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전차
일정한 근무처를 가지고는 있지 않으나, 그래도 매일같이 밖에 나갈 일이 생기고, 나가면 또 대개는 교통기관으로 전차를 이용하게 된다. 특히 러시아워도 아니건만 나의 타는 전차는 언제든 만원이다. 항상 불편을 느끼고 있거니와, 조석 출근, 퇴근시의 번잡은 이에 수 배 할 것을 생각하니, 자못 우울하기조차 하다.
'만원전차'로 하여, 여론은 이제까지 끊임없는 비난을 경전京電[경성전기]에 대하여 퍼부어 왔다. 그것을 나까지 나서서 되풀이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또 나대로 평소에 느끼는 바 있기로 한마디한다.
부민府民들이 경전에 대하여 그 성의가 없음을 탄하였을 때, 경전은 이에 대답하여, 자기들은 진실로 성의를 가져 문제 해결에 노력하고 있으나, 다만 물자 기근으로 원활히 진행이 안 될 뿐이라고 하였다. 이 대답에도 소상히 검토하여 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나, 나는, 이곳에서는 짐짓 그네들 말을 그대로 믿어 두기로 하고, 다만 그네들이 문제 해결을 물질 방면에만 두고, 정신 방면을 전혀 몰각한 사실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만원전차'에 대한 비난에 부수되어 승무원의 불친절이 동시에 논의되건만, 분명히 경전 당국자는 이 나중 문제는 중요시 않는 모양이다. 오직 전차 대수만 충분한 수량까지 늘릴 수 있다면, 자기네들에 대한 비난은 일소될 것같이 생각하고 있는 듯싶으나, 이는 인식의 부족함도 심한 자라 할밖에 없다. 오히려 문제는 승객들에 대한 승무원의 태도 개선에 좀더 중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네들의 구차스러운 변명을 그대로 용인하여, 현재 부민들이 받고 있는 불편은 그 책責이 오로지 물자 기근에 있고, 결코 그네들의 무성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자. 그러면 그래도 좋으니, 한층 승무원을 단속하여 정신 방면으로나마 승객들의 불편 불쾌를 최소한도로 덜어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끽긴喫緊[요긴]한 일이 아니겠느냐.
경전 승무원들 중의 대부분이 승객에 대하여 정녕 친절치 못함은 일반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봉급을 지불하는 경전 당국에만 충실하면 족한 듯이 생각하는 듯싶으나 이는 크게 옳지 않다. 어떻게 하면 승객들이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덜 느끼고, 각 목적지에 안전히 도달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하여 고려하는 일 없이, 그들은 오직 승차임 징수와 무효승차권 발견에만 전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 같다. 한편으로 가소로우며 또 한편으로 연민을 금키 어렵다.
구체적인 실례 수삼數三을 들어 본다면, 가령 사거리에 있어서, 교통 신호에만 충실하고 승객에게는 불친절한 승무원들이, 승객이 다 타기를 기다리지 않고 발차를 하여 혹 사고도 일으키고, 그것을 비난하면, "요 댐 정류장에서 내리면 그만 아니오" 등 불손한 말을 불쾌한 어조로 거리낌없이 방언放言하는 등, 또 도심지대니 무엇이니 하고 교활한 제도를 정하여 놓고, 이에 철저치 못한 승객에게 초과 임금[운임]을 강제로 징수하여 스스로 쾌하다 하는 등, 혹 십원 지폐라도 내어 놓는다면, 마치 그 승객이 무임 승차의 요행이라도 의도하고 그러는 듯싶게 백안시하는 등, 이 같은 예는 들자면 얼마든지 있거니와, 이는 직접 곤경을 당하는 승객은 물론이요, 오직 수수 방관할 뿐인 동승객들에게 여간한 불쾌와 격분을 도발하는 것이 아니다.
