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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남 - 창공에서 본 경성 1922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2. 11:03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 했는지 모르는 경성의 하늘! 이 하늘에 내 몸을 날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경성이 아무리 작은 시가市街라 합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도시라 합시다. 그러나 내 고국의 서울이 아닙니까. 우리의 도시가 아닙니까.
장차 크게 넓게 할 수 있는 우리의 도시, 또 그리 할 사람이 움직이고 자라고 있는 이 경성 그 하늘에 비행기가 날기는 결코 1,2차가 아니었을 것이나 그 비행은 우리에게 대한 어떤 의미로의 모욕, 아니면 어떤 자는 일종 위협의 의미까지를 띤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 잘하나 못하나 우리끼리가 기뻐하고 우리끼리가 반가워하는 중에 우리끼리의 한 몸으로 내가 날을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더할 수 없이 유쾌히 생각하였습니다.
참으로 일본서 비행할 때마다 기두機頭를 서천西天으로 향하고 보이지도 않는 이 경성을 바라보고 오고  싶은 마음에 가슴을 뛰노이면서 몃번이나 눈물을 지었는지 일지 못합니다.
아아, 내 경성의 하늘! 어느 때고 내 몸을 따뜻이 안아줄 내 경성의 하늘! 그립고 그립던 경성의 하늘에 내 몸을 날리울 때의 기분과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히지 아니할 것입니다. 
[...]

▲ 여의도 비행장 (1930년대)

경성 방문의 날, [1922년] 12월 10일은 의외에 일기日氣가 차서 이번의 불완전한 (방한防寒의 준비도 없는) 비행기로는 도저히 비행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래도 날아본다고 남대문 위를 넘어 광화문 위까지는 왔으나 북악산에서 내리지르는 바람에 비행기가 남으로 남으로 흐르면서 기계는 얼어 '프로펠라'가 돌지를 아니하게 되어 기체는 중심을 잃고 좌우로 기우뚱 기우뚱 흔들리면서 그냥 낙하될 듯한 위험한 형세임으로 어찌하는 수 없이 급히 경성시가京城市街의 서반西半만 1회廻하고 곳 여의도로 돌아왔습니다.

제 2일, 13일은 전날밤에 늣게야 여관에 돌아와 피곤히 자다가 이날 일기가 저으기 누그러졌단 말을 듣고 곧 일어나 이날 오후에 경성 방문과 인천 방문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오후 세 시에 여의도를 떠날 예정이었으나 기계고장으로 한 시간 이상이나 늦어서 경성을 향하고 비행장을 이륙하기는 4시 10분이었습니다. 
비행장에서 1,100 미터[米突] 이상을 높이 뜨니까 벌써 경성은 들여다 보였습니다. 뒤미쳐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아무때 보아도 남대문은 서울의 출입구 같아서 반가운 정이 솟아나지마는 비행기 위에서는 아물아물한 시가 중에 제일 먼저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동대문과 남대문이라 남대문이 눈에 보일 때 나는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아들을 대문 열어놓고 기다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같이 '오오 경성아!'하고 소리치고 싶게까지 반가웠습니다.

비행기 위에서 기쁨에 뛰노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쓰면서 나는 먼저 용산정거장과 남대문정거장의 사이를 비슷이 지나 만리재를 넘어 공덕리孔德里와 마포 방면을 한발 휘휘 돌았습니다.
한강의 물줄기는 땅에서 보던 몇 갑절이나 푸르게 보여 위에서 넓다랗게 내려다 보기에는 그야말로 빛 고운 남색의 비단

