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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산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2. 20:01

▲ 인왕산 선바위(1930년 촬영)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해가 인왕산 마루턱에 걸렸다. 종로 전선대 그림자가 길게 가로누웠다. 종현 천주당[명동성당] 뾰족탑의 유리창이 석양을 반사하여 불길같이 번적거린다. 두부 장수의 두부나 비지드렁 하는 소리도 이제는 아니 들리게 되고 집집에는 앞뒷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한 손으로 땀을 씻어 가며 저녁밥을 먹는다.

북악의 황토가 가로쏘는 햇볕을 받아 빨간빛을 발하고 경복궁 어원 늙은 나무 수풀에서는 저녁 까치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이광수, 『무정』,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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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仁王.

바위 위에 잔솔이 서고 아래는 이끼가 빛을 자랑한다.

굽어보니 바위 아래는 몇 포기 난초가 노란 꽃을 벌리고 있다. 바위에 부딪치는 잔바람에 너울거리는 난초잎.

여[余]는 허리를 굽히고 스틱으로 아래를 휘저어보았다. 그러나 아직 난초에서는 사오 척의 거리가 있다. 눈을 옮기면 계곡.

전면이 소나무의 잎으로 덮인 계곡이다. 틈틈이는 철색鐵色의 바위도 보이기도 하나 나무 밑의 땅을 볼 길이 없다. 만약 그 자리에 한번 넘어지면 소나무의 잎 위로 굴러서 저편 어디인지 모를 골짜기까지 떨어질 듯하다.

여의 등 뒤에도 이십삼 장[丈]이 넘는 바위다. 그 바위에 올라서면 무학재로 통한 커다란 골짜기가 나타날 것이다. 여의 발 아래도 장여丈餘의 바위다.

아래는 몇 포기 난초, 또 그 아래는 두세 그루의 잔소러, 잔솔 넘어서는 또 바위, 바위 위에는 도라지꽃, 그 바위 아래로부터는 가파른 계곡이다.

그 계곡이 끝나는 곳에는 소나무 위로 비로소 경성 시가의 한편 모퉁이가 보인다. 길에는 자동차의 왕래도 가막하게 보이기는 한다. 여전한 분요[紛搖]와 소란의 세계는 그곳에 전개되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심산이다. 심산이 가져야 할 온갖 조건을 구비하였다.

바람이 있고 암굴이 있고 난송亂松이 있고─ 말하자면 심산이 가져야 할 유수미幽邃美를 다 구비하였다.

본시는 이 도회는 심산 중의 한 계곡이었다. 그것을 오백 년간을 닦고 갈고 지어서 오늘날의 경성부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협곡에 국도國都를 창건한 이태조의 본의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 산보객의 자리에서 보자면 서울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미도美都일 것이다.

도회에 거주하며 식후의 산보로서 풀대님 채로 이러한 유수한 심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으로 보아서 서울에 비길 도회가 세계에 어디 있으랴.

회흑색灰黑色의 지붕 아래 고요히 누워 있는 오백 년의 도시를 눈 아래 굽어보는 여의 사위에는 온갖 고산신물이 난성亂盛하고, 계곡에 흐르는 물 소리와 눈 아래 날아드는 기조奇調들은 완연히 여로 하여금 등산객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김동인, '광화사', 1935)

 

▲ 남산에서 본 경성(1930년대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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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등반기념(1937.4.3.)  출처: http://bitly.kr/tUVS2

어느 벗은 나를 위하여 북한산이며, 관악산이며, 그러한 경성 근교의 산악 등반을 권하여 마지 않습니다. 벗들은 수천 언言을 소비하면서 고산 절정에서의 상량미爽凉美의 이루 아무 것과도 비길 수 없는 것임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신체가 건강치 않으므로 하여, 등산의 효과가 배가될 것을 역설하나, 나는 도리어 내 몸이 너무나 허약함으로 하여, 우선 산정의 신기神氣를 호흡할 수 있기 전에 능히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준험한 산로山路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한 푼의 자신도 가질 수 없이 오직 잠시 생각하여 볼 뿐으로, 이미 나의 숨은 가쁘고 어느틈엔가 얼굴에는 땀조차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한번, 꼭 한번 북한산에 오른 일이 있습니다.