자리에 어둡지 않은 승객의 경우에 있어서도 요사이 같은 만원전차에 있어서는, 분명히 종로에서 내리려 하면서도 이정목二丁目까지 마지못하여 끌려 가는 수가 있다. 그곳에서 다시 한 정류장을 되돌아가야 할 것만도 불편하고 불쾌한 노릇인데, 시외선을부터의 승차권으로는 그곳까지 못 온다고 다시 일구一區의 차임을 강제로 청구당하는 등은 가히 언어도단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차의 대수를 늘린다는 것이 실제에 있어 어려운 노릇이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러면 그런대로 경전 당국은 좀더 다른 방법으로 성의를 표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승무원을 단속하여 승객에게 절대 친절 정녕케 하고, 우선 불합리한 이구제二區制를 철폐라도 한다면, 경전에 대한 일반의 여론은 훨씬 완화될 것을 나는 믿는다. (박태원, '만원전차',『박문』, 19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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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장
돈화문 앞에서 대화정[퇴계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침 열 한 시쯤되어 버스 속은 과히 붐비지 않았지만 앉을 자리는 없었다. 내가 서 있는 앞 자리에는 35,6세 가량의 부인네가 그 딸인 듯싶은 열 한두 살잽이 계집애와 일곱 여덟살잽이 사내를 데리고 앉아있었다. 옷차림이 세 식구가 모두 호화로워서 남매는 모두 훌륭한 양장을 하고 있었다. 계집애와 그 어머니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 추측한다면 세식구는 일가집 큰잔치에 참례하러 가는 것 같았다. 계집애는 연連해 "어머니, 오늘 그 애도 오겠지, 응."하고 제 또래 동무가 많이 모여서 즐겁게 하루동안 놀고 올 것을 생각하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 싶었다.
버스는 종로 3정목에 닿았다. 모두들 내리는데 웬 시골서 갓 올라온 듯한 늙수그레한 부인네가 문옆 쇠기둥을 잔뜩 붙들고 내리는 것도 아니고 엉거주춤하고 머리를 푹 숙인 채 서서 있었다. 이 늙은 여인이 물론 문을 아주 막고 선 것은 아니어서 비집고 내려 갈 수는 있지만 그러자니 불편하였다. 잔치참례 가는 세 식구가 비집고 막 버스에서 내려서자 여차장이 성이 발끈나서 얼굴이 빨개가지고 "이 늙은이는 어떡하는거야. 어서 얼른 내려요." 하고 늙은 여인의 팔을 붙들어 끌어내렸다. 끌려 내려오면서 "왁!" 하고 이 여인네 입에서는 먹은지 얼마 안되는 아침밥이 쏟아져 나왔다. 기다란 미역줄과 잘 씹지도 않은 밥알이 성장盛裝하고 잔치집 가는 계집애의 단발한 머리와 양복에 흠뻑 씌여졌다. 계집애가 제일 많이 피해를 입었고, 그 어머니, 동생도 군데군데 여말餘沫을 받고 있었다. 불의의 이런 벼락을 맞은 계집애는 펄펄 뛰면서 울고 있었고 그 어머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늙은 여인은 토한 뒤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에구 저걸 어쩌나" 하면서는 계집애한테 덤벼들어서 갈퀴 같은 손으로 허둥지둥 머리와 옷에 흠뻑 묻은 미역국밥을 쓰다듬어 내렸다. 그러나 이 쓸데없는 짓은 도리어 점점더 옷과 머리를 더럽힐 뿐이었다. 그럴수록 계집애는 점점더 뛰며 울고 보기에 딱한 정경이었다.
이런 비극을 저지르게한 원인이 물론 여차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버스나 전차의 여차장이 승객한테 불친절하게 구는 것은 지금 새삼스럽게 할 이야기도 아니지만 망상스러운 때가 많다. 늙수그레한 여인들이나 시골서 올라온 사람들을 몰아대고 휘뿌리는 것은 예사 중의 예사 중의 예사이고 우선 먼저 승객에게 대해서 말 하는 투가 뾰루퉁하게 성난 것이이서 공손하다든지 은근慇懃한 맛이 도무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여차장뿐만이 아니라 조선여자 전부가 외인外人에 대할 때의 예의(!)인 듯싶어서 여차장만 가지고 나무랄 것이 못되지만 아침 저녁으로 이런 예의와 대하게 되니 불쾌하기 짝이 없다.
