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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2. 12:58


경무국장께 보내는 우리들의 글

 

대일본 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李瑞求
끽다점 '비너스' 마담 복혜숙卜惠淑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吳銀姬
한성권번 기생 최옥진崔玉眞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朴錦桃
바 '멕시코' 여급 김은희金銀姬
영화여우女優 오도실吳桃實
동양극장여우女優 최선화崔仙花

 

삼교三橋 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주십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만일 서울에 두기가 곤란한 점이 있거든 마치 오사카大阪에서 시내市內에는 안되지만 부외府外에 허하드시, 서울 근방의 한강 건너 저 영등포나 동대문 밖 청량리 같은 곳에 두어 주십사고 청하나이다. 우리들은 대개 동경도 다녀왔고 상해, 하얼빈도 다녀왔고, 개중에는 서양까지 돌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 내지內地의 동경, 신주꾸, 요꼬하마 등지를 돌아보거나 상해, 남경, 북경으로 돌아보거나 각각이 대련, 봉천, 신경을 돌아보거나 거기에는 모두 '딴스홀'이 있어 건전한 오락이 성盛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부럽기를 마지 아니하여 합니다. 일본제국日本帝國의 온갖 판도내版圖內와 아시아의 문명도시에는 어느 곳이던 다 있는 딴스홀이 유독 우리 조선에만, 우리 서울에만 허락되지 않는다 함은 심히 통한痛恨할 일로 이제 각하에게 이 글을 드리는 본의도 오직 여기 있나이다.

 

삼교三 경무국장 각하여

각하는 '딴스'를 한낮 유한계급의 오락이요, 또한 사회를 부란腐爛시키는 세기말적 악취미라고 보십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교 딴스조차 막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각하의 잘못 인식함이로소이다. 우리들은 일본 내지에 있어서의 딴스 발달사를 잘 압니다. 지금부터 40년 전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완성하고 서양문명국과 평등을 주장하려 할 적에 이등박문伊藤博文, 육오광종陸奧宗光 등 유신維新의 제공신諸功臣들이 동경 녹명관[麓鳴館]에 딴스 파티를 성盛히 열고 영국공사 '파크' 이하 열국列國 외교관들과 더불어 성盛히 딴스를 하면서 크게 국제적 사교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 어찌 정부요로대관政府要路大官들만, 상류의 외국 사신들과 교제하는 것으로 능能을 삼었으리까. '국민도 국민끼리'라는 정신에서 또한 시정市井에 딴스홀을 많이 허락하여 영미인들과 내지인內地人들이 어울려 딴스하면서 크게 인민人民끼리의 친교를 맺지 않았나이까.

그러다가 '딴스홀'을 허하여 줌으로부터 풍교상風敎上 조치 못하다 하야 내무대신의 탄압으로 일시 잠잠하여 졌으나 구미歐米 문명의 풍조와 인생오락의 본능으로 불어오는 이 요구를 무리하게 막을 수 없어, 마침내 소화2년[1927] 즈음부터 다시 허락하기로 되어 유행계를 풍미하게 된 것이 아니오니까, 그도 응접실과 특수한 집회소의 오락에만 만족치 못하야 마침내 가두街頭로 나아온 것이 아니오리까.

그래서 소화3년에는 동경 경시청 관내에 3개소이던 것이 소화7년에는 8개소로 격증했고, 그 뒤로는 비록 동경시내에는 허락되지 않었으나 자동차면 10분, 20분, 멀어야 반 시간,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사이타마현, 카나가와현, 치바현에 딴스홀이 부쩍 늘어서 요꼬하마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20 곳이나 되며, 거기다가 교토, 오사카, 신주쿠, 시가현, 베뿌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동경, 요꾜하마와 케이한신에 있는 것만 53 곳 된다고 합니다. 어찌 이뿐이오리까. 이름은 사교딴스라 하나 그실 일반 딴스와 별로 차별이 없는 쏘사이티, 딴스홀이 동경에만 벌써 50여 곳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삼교三橋 경무국장 각하여

▲ 해방직후의 댄스홀

각하는 동경에서 몇 해 전에 일어난 유한有閑 마담들이 불량 딴스 교사와의 사이에 일으킨 도색유희사건桃色遊戱事件이나, 상류층 자녀들과 딴스 교사 사이에 이러난 풍기사건들을 들어, 딴스는 세상을 그릇치게 하는 오락이라고 하기 쉬우리다. 그것은 어쩌다가 생긴 한, 두가지 예외요 신문지를 놀라게 하던 그 여러 사건 뒤 경시청의 취체取締가 엄하여지면서 불량교사의 처분, 불량 딴스 홀의 쇄청刷淸 등이 있은 뒤로는 지금은 동경의 상하上下 가정의 온갖 신사숙녀가 모두 명랑하고 즐겁게 딴스홀에 출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오직 당국에서 취체取締하기에 따라 모든 페해를 능히 막을 수 있을 줄 압니다.