허리띠를 내던저 놓은 것 같고 그 곁으로 서강안西江岸 공덕리에 이르기까지에 군데군데 놓여 있는 초가집은 겨을에 마른 잔디같이 보여서 (미안한 말씀이나 사실대로 숨기지 말고 쓰라면) 마치 떼 마른 무덤墳塚이 도둑도둑 놓여 있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우리의 주택이 무덤같이 보인다는 것은 말하기에도 자미滋味롭지 못한 일이나 몹시 급한 속력으로 지나가면서 흘깃 나려다 보기에는 언뜻 그렇게 보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덕리 위를 지날 때에는 멀리 독립문 밖 무학재 넘어 홍제원洪濟院 시내溪의 모래밭까지 보이는데 그곳은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에 운동연습으로 또는 원족회遠足會[야유회]로 자주 갔던 곳이라 마음에 그윽히 반가웠습니다. 
거기서 경의선京義線 철로의 중간을 끊고 새문 밖 금화산金華山 부근의 하늘에서 나 어릴 때의 세월을 보내던 미동보통학교渼洞普通學校[서대문구 미근동 34번지]의 불타고 없어진 옛 터나마 살피려 하였으나 그 부근에 신건축이 많은 탓인지 얼른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또렷이 보이는 것은 모화관慕華館 뒤 무악재 고개와 그 앞에 서 있는 독립문이었습니다. 독립문은 몹시도 쓸쓸해 보였고 무악재 고개에는 흰옷 입은 사람이 꼬믈꼬믈 올라가고 있는것까지 보였습니다. 그냥 지나가기가 섭섭하야 비행기의 머리를 조금 틀어 독립문의 위까지 떠 가서 한발 휘휘 돌았습니다. 독립문 위에 떴을 때 서대문 감옥에서도 자기네 머리 위에 뜬 것으로 보였을 것이지마는 갇혀 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거기까지 찾아간 내 뜻과 내 몸을 보아주었을런지... 붉은 높은 담 바깥에서 보기에는 두렵고 흉하기만 한 이 감옥이 공중에서 내려다 보기에는 붉은 담에 에워싸힌 빛 누른 마당에 햇빛만 혼자 비추고 있는 것이 어떻게 형용할 수 없이 한없이 쓸쓸하여 보일 뿐이었습니다. "어떻게나 지내십니까." 하고 공중에서라도 소리치고 싶었으나 어떻게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섰습니다. 돌아서면서 거기는 평동平洞, 냉동冷洞, 감영監營 네 거리의 일판一版이 벌어져 있는데 감영 네거리에 흰옷 입은 한 떼의 사람이 몰려 서 있는 것을 보았고 성냥갑 같은 전차가 병난 장난감같이 느리게 땅바닥에 배를 데고 기어가는 것이 흘깃 보이더니 그 전차길 옆 개와지붕에 에워쌓인 목판 같은 마당에 울긋불긋 깜을깜을 하는 것은 아마도 경성여자보통학교京城女子普通學校와 또 그 한집에 있는 내 모교 미동보통학교渼洞普通學校[1921년 화재로 임시 옮겨온 교사]인가 보다 하였습니다. 미동학교는 어제 저녁에 내가 그 마당에 초대 받아 가서 지금 눈에 나려다보이는 저 학생들과 이야기 하던 곳이요 그 옆에 평동平洞은 내 출생지이라 알지 못할 친한 정과 반가운 마음이 샘솟듯 하야 이 일판一版의 상공에서 재조才操를 두 번 훌훌 넘었습니다. 여기서 재조 넘은 것도 보이기는 경성시가 전체에서 모두 보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내 출생지인 새문 밖에 거주하시는 여러분과 또 나를 길려준 내 모교에 경의와 정을 표하고 곧 흥화문[경희궁 정문] 야주현夜珠峴[야주개], 당주동唐珠洞을 살짝 지나 경복궁 옛 대궐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검으테테한 북악산 밑에 입 구자口字처럼 둘러싼 담 안의 넓디 넓은 옛 대궐은 우거진 잡초에 덮혀버린 집같이 사람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몹시도 한산하고 쓸쓸하여 보였습니다. 거기서 바로 창덕궁을 향하고 안동 네거리 별궁 위 동아일보사 부근의 공중을 스쳐 모로 놓인 ㄱ자형字形으로 보이는 천도교당과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지나 검푸른 수림樹林 속에 지붕만 보이는 창덕궁昌德宮의 위에서 한발 휘휘 돌아 공중에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경성 시민 여러분에게 드린 인사의 종이는 바람에 불려서 남으로 불려갈 생각을 하고 이 북쪽을 오는 동안에 다섯 번인가 여섯 번에 별려서 내리 털었으나 많이 집어 읽으실 수 잇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창덕궁 방문을 마치고 나는 곳 종묘의 깊은 수림을 옆으로 엿보면서 이어 창경원昌慶苑(동물원)의 수림과 총독부의원總督府病院을 옆으로 보고 동소문東小門 밖에 눈 쌓인 먼 산까지 내려다 보면서 동대문 위로 지나 청량리 줄버들과 안암동, 우이동 가는 되넘이 고개까지 왕십리의 거리까지 그 넘어 한강 뚝섬인 듯한 것까지 보면서 기체[機體]는 동대문에서 광희문으로 지나 다시 꺾이어 황금정통으로 곧게 남대문을 향하고 돌진하였습니다. 황금정 가로 위를 지나도 진고개에서 보기에는 자기 머리위를 지나간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동양척식회사 집을 보았을 때 신문관新文館 위가 여기였을 것을 알았고 이름만 남은 덕수궁과 매일신보 [경성일보, 현 서울시청 자리] 회색집을 옆으로 보면서 남대문 위를 돌았습니다.

