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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개 - 불야성의 거리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1. 16:55


형식은 다시 일어나 방 안으로 왔다갔다 거닐다가 뒤숭숭한 생각을 없이하노라고 학도들이 부르는 창가를 읊조리며 마당에 나왔다. 아까 소낙비 지나간 자취도 없이, 하늘은 새말갛게 맑고 물 먹은 별이 졸리는 듯이 반작반작한다. 남쪽이 훤한 것은 진고개의 전등빛이라 하였다. (이광수, 『무정』,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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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정 어귀의 휘황한 전등빛, 이 빛이 내 눈을 쏘자 나는 저도 모르게 허둥지둥 일어나서 지금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서 내렸다. 술과 계집과 재즈와 웃음이 있는 곳, 카페가 갑자기 그리워진 까닭이다. (박태원, '적멸',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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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에 [총독부]도서관에서 나와서 어디 가 차나 먹을까 하고 진고개로 향하였다. 병화 생각도 나기는 하였지만 병화를 끌면 또 술을 먹게 되고 게다가 사람을 꼬집는 그 찡얼대는 소리가 머릿살도 아파서 혼자 조용히 돌아다니는 편이 좋았다. 우선 책사[冊舍]에 들어가서 책을 뒤지다가 잡지 두어 권을 사들고 나와서 복작대는 거리를 예서 제서 흘러나오는 축음기 소리를 들어가며 올라갔다.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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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제과 아래층 그중 구석진 박스에서, 여자가 외운 한편의 시詩 - 그것이, 이를테면, 하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용'의 '가모가와鴨川'를 읊은 여자의 고운 목소리. 바로 옆 박스에 앉아, 허웅은 저를 배반한 계집 생각을 그치고 귀를 기울였었다. 그날 밤 하웅은 분명히 감상적이었다. 잉크가 번져서 펜이 잘 나가지 않는 냅킨 위에다 자기를 배반한 계집의 얼굴을 그는 그리고 있었다. (박태원, '애욕',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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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사는 악마의 마음을 먹은 심잡고 과자상자를 들고 서대문행 전차를 탔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그는 광화문 정류장에서 전차를 내려 효자동 가는 전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종로로 갔다. 본정통의 번잡한 데 비해 이곳은 몹시 잠잠했다. 일류미네이션만 헛되이 빛나고 세모 대매출의 붉은 깃발이 쓸쓸한 섣달 대목거리의 먼지에 퍼덕이고 있었다.
[...]

그는 늦잠을 자는 버릇이 생겼다. 점심 때나 되어 일어나서는 밥을 한술 떠넣고 바람부는 거리를 거니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새해라 해도 종로거리에는 장식 하나 없고 살을 에이는 매운 바람이 먼지를 불어올릴 뿐이었다. (유진오, '김강사와 T교수',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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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고개 입구(1937년경)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덜씬 큰 윤선 옆에 거룻배 하나가 붙어서 가는 격이라고나 할는지, 아무튼 이 애인네 한 쌍은 이윽고 진고개 어귀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마다 모두들 윤직원 영감을 한 번씩 짯짯이 보면서 지나갑니다. 더구나 때묻은 무명 고의 적삼에 지게를 짊어지고 붉은 다리를 추어 올린 요보가 아니면, 뒷짐지고 흰 두루마기에, 어둔 얼굴에, 힘없이 벌린 입에, 어릿거리는 눈으로 가게를 끼웃끼웃, 가만히 들어와서는 물건마다 한참씩 뒤적뒤적하다가 슬며시 나가 버리는 센징들만이 조선 사람인 줄 알기를 십상으로 하던 본정통 주민들은, 시방 이 윤직원 영감의 진고개 좁은 골목이 뿌드읏하게시리 우람스런 몸집이며 위의 있고 점잖은 얼굴이며 신선 같은 차림새 하며가 풍기는 얌반상의 위풍에 그만 압기라도 되는 듯, 제각기 눈을 흡뜨고서 하― 입을 벌립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1938)