4년 전, 늦은 여름에 나의 형제의 완강한 권유를 이루 물리치기 어려워,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나섰던 것이나, 오직 문수암에 이르는 그 동안에도, 대체 몇 십 차례나 길가에 가엽게도 주저앉아, 가뿐 숨을 돌리기에 애썼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어쨋든 목적한 곳까지 오르기는 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오직 황혼의 서늘한 길을 그대로 산을 내려 창동倉洞까지만 가면 다음은 차에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것이라 알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 먼저 뜀바위를 뛰어 건너고, 휴대한 쌍안경을 들어 좀더 원거리를 관망하는 듯, 자못 득의만만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그 뒤에 내가 애닯게도 결심한 것은, 역시 이 뒤로는 좀처럼 아무런 산에도 오르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박태원, '영일만어',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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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 왜성대공원 

여자는 단장을 새로이 하고 삼십분 전부터 골목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우체통 앞까지 쫒아와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왜성대倭城臺로 올라갔다.

"저리루 가볼까?"
남자가 턱으로 코끼리 바위쪽을 가르쳐도 여자는 웃으며 고개를 목으로 흔든다. 그들을 요모조모 남김없이 뜯어보고 그리고 무어라 비웃고 놀리고 할 애녀석들이 많이 모여 놀리는 언제 가 보아도 그러한 곳이었다.
그래 그들은 과학관 앞을 지나 그 길을 그대로 곧장 마침내 높지 않은 언덕 우에까지 더듬어 오른다. 그리고 탑스러운 늙은 소나무 아래 편편한 바위 우에가 두 사람은 수건도 까는 일 없이 그대로 나란히─ 그러나 누가 별안간 그곳에 나타나더라도 당황하여 물러앉지 않아도 좋을 만큼 서로 약간 사이를 두고 앉는다....
'이 원이면 예산은 충분허구…… 또 애초에 쥔한테 이 원 말 한 것두 이 생각으루 그런거니까……'
그래 자기는 그것을 다 쓰고도 후회 안 할 자신을 갖고 이제 좀더 알마치 시장하기를 기다리며 마음은 드물게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김 서방과 그의 정인이 아직 남산에서  내려오려고도 하지 않하고 있을 때 한약국집 주인영감은 근래에 드물게 자기집 안방에가 앉어 술상을 받고 있다. (박태원, 『천변풍경』,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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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시나 되어 쌀쌀하여지기는 하나 그래도 오늘부터는 날이 풀려서 손발이 시릴 지경은 아니다. 길을 남산으로 들어선다. 병화도 잠자코 따라설 뿐이다.....

"이거 왜 이렇게 끌고 가는 거요? 어 추워. 그까짓 이야기하자고 남산 꼴짜기까지 찬바람 맞고 올라올 거 무어 있소."
"또 이야기가 있지만 어디든지 들어사기랴우?"
"볼기 있는 데면 아무 데나 좋지."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쓸쓸한 조선신궁앞마당을 휘이 돌아서 삼백 여든 몇 층이라는 돌층계를 나란히 서서 간신히 내려서니 해는 벌써 뉘엿뉘엿하여졌다. 전차 선로까지 와서 경애는 자기 집이 바로 저기니 같이 가서 저녁이나 먹고 가자고 한다. 병화는 좀 의외이었으나 아무려나 좋다 하면서 따라섰다. (염상섭, 『삼대』, 1931)

 


또 한 코스. 조석[朝夕]으로 쳐다 보는 남산.