▲1920년대초 경성시가지 전경

남대문에서 다시 성城자리 위로 새문 밖을 돌아 다시 광화문 앞으로 돌아 종로 네거리의 공중으로 왔습니다. 여기가 얼른 말하면 경성 시가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인 까닭이었습니다. 새문길, 동대문길, 남대문길, 전동典洞길이 모두 이 복판으로 모여와 있어서 성냥갑 같은 전차 여러 개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광희문통의 황금정길,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의 길, 교동길, 창덕궁 앞길, 동물원길, 창의문길 거의 어느 길 아니 보이는 곳이 없었고 어느 큰 집이나 어느 작은 집이나 아니 보이는 집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나려다 보이기에는 남촌南村의 일인촌日人村이라고는 진고개길 좌우옆 뿐인 것 같아 보였고 경성 전체의 형용形容은 얼른 보기에 종로통과 황금정통의 시커먼 개와집 큰 판版이 몸이 되고 곁으로 남북촌南北村으로 쭉쭉 뻗은 가옥의 줄기가 마치 무슨 큰 거미의 발 달린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런가 하고 북문(彰義門)쪽의 거리를 보면 무슨 짐승의 꼬리같이도 보였습니다.
여기가 종로 종각의 위이고 경성의 복판인가 하고 생각한 나는 여기서 재조를 두 번이나 넘고 거듭 제일 어려운 횡전곡승橫轉曲乘을 두 차레나 하였습니다. 여기서 넘은 재조는 경성 시내의 대개의 집에서는 각각 자기 지붕 위에서 재조를 넘은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종로 위에서 이렇게 여러분께 경의와 정을 표하고 나서 나는 곳 다시 창덕궁 앞으로 돌아 동대문으로 가다가 중간에서 재조를 두 번 넘고 뒤이어 송곳질(송곳 부비듯 뱅뱅 돌면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곡승비행曲乘飛行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동대문東大門 부근(內外)의 여러분이 자세히 못 보신 이가 계실 듯이 생각된 까닭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였으면 이제 경성방문京城訪問 비행의 뜻은 이루었으리라 생각하고 나는 곳 거기서 황금정으로 종로로 광화문으로 창덕궁으로 크게 원을 그리어 빙그르 돌고는 서대문 밖으로 나가서 남대문 밖으로 여의도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는 모든 사람이 추위에 떨면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주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오신 독자께서는 그 간 마포로 공덕리로 독립문으로 들러 경성 시내를 3,4회나 휘도는 동안이 퍽 시간이 오래였을줄 짐작하실 것이나 실상은 이상 기록대로의 비행에 걸린 시간은 겨우 11분이었습니다. (안창남,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중에서 경성편, 『개벽』, 1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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