▲ 진고개/본정/혼마치 1정목~5정목

 


진고개, 서울맛·서울정조

진고개泥峴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아는 곳이다. 남산木覓山을 등에 지고 앞으로는 북악北岳을 안고 앉아 있는 실로 요충지이다. 한참 당년에는 초헌軺軒[정2품 이상 벼슬아치들의 수레]이 왔다 갔다하고 옥교玉轎나 보교가 들락날락하며 사령 군령들의 긴 대답소리와 양반들의 호령 소리가 뒤섞여서 나오던 곳이다. 남북촌에 갈려 있는 양반들이 그 세력을 다투려고 하는 듯이 서로 건너다 보고 경쟁을 하던 양반들의 천지였다. 그러던 곳이 집안 살림이 어느덧 날로 이롭지 못하게 되며 점점 기울어져 감에 따라 이곳 주인主人도 점점 바뀌고야 말게 되었으니 구한국舊韓國시대에 쇄국정책은 도저히 지탱하기 어렵게 되며 각 처에서 등쌀을 대게 되더니 드디어 병자년丙子年 조일수호통상조약朝日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뒤로 서대문밖西大門外에 있던 일본영사관日本領事館이 지금 왜성대倭城臺[예장동]로 옮기게 되며 이것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일본인 거류지日本人居留地로 허許하게 되었다. 그것이 고종高宗 이십일년 (1884)부터이다. (그래서 그네들은 1913년에 시개기념市開紀念이라고 30년이 된 축하식을 거행하였다) 그렇게 되니 차차 검은 옷 입고 쑥대가리들이 자꾸 이 남촌 일대를 침범하면서부터 슬슬 몰려 나가는 것이 양반이었다. 그 때는 도성안都城內에다가 거류지를 허한 것이었지만 그렇게 중대하게 보지 않아서 아무도 이것을 반대한 사람이 없었다. 내 집안 더군다나 안방격이 되는 도성 안에다가 남의 식구를 두고야 어찌 그 살림살이에 대한 비밀秘密을 지킬 것인지? 하여간 이같이 하여 현재의 진고개는 완전히 그네들의 천지가 되엿던 것이다. 양반들은 슬슬 몰려 나가고 그 대신으로 딸각발이 양반이 독차지를 하게 된 뒤로부터는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진고개라는 이름은 본정本町으로 변하고 소슬대문 줄행랑이 변하야 이층집 삼층집으로 변작이 되며 이에 따라 '
청사초롱' 재명등은 천백촉의 전등電燈으로 바뀌고 보니 그야말로 불야성不夜城의 별천지別天地로** 변하야 버렸다. 지금 그 곳을 들어서면 조선을 떠나 일본에 여행이나 온 느낌이 있다.
진고개! 진고개!!

