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틈엔가,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서서, 그곳의 황혼과 또 황혼을 타서 거리로 나온 노는계집의 무리들을 본다. 노는계집들은 오늘도 무지無智를 싸고 거리에 나왔다. 이제 곧 밤은 올게요, 그리고 밤은 분명히 그들의 것이었다. 구보는 포도 위에 눈을 떨어뜨려, 그곳의 무수한, 화려한 또는 화려하지 못한 다리를 보며, 그들의 걸음걸이를 가장 위태롭다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가 숙녀화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들 가장 서투르고 부자연한 걸음걸이를 갖는다. 그것은 역시 '위태로운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그러나 물론 그런 것을 그네 자신 깨닫지 못한다. 그들의 세상살이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누구라 하나 인생에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무지는 거의 완전히 그 불안에서 그들의 눈을 가리어 준다. 그러나 포도를 울리는 것은 물론 그들의 가장 불안정한 구두 뒤축뿐이 아니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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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한 도회 청년의 위안
세상에는 '모던보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청년의 일군一群이 있다. 그들은 가장 근대색채近代色彩가 농후해서 그들의 의복, 언어, 동작은 물론이요, 그들의 사고방식까지도, 근대화하지 못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몹시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근대화하지 못한 사람들의 그것에 비하여 자연히 별개의 세계에 전개하게 된다. 청신淸新한 감각의 세계, 찰나적이요 기분적氣分的인 도취의 세계가 언제든지 그들의 눈앞에 방황한다. 그들은 실로 '아름다운 근대의 무지개'다.
그런데 일부 사회에서는 그들을 보고 무엇이라 하는가. '경박지화輕薄之輩'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하지 않는가. 비난, 그것은 하는 사람의 자유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모던보이'라는 그들을 비난하고 이단자시할 아무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어찌해서 청신한 감각의 세계를 이단자의 세계로 보느냐. 근대생활을 하는 사람에게서 감각의 위안을 빼앗는다면 그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 아닌가. 물론 '모던보이'풍의 일절一切의 것을 소부르주아적 생활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무산계급에게서 술과 담배의 위안을 빼앗는다는 것이 가혹한 일일 것 같으면 근대도회생활近代都會生活에 부대끼는 피로한 신경의 소유자들에게서 유일의 위안인 모던식 생활의 일절의 것을 박탈하는 것도 확실히 가혹한 일일 것이다 (박팔양, '모던뽀이 촌감寸感'((모-던껄· 모-던뽀-이 대평론大論評),『별건곤』, 19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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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적 퇴폐의 상징
[...] 대체로 말하면 나는 '모던걸'이나 '모던보이'를 미워하는 파도 아니요, 또 그렇다고 좋아하는 파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네들을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같이 쌀쌀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네들도 나를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별로 섭섭할 것은 피차 천만의 말이지만 피차간 이렇게 생긴 것만은 사실의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로담이나 석가와 같다는 변명 같으나 그렇게 무명無明을 벗은 사람도 아니다. 다행히 금년 겨울은 더우니 괜찮치만 북악산의 찬바람이 거리를 싸르르 스치는 때라도 혈색 좋은 설부[雪膚]가 드러날만큼 반짝거리는 엷은 양말에 금방에 발목이나 삐지 않을까? 보기에도, 아심아심한 구두 뒤로 몸을 고이고 스카트 자락이 비출 듯 말 듯한 정갱이를 지나는 외투에 단발, 혹은 '미미가꾸시에다가' 모자를 폭 눌러쓴 모양은 멀리 보아도 밉지 않고 가까이 보아도 흉치 않다. 어쩌다 길이나 좁은 데서 만나 엇갈리게 되면 나는 본능적으로 분[粉]에 결은 그 뺨과 나불거리는 귀밑을 곁눈질하게 된다. 여기서 연상되는 것은 분[粉] 길 같은 손에 경복궁 기둥 같은 단장을 휘두르면서 두툼한 각테 안경, 펑퍼짐한 모자- 어떤 시대 화가들이 쓰던 것 같은- 코 높은 구두를 신고 장안 대로는 온통 제 길이라는 듯이 활개치는 젊은 서방님들이다. 나같은 겁쟁이는 만원된 전차 속이나 길좁은 골목에서 그런 서방님들을 뵈오면 공연한 트집이나 잡지 않을까? 해서 질겁을 해서 뺑소니도 치지만 하여튼 그들은 즉 '모던걸'과 '모던보이'는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이쪽만 들면 저쪽이 섭섭해하고 저쪽만 만지면 이쪽이 섭섭해할 만큼 서로 기울지 않는 짝이라, 이런 것을 생각하면 두쪽을 다 건드리는 우리 『별건곤別乾坤』의 태도도 지극히 공명정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쓸데 없는 잔소리는 집어치우고 이렇 나는 그네들과 아무 상관도 없것만 눈에 뜨이는 때면 느끼는 바가 없지도 않고 또 친구들과 서로 만나서 놀다가 화제가 그리로 돌아가면 나도 한 몫 끼이는 축이요, 빠지는 축은 아니다. 하나 그렇다고 거기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가진 것도 아니요, 또 철저치는 못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통일된 의견을 가지지도 못하고 허허 웃어버릴 만큼 질서 없는 말들인데 '모던걸'이 나오면 피아노나 활동사진관이 따라나오고 '모던보이'를 말하면 기생집이나 극장이나가 따라나오는 것만은 사실이다. 내 자신도 '모던걸'하면 현숙한 맛은 쑥 들어가고 화사하고 요염한 계집- '딴스장'에 나가는 여배우 비슷한 계집에게서 받는 듯한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받게 된다. 그와 같이 '모던보이'에게서는 일 없이 '히야까시'나 하고 빤질빤질 계집의 궁둥이나 쫒아 다니는 엇던 그림자 같아서 건실하고 강직한 느낌은 못받는다. 딴은 '모던걸', '모던보이'라는 말을 일본이나 조선서는 '불량소녀', '불량소년' 비슷한 의미로써 쓰는 까닭에 그렇게도 느껴지겠지만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도 현숙하고 건실하다는 느낌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영문英文을 모르니 그 참뜻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영문 아는 이의 해석을 들으면 '모던'이라는 것은 근대 또는 현대라는 뜻이라 한다. 그러면 '모던걸', '모던보이'근대소녀近代少女, 근대소년近代少年이니 속어로 말하자면 시체[時體]계집애, 시체사내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 시체[時體] 것을 그렇게 좋지 못한 의미로 쓰는지, 심한 이는 '못된걸', '못된보이'라고까지 부르며 어떤 이는 그네들 정조貞操에까지 불순한 말을 하니 이것은 심한 말도 되려니와 나와 같이 그네들 속은 모르고 겉만 보고는 할 말이 아니다. 하나 시체라는 것을 어째서 좋지 않게 생각하는지는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헛수고는 아닐 것이다.