'저기나 한번 올라가 보았으면'
'얼마나 멀까'
누구든지 이같은 생각을 가지고 게실 것입니다. 삼각산 북악산도 그립지 않은 바 아니나 아낙네 행보로는 괴로울지 모르니 산을 내릴 때 아가씨를 업고 나려올 기운이 없는 분은 남산 코스를 택하십시요. 아낙네가 12관 이상만 되시면 아무리 건장한 분이시라도 업고서 험산을 나리시기는 고통이시리다. 팔자 사나워 뒹구는 날이면 두 주검 납니다. 유언장도 없는 두 주검 정사!
듣는 이는 재미 있을지 모르나 죽고 보면 원통치 않겠습니다. 남산 경성신사에서 서편으로 돌아서면 '토지조사기념비'가 있고 그 뒤 언덕 밑으로는 '부엉바위'라는 약물터가 있습니다. 이조 500년 이래로 유명한 약물터입니다. 우선 목을 추기시요. 손목을 잡고 올라가시는 동안에 손에 땀도 났으려니 맑은 물에 손을 담그면 마음까지 쇄락[灑落]해집니다. 부엉바위에서 과자 파는 아이에게
"와룡당이 어디냐."
물으시면
"바로 요 뒤올시다."
가르쳐 드리리다. 남산 와룡당이라면 복을 비는 신당, 남북촌 재상가[宰相家]에서 한참 세우던 곳이요 지금도 치성하러 내려 오는 아낙네가 끊이지 않습니다. 와룡당에 올라가
'비가 오지 않도록…'
'애인의 마음이 늘 오늘 같도록'
축수발원을 하신 뒤 차근차근 산길을 찾아 봉수로 올라가기로 하십시오. 누가 모를 바가 아니나 한모룽이를 오르면 한 벌판이 더 보이고 한 언덕을 정복하면 장안은 한 언덕 만큼 얕아집니다. 중턱만 올라서면 인적은 끊기고 솔바람 새소래만이 귀에 들립니다. 발자취에 놀란 다람쥐의 꼬리가 잘못 발길에 발피더라도 항여 잡지는 마십시요. 봄은 그네들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외다. 남산 봉수까지 쉬여 올라도 1시간이면 넉넉히 올라갑니다. 길은 넓지는 못하나마 분명히 보이는지라 길 몰라 오지 못할 걱정은 댁에다가 내던지고 가시어도 좋습니다. 남산 봉수에 '국사당'이 없어진 뒤로는 당즉이집이 그저 있는지 모르나 약물터는 말랐을리가 만무하니 싸가지고 간 샌드위치, 실과, 과자를 펼처 놓고 사랑 양반의 꽁무니에 걸렸던 표주박을 떼어서 물을 떠 잡수십시요. 앉을 자리는 사랑 양반이 잡으실 일, 물은 아낙네가 뜨러 가실 일. 보기에는 봉수가 뾰족해 보여도 올라가 보면 노목[老木]이 우거진 곳에 평지가 벌려 있고 금잔디 틈틈이 누런 꼿 붉은 꽃이 수줍게 웃고 있습니다.

남쪽을 보면 관악산까지 눈 앞에 기어 들고 북쪽을 보면 삼각산까지 발 아래에 깔렸습니다. 언제 보아도 눈에 먼저 띄는 것은 창덕궁과 불난 서교당 서대문 형무소에서 한숨 짓는 이들의 처량한 봄타령이야 들려오던말던 남산 밑에 가득찬 벚꽃, 창경원에 우거진 벚꽃 경성중학 뒤 언덕에 어리운 꽃구름 안 바라보아도 봄놀이터로서는 특등일 것입니다. 잔디밭에서 낮잠잠이라도 주무시요. 나무 우에 올라가 숨바꼭질이라도 하십시요. 누가 있어서 못하며 누구의 눈이 꺼려서 못노시리까. 당신네의 후원에서 노시는 심치신들 누가 무엇이라 하오리까.
"아이그머니나. 저편 나무 그늘에도 있구료."

"저런 저 허무러진 성 밑에도 있구료."

사랑의 하이킹은 너나가 없습니다. 둘이만 즐기려는 욕심은 너나가 없으니 등너머에 또 한패가 있기로서니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나 그 뿐입니까. 같은 청춘 같은 사랑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니 한패가 하모니카나 불고 노래를 불러주거든 이 숲속 저 언덕 밑에서 싱글벙글 모두 모여서 산 밑에서 한참 말썽 많은 사교춤이라도 추는게 멋드러지지나 않겠습니까. (이서구, '애인 다리고 갈 사랑의 하이킹코스',  『삼천리』 1936.6.)

 

▲ 대한뉴스 182호 (1958. 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