판국이 기울어지자 이름까지 바뀐 진고개!는 지금은 조선의 상권商權을 독차지한 곳이다. 육층으로 하늘을 찌를 뜻이 소사 잇는 삼중정(三中井)의 대상점, 조선 사람의 손님을 끌어 들이기로 제일인 대백화점인 평전상점(平田商店, 히라다), 대자본大資本을 가지고 조선 전도 상계를 풍비하랴는 삼월왕국(三越王國, 미쓰코시)의 작은 집인 삼월오복점(미쓰코시 경성지점 전신)을 비롯하여 좌우로 총총히 들어선 일본인의 상점, 들어서 보면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하며 풍성풍성한 품이 실로 조선 사람들이 몇 백년을 두고 만들어 놓았다는 복촌 일대에 비하여 얼마나 장한지 견주어 말할 바 못된다.
더군다나 조선은행朝鮮銀行 앞에서부터 경성우편국京城郵便局을 옆에 끼고 이 진고개를 들여다 보고 갈 때에는 좌우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은 어느 곳을 물론하고 활기가 있고 풍성풍성하며 진열창陳列窓에는 모두 값진 물건과 찬란한 물품이 사람의 눈을 현혹하며 발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없다. 더구나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철의 밤이나 사람을 녹일 듯한 여름밤에 이곳을 들어서면 백화百花가 난만한 듯한 장식이며 서늘한 맛이 떠도는 갖은 장치가 천만촉의 휘황 전등불과 아울러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는 것을 볼 때에는 실로 별천지別天地에 들어선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가고 두번 가는 동안에 어느덧 이 진고개의 찬연한 광경에 홀리게 되는 것이다. 종로 네거리 우리 동포들의 상점 지대로부터 북촌 일대의 횅댕그렁하니 비인 듯하며 어두침침한 그것에 비하여 모든 사람의 눈을 현혹케하는 그 광경에 우리는 우리 정신까지도 전부 거기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그네들의 상점에 들어서면 사람의 간장까지 녹여 없앨 듯한 친절하고 정다운 일본인 상점원들의 태도에 다시 마음과 정신이 끌리고 말어 한번 이같은 유혹의 쾌미를 맛본 후에는 한푼어치도 그리고 두푼어치도 그리로.... 이같이 하여 우리 수중의 있는 많지 않은 '돈'은 그네들의 손으로 옮기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곳에 조선 동포의 발이 잦아지고 수효가 느는 정비례正比例로 종로 거리 우리네 상점의 파산이 늘고 우리 살림은 작고 줄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진고개 독특한 유혹에 가는 것이 모두 조선 사람이오 돈을 쓰는 것이 거의 다 조선 사람인 것을 볼 때에 얼마나 이 진고개의 유혹이 조선 사람의 피를 빨어 가며 조선의 고혈을 착취하는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캉캄하고 적적하고 무취미하든 '시골'에서 온 우리 동포들이 한번 이곳을 구경하고 이 땅을 밟을 때에 얼마나 놀라며 얼마나 찬란할 것인가. 이 놀람과 찬란이 드디어 부러움과 동경의 표뎍으로 변하야 그네들의 머리 속에다 깊고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서울 구경을 하였다는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진고개의 자태와 용모를 입에 침이 없이 칭찬하고 일컫게 되며 또 그 다음 사람이 이것을 보고자 하여 서울 구경의 '삼분의 이' 이상은 이 진고개를 보고자 하는 심리(心理)로 꽉차고 마는 것이다. 얼마나 이 진고개의 유혹이 강렬할 것인가?
그뿐인가. 여기를 구경하고 이 곳에 홀린 사람은 갑이나 을을 막론하고 평생 소원이 "진고개 가서 그 좋은 물건이나 맛 좋은 것을 사 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소리를 하게 되어 마침내 그네들은 이 최고의 이상理想을 실현코저 기어이 서울을 다시 와서 바로 진고개로 간다. 그래서 무슨 물건이든지 사고야 말게 된다. 우리네 상점에도 있지만은 진고개서 사가지고 가야 짜장 서울 구경을 한 보람이 있고 자랑거리가 된다 하여 시골 사람 독특의 우월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서면 그만 넋을 잃고 말게 되며 거기서 한 가지라도 사야 마음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아! 그러나 그네들이 이로 인하여 조선의 살림이 죽어가는 사람의 피 말으듯 조선의 피가 말려드는 것을 꿈엔들 생각할 수가 있으랴? 아! 이 무서운 진고개의 유혹!! 조선의 살림은 이 진고개 유혹의 희생(犧牲)이 되고야 말것인가?....
이 글은 특히 이번에 개최되는 소위 조선 초유의 대박람회博覽會[조선박람회 1929년 9월12일-10월31일 경복궁]를 구경코저 멀리 시골서 오는 우리 동포에게 삼가 드리는 동시에 결코 진고개 유혹에 정신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붓을 놓는 바이다. 1929,08,20. (정수일, '진고개', 『별건곤』, 19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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