정차할 정거장을 그냥 '오라잇'하고 지나쳐 가려고 할 때에 승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릴려고 하면 왜 이제 내리려고 하느냐고 호령하기, 승환표乘換票를 내릴 때에 달라고 그러면 아까 달래지 왜 지금 달래느냐고 쫑알대기, 쫑알대기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계집애들의 쫑알대는 것이란 참으로 집요무비執拗無比할 것이어서 선머슴 중학생들이 놀리고 갈라치면 그것을 가지고 갖은 몹쓸 욕을 다하고 쫑알대는 것이 한번은 안국정에서 부청까지 가느라고 어느 실없는 친구가 조밀한 관찰을 한 후에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재작년 겨울이든가 작년 이른 봄이든가 한참 전차승무원의 불친절이 문제되어 신문에서 떠들 때에 *전차과에서 자기네의 고충도 들어달라고 해서 신문사 사람과 모여서 이야기한 일이 있다. 그 때에 여차장 이야기가 나왔는데 전차과원 말이 그 전에는 남자소년을 차장으로 채용했었는데 치절치 못하다는 악평이 심해서 조선에서는 아직 어떨까 하면서 여차장을 채용하였더니 다소 그 악평이 없어진 것 같다고 하면서 5백년 동안 집 속에 가두어 두었던 것을 별안간 해방해 가지고 외인들과 접촉시키니 여러가지로 서투른 점이 많을 것이라고, 그러니 이런 점을 생각해서 여차장이 다소 불친절하더라도 그것이 악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무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너무 혹독하게 꾸짓지 말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여차장을 변명할려고만 해서 한 말이 아니라 대단히 의미 있는 말이어서 그때 인상이 깊었지만 딴은 생각하면 몇 천년 동안 방 속에 틀어박아 두어서 외간外間과 접촉이 없던 조선여인들의 후예를 별안간 외인과의 접촉이 방심尨甚한 전차나 버스의 차장으로 내놓고 보니 그 꼴밖에 못되는 것이 이지당연理之當然일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변명도 일리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니 동양의 부녀자는 대개 규방 속에서만 생활하여 왔건만 일본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여자도 조선여자 같이 무뚝뚝하고 비사교적, 비예의적이지는 않을 것같다. 몇년 전에 북경에 갔을 때 버스를 타고 길을 몰라서 옆에 앉은 여학생한테 시험으로 물어보니까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 뒤부터 길거리에서 여학생한테 길을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유창한 영어로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조선여학생 같으면 얼굴이 벌개져서 못들은 척하고 외면을 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킬킬대고 웃기만할텐데 의외로 중국여학생은 활발하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오해 없기를 위하여 여차장이 죄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개중介中에는 아주 친절명랑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조선여자가 통털어 무뚝뚝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는 아주 싹싹한 여자가 없지도 않다는 것을 말하여 두지만 그러나 대체로 볼 때에 그리고 딴 곳 여자들과 비해 볼 때에 확실히 친절하고 명랑한 점에 있어서 예의에 돈독하고 사교에 숙련한 점에 있어서 손색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차장의 경우로 볼지라도 그것이 물론 악의에서 나온 것이 아닐 것이나 거의 성격화하여 버려서 으례히 그런 투로 언동이 나와지는 것을 볼 때에 딱하기 짝이 없다.
지금도 그 정경이 눈에 선하지만 그때 여차장이 시골 늙은 여인이라고 경멸해서 방정맞게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성장盛裝한 소녀는 잔치집에 가서 동무들과 유쾌하게 하루를 즐기다 왔을 것이 아닌가. 4.20. (조용만, '여차장',『조광』, 1941.6.)
여차장과의 인터뷰
서대문 행의 전차를 되잡아 타고 종로를 돌아 북촌 한구석에 있는 버스걸 대기소에 다다랐다. 6, 7인이 스토브 근처에 모여 앉아 무엇인가 모르게 속삭이고 있다. 나는 그들의 심경을 타진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말 붙이려 하였으나 거리의 여학교인지라 쑥스럽게 가고오는 사람이 많은 그곳에서는 감히 말 붙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간 걸음이 걸음인지라 기어이 몇마디 거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한 틈을 타서 감독자에게 양해를 얻고 얼른 몇마디 묻기 시작하였다.
복잡다단한 여차장과 일문일답
나 : 날마나 이런 생활이 괴롭지 않습니까.
여차장: 참으로 괴롭습니다. 더욱이 하루에도 몇백 명의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보니 괴로운 것이야 더 이를 데 있겠습니까?
나 : 혹 전차나 버스에서 남자 손님들에게 불쾌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까.
