
단발한 머리였으나 그가 경대에서 일어서기는 한 시간 뒤였다. 그리고 바깥 날이 추워서라기보다 체면상 털양말이 생각나 어머니의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그 속에는 풀 팔아 넣은 동전 몇 푼뿐이라 전차비로 다섯 잎 밖에는 집어내지 못하였고, 종아리가 시릴 것 같았으나 모양을 보자니 인조견 양말을 안 신을 수가 없었다.
풀바가지를 걸어 놓은 대문간을 나설 때마다 케이프를 두른 꽃분이는 몹시 불쾌하였다.제 집을 나서면서도 남의 집에를 몰래나 들어왔던 것처럼 밖에 인기부터 살피고 살짝 뛰어나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 어머니를 위해서 마음 아픈 우울이 큰길에 나올 때까지 그를 따르는 것이었다.
"아들도 없으신 우리 홀어머니! 어떻게 해서나 내 힘으로 저 풀장사 노릇을 고만 두시게 해드렸으면!"
하는.
꽃분이는 KK동이 서대문 밖 독립문 근처인 줄은 알기 때문에 개명[감영] 앞까지는 전차로 나왔다. 그리고 서대문우편국 안의 시계를 엿보았다.
'다섯 시 이십 분!'
하고 그는 벌써 이십 분 동안이나 자기를 기다리고 앉았을 그 사나이의 마음이 눈에 보이는 듯 반갑고 만족스러웠다. 더구나 자기를 여왕으로 하고 열리어질 조고만 밤의 나라, 밤의 낙원을 상상해 볼 때, 그는 종아리가 시린 것도, 귀가 차가운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속으로 '어디쯤이나 될가?'하고 독립문을 바라보는 때였다. 벌써 해는 떨어지고 불이 들어와 어스름한 거리 위에는 파출소의 붉은 전등이 유난히 두드러졌다.
'옳지!'
하고 파출소로 가서 드르르하고 유리창을 밀었다.
"KK동 일번지가 어디쯤 될까요?"
"뭐요? KK동 일번지라뇨? 뉘 집을 찾는 셈이오?"
하고 순사는 지도도 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반문하는데, 꽃분이는 말문이 막히여 어물어물 하고 섰으려니까
"KK동 일번지는 저어기 저 감옥소요 서대문형무소 말요 그런데 뉘 집을 찾는 셈이요?"
"감옥이야요? KK동 일번지가……"
꽃분이는 그 핏기 없는 얼굴이 그만 냉수마찰 이상으로 붉어져서 파출소를 나왔다. 그리고 그제야 자기가 헛물켠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바람을 등지고 들어오니 몸은 그리 춥지 않어도 종아리와 귀는 얼음이 닿는 것처럼 차갑다 못해 쓰라리었다. 그리고 집으로 바로 돌아왔으면 어머니가 잡숫는 찬밥 끓인 것이라도 한술 먹었을 것을 공연히 마음은 그대로 달아 C백화점으로 갔다. 그리고 몸이 훈훈히 녹도록 한 시간 동안이나 백화점의 층층을 오르내리었다. 그러나 추운 몸은 녹이었으나 고푼 배는 돈 없이 채울 재주가 없었다.
늦게서야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내일 팔 풀을 쑤어놓고 부뚜막에 앉아 그것을 뜨고 있었다.
김이 무럭무럭 떠오르는 풀가마! 그리고 구수한 풀누룽갱이[누룽지] 냄새! 꽃분이는 양식집에서 먹어 본 그레이비 생각이 나서 발을 그냥 지내치지 못하였다.
"어머니 내가 좀 뜰릴까?"
"그래라 것두 허리가 아프고나……"
꽃분이는 숟가락을 들고 와 우선 풀을 한 옆으로 밀어 놓고 누릉갱이를 긁어다 입에 넣어 보았다. 아무 맛도 없었다. 오직 찬 입 속에 따스한 맛뿐. 그리고 코에는 구수한 냄새뿐. 그러나 그의 입술은 따스함과 구수함만으로라도 꼭 다물고 숟가락을 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숟가락이 다시 풀가마로 내려갈 때는 부엌이 어두우나 꽃분의 눈에는 눈물이 반짝하였다.
그러나 풀누릉갱이 숟갈이 두 번째 입으로 올라갈 때는 속으로,
'설탕이나 있었으면!'
하면서 눈물을 씻었다. (조선일보, 1929. 3. 19.)
'근대문학과 경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진오 - 가을 (1)] 기호의 산보 (0) | 2019.05.07 |
---|---|
유진오 - 창랑정기滄浪亭記 (0) | 2019.05.02 |
[염상섭 - 삼대 (11)] 효자동 전차종점 (0) | 2019.05.02 |
[이태준 - 청춘무성 (3)] 은심의 진고개 나들이 (0) | 2019.05.01 |
[이태준 - 청춘무성 (2)] 크리스마스 (0) | 2019.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