만일 그래도 딴스홀을 허락하면 '딴사'[딴스교사]들의 유혹으로 청년들이 타락하리라고 근심하십니까. 그렇다면 거리거리에 술먹고 주정부리게 하는 수많은 카페는 어째서 공허公許하었으며 더구나 화류병花柳病을 퍼뜨리고 음란한 풍조를 흘리는 공창公娼과 매소부賣笑婦들은 어째서 허락하였습니까. 딴스를 하기 때문에 타락한다하면 그 사람은 딴스를 아니해도 타락할 사람일 것이외다.
우리는 잘 압니다. 일본 내지의 전통적 관습인 저 제례祭禮 때의 봉오도리(盆踊)를, 일년 열두달 두고 피땀을 흘려가며 일하던 남녀가 이 날 저녁 서로 엉키어져 춤추고 노래하는 즐거운 그 광경을─. 그러나 봉오도리 때문에 선남선녀가 타락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또 요지간의 오사카매일신문을 보면 부산현富山縣 각 여학교에서는 '오와리 마쯔리(おわら踊り' 등 제복의 처녀들에게 레코드에 맞춰 체조 대신에 춤을 배워주고 있고 동경에 많이 있는 '신부학교花嫁學校'에서도 모두 딴스를 가르쳐 주고 있고 아이즈와카마츠會津若松 등지에서는 부녀회와 애국부인회의 마나님들조차 딴스를 배우고 있다 합니다. 장차 선생님이 될 여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여자사범학교에서조차 이름은 체육 딴스, 사교 딴스라 하나, 그실 '폭스', '킥', '슬로', '원스탭' 같은 딴스를 배워주고 있다 하지 않습니까.

 

삼교三橋 경무국장 각하여

만주사변 직후에 우탄宇坦 전前 총독은 서울에 있는 신문기자를 향하여 국가비상시에 딴스는 허가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모두 이제는 평정하게 되고 평화의 기상이 세상에 차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각하의 귀에 완고한 부노父老들과 시대사조時代思潮를 모르는 도덕가들이 딴스홀를 허락하면 풍기문제 이외에 '돈'을 낭비하게 될 터이니 좋지 못한 것이라고 진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지반해一知半解의 도徒이니 지금 우리가 알기에는, 조선사람들이 사교합네 하고 가는 곳이 명월관이나, 식도원같은 요리점이로소이다. 그런 곳에 가면 하루 저녁 적게 써도 4, 50원의 유흥비를 내고 마나, 그러나 딴스홀에 가면 한 스텝에 5전, 10전 하는 티켓값만 있으면 하루 저녁을 유쾌하게 놀고 올 것이 아니오리까. 이것이 술 먹고 주정 부리고 그래서 돈 없애고 건강을 없애는데 비하여 얼마나 경제적이고 문화적이오리까.

세상의 교육가 부인도, 관공리官公吏 부인도 은행회사원 부인도 모두 요리집보다는 차라리 딴스홀에 그 남편이 출입함을 원할 것이외다.

어찌 원하고만 있으리까. 명랑하고 점잖은 사교 딴스홀이면 부부동반하여 하루 저녁 유쾌하게 놀고 올 것이 아닙니까. 이리되면 가정부인에겐들 얼마나 칭송을 받으리까. 더구나 4년 후에는 국제國際올림픽 대회가 동경에 열려 구아연락歐亞聯絡의 요지에 있는 조선 서울에도 구미 인사가 많이 올 것이외다. 그네들을 위하여선들 지금쯤부터 딴스홀을 허함이 옳지 않으리까.

 

삼교 三橋 경무국장 각하여

더 쓸 말이 많으나 너무 지루하실 듯하여 이에 그치거니와 어쨋든 하루 급히 서울에 딴스홀을 허락하시여, 우리가 동경 갔다가 '프로리다 홀'이나 '제도帝都', '일미' 홀 등에 가서 놀고 오는 것 같은 유쾌한 기분을, 60만 서울 시민들로 하여 맛보게 하여주소서. (『삼천리』, 1937.1.)

 


▲ 영화 「암살」(2015) 중에서

딴스비사秘社 명치정서 발각
딴스홀이 없는 조선에서는 딴스비사秘社가 이따금씩 발각되어 딴스광들의 두상에 대철추를 내려오든 바 지난 14일 오후 깃드는 봄밤이 바야흐로 깊어 가랴 할 즈음 남 몰래 틀어 논 레코드의 딴스곡이 밖에까지 새여 들어 필경은 경관을 부르게 까지 하였다. 명치정 2정목 모 미용원 앞을 본정서원[본정서 경찰]이 지나다가 딴스곡이 흘러나오는 것을 수상히 여기고 현장에 들어갔는 바 전중田中이라는 무용 교수가 8,9명의 유한 마담과 철동병원의 모씨가 일단이 되어 한창 뛰노는 것을 중지시키는 동시에 전기 전중모를 인치한 다음 엄중 취조한 결과 아직 대규모적의 정도까지 들어가지 아니했으므로 장시간의 설유를 가한 다음 돌려보냈다는데 동 서에서는 전부터도 비밀 딴스홀에 대한 풍설이 많은만큼 이것을 기회로 관내 각처를 세밀히 조사하기로 되었다 한다. (동아일보, 1935.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