여차장: 어째 없겠습니까. 하루에도 몇번 씩은 당합니다. 혹은 정신이 없도록 술이 잔뜩 취하여 표도 찍지 않고 히야가시[희롱]만 거는 싱거운 손님도 있고 혹은 함부로 반말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중학생 따위는 공연히 이런 소리 저런 소리로 사람을 못살게 구는 적도 있습니다.
나: 그럴 때는 한바탕 툭 쏴버리지요.
여차장: 공연히 잘못 들엇다가는 흠뻑 욕만 먹고 마는 적이 많습니다. 그저 못 듣는 척 하지요. 그 중에도 제일 심한 것이 중학생들입니다. 얼굴이 못 생겼다는지 궁뎅이 크다는지 또는 뻘건 넥타이 멋들었다는지 기가 막히는 적이 많지요.
나: 버스나 전차에서 제일 딱하게 되는 경우는 어떤 때입니까.
여차장: 딱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시골서 처음 온 손님 같은 이들이 어데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됩니까, 하고 한번 두번 자꾸 묻는 때가 딱하고 또는 병자나 늙은이 같은 이들이 얼른 내리지 않고 한참씩 꾸물거리는 때가 딱하지요.
나: 날마다 수많은 사람을 대하게 되는 것 만큼 별별 사람을 모다 구경하겠습니다그려.
여차장: 그렇지요. 사람구경만은 누구만 못하지 않게 합니다.
나: 모든 사람들에게 특이한 인상되든 것을 좀 이야기하여 보시지요.
여차장: 하두 많지만 대개 말하자면 값나가는 의복을 입고 모양내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는 부러운 생각도 있지만 또한 마음 한구석에는 온갖 불평이 떠오르는 것을 금치 못하는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헐벗고 가난에 쌓인 기색을 띄고 차 타는 손님을 바라볼 때면 겉잡을 수 없는 비애가 떠오름을 금치 못합니다.
나: 앞으로 결혼은 어떻게 하렵니까.
여차장: 그야 두고보아야 할 일이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고대광실高大廣室과 금의옥식錦衣玉食에 눈이 어두워 누구의 첩노릇까지도 즐겨서 하는 시절이지만은 저는 나와같이 손만 붙잡고 생활전선에서 빵을 구하여 가며 생生할만한 배우자를 택할까 합니다.
나: 연애편지 같은 것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여차장: 간혹 있지요. 신사손님은 비교적 적지만 학생 따위가 저녁 늣게 돌아갈 때면 뒤를 쫒아서 우리집 번지까지 알고 그냥 '아무 번지 버스걸 전'이라고 쓴 편지가 가끔 옵니다.
그러고 하나 우스운 것은 전차나 버스에서 말하기 부끄러운 우스운 일이 많습니다. 슬쩍 발등을 밟는다든가 또는 떼민다든가 몸을 나에게 기대고 시치미 뚝 때고 엉뚱하게 먼곳을 바라보는 체하는 사람이 많아요. 왜들 그러는지 모르지요.
나: 아마, 그것이 속일 수 업는 인간의 본능일런지 모르지요 (-하고 한번 건드렷다.)
여차장: 글쎄올시다(말 뿐으로 더 긴 설명이 없다.)
나는 실례많았다는 인사를 하고 안국동 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벌써 밤 7시, 걸음을 재촉하여 하숙에 돌아왔다.
[...]
그들은 여자에게 적당치 못한 '구루마'에 종사하는 고달픈 생활에 부대끼었음인가. 참으로 피곤에 못견디겠다는 표정이 흐르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 가운데를 업치락뒤치락 밀고당기는 그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남모르는 한숨을 지었을 것이다.
추위가 뼈 속까지 사무치는 때라든가 더워서 땀이 철철 흐르는 때에 그 괴로움이란 과연 어떻다 하였을까? 또는 여자를 한 농락물로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남자들의 무지스러운 히야가시를 받을 때 그 불쾌함이란 어떠하였을까? 오─ 대자대비 하옵신 대감이시여! 이 세상 이 땅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여차장 저들에게 고진감래의 앞날에 행복을 내려주게 하여 주옵소서, 하였노라. ('꼬·스톱하는 뻐스 여학교, 가로에 활약하는 104명의 여인군女人軍', 『삼천리』, 19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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