예전은 모르지만 근래에 이르러 시체라 하면 그 요소의 90퍼센트는 양풍[洋風]일 것이다. 요새는 좀 덜하지마는 한때는 서양 것이라 하면 덮어놓고 좋다하여 의복, 음식, 심지어 '뻬트'까지라도 놓지 못하던 분들이 있었다. 일본에도 이런 때가 있어서 눈알까지 푸르게 못하는 것을 한탄한 이가 있었다 한다. 그리하야 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몸치장과 행동이 보는 이의 악감[惡感]을 샀을 것이요. 또는 되지도 않는 연애자유론을 부르짖으면서 하루도 두셋 씩 만나다 갈리는 분들이 그 속에 있어서 이러한 미움까지 받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나는 새로운 행동을 취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요 연애자유를 구속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행동을 취하되 의미가 있어야 할 것이요 연애의 자유를 부르짓되 그 자유를 실현할만한 사회부터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요새의 '모던걸'이나 '모던보이' 모양으로 덮어놓고 화사에 들뜨고, 바이올린, 피아노나 치고 앉아서 연애자유나 부르고 걸핏하면 정사[情死]-그렇지 안으면 실연병[失戀病]에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것은 세기말적의 퇴패기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나는 여기서도 스러저가는 이 세상의 잔해殘骸를 역력히 보고 있다.
생각하면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앞길도 아침 햇볕아래 빛나는 풀 끝의 이슬이나 되지 않을런지? (최학송[서해], '데카단의 상징'(모-던껄· 모-던뽀-이 대평론大論評), 『별건곤』, 19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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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도시의 시민
지금 조선 사람의 문화를 생각하고 길거리에 제각기 세기를 달리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기현상을 볼진대 하필 모던걸만이 화제에 오르랴만은 오늘 조선여성들의 그 무엇엔가 초조한 심리가 그들에게서 나타나고, 지금의 조선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그 여성들의 차림차림이라던가 걸음걸이며 그들의 얼굴에 가공한 그들의 이중생활의 마스크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부러진 초가삼간에도 길 나올 때에는 불란서 파리나 뉴욕의 맨하탄에서 부침하는 여성들의 옷을 걸치고 나와야만 하는 그들의 그 마음에 이 조선이라는 이 땅 이 풍경이 얼마나 싫으랴만, 그래도 서울에도 아스팔트 보도가 있고 부민관에서는 세계적 일류음악가 필만이 연주를 하고 또 얼마 있으면 남국의 향기를 담뿍걸친 스키파가 온다는 이 서울 거리를 하루도 안나와 보고는 그들의 우울한 생애를 도금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손가락에 이삼백 원, 천여 원의 백금반지는 어디서 난 것인가, 그들의 목에 걸친 그 값비싼 목걸이를, 그 핸드백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그들의 애수는 꼭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도 있을 것이다.
전문학교를 나와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 다만 얼굴이 예쁘고 살결만 윤택하면 그만인 세상, 적이 지식여성의 한탄이 여기에 있다.
"지식여성에게는 미인이 어디 있어요[?]"
이것은 내가 어느 때 어느 지식 여성에게서 들은 솔직한 그들의 고백이다. 마음은 높다. 그러나 어느 때든 그들은,
"우리들은 얼마나 고민하는 줄 아세요? 결혼하기도 어렵고 다만 갈 길은……"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지식이 있기 때문에 고민하는 때는 자포자기가 될 수 밖에 없다. 그 사나이의 첩(흘러다니는 여자), 허영의 도시의 시민이 된다. 이것이 모던걸이다. 가장 깨이고 가장 세계인의 호흡을 먼저 호흡하는 여성이 모던걸이다. 그들의 가상무대를 영화관의 스크린이라 하자. 그러면 너무나 안타까운 그들의 환락이 아니랴.
어서 꽃이 피소서, 어서 여름이 오소서. 모던걸의 기원이 이렇게 올 것이다. (안석영, '모던걸', 『조광』, 19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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