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에 구보 박태원이 1919년 3.1운동 직후 넓고 넓은 바닷가에... 로 시작되는 유명한 번안곡인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의 작사가로 소문이 나 있다. 그러나 당시 미래의 구보씨 박태원은 1919년에 보통학교(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나이이다. 문학도로서 일찌감치 소질을 보인 소년 박태원이 세상에 이름믈 선 보인 것은 육당 최남선이 발간한 <동명>이라는 잡지에 '달맞이'(1923)라는 산문을 통해서이다. 만약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을 소년 박태원이 작사했다고 한다면 '달맞이'보다 이 곡이 먼저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다. 제아무리 문학적 감수성이 출중한 소년이었다고 해도 보통학교 재학생이 '..클레멘타인'을 번안했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의 우리말 작사가는 누구일까? 공교롭게도 그 작사가 이름 역시 박태원이다. 한자로는 朴泰元으로 쓴다. 구보 박태원의 한자는 朴泰源이다. 두 사람은 한글 이름으로 동명이인. 해방 직후 구보 박태원이 '독립군행진곡'을 작사했었기에 이름만 보고 이런 유추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클레멘타인'을 작사한 박태원이 1921년에 요절하였으므로 이 번안곡이 3.1운동 직후에 만들어진 것은 사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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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원朴泰元
박태원朴泰元 1897년 6월27일-1921년 8월5일 대구 출생 성악가, 작곡가, 폐병으로 25세에 요절하였으나 음악적인 소질과 시대에 앞서려는 혁신성으로 양악수입 직후 향토악단에 큰 영향을 미침. '켄터키 옛집', '클레멘타인' 등을 번역, 다수의 작곡을 하였으나 전해져 오지 않음.
작곡가이자 성악가인 박태원은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뛰어난 음악적 소질과 시대에 앞서려는 혁신적인 감투정신으로 양악洋樂 수입 직후 향토악단에 끼친 공로가 크다. 그는 1897년 6월27일 대구에서 포목상 순조順祚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대남학교,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에 입학했으나 배울것이 없다고 중퇴하여 연희전문으로 옮겼다. 연희 전문재학시절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음악회에 독창자로 출연하였고, 졸업후 동경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수학중 폐렴으로 1학기만 마치고 귀국하여 고향인 대구에서 25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잠시 정신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는 탈모脫帽에 조선 두루마기를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서울 YMCA 회관에서 열린 음악회에서는 인기가수 윤심덕 이상의 호평을 받았고, 조선호텔에서 열린 선교회(宣敎會)의 초청을 받아 독창을 한 일도 있는 테너가수로 평소에 그레이Grey의 '파라다이스의 꿈'(A Dream of Paradise)>과 '저 멀리 티페러리'(It's Long Way to Tipperary)라는 군인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켄터키 옛집'(My Old Kentucky Home>과 '어찌 하려나 내 사랑아'(What shall you do, my love?), '클래멘타인'(Clementine) 등을 번역하였고, 작사도 한 '이별가', '내사랑' 등 여러편을 작곡하였으나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혼성합창대를 조직하여 헨델 작곡 '할렐루야' 외 수곡의 종교곡을 합창하는 등의 합창운동을 펼쳤는데 이는 단순한 음악활동을 넘어서 당시의 '남녀 7세 부동석'이라는 인습적 관념 타파의 혁신운동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강화받고 영향을 받은 음악가가 않았는데, 동생인 박태준朴泰俊, 현제명玄濟明, 김문보(金文輔)등이 그들이다. (내용 출처: 예술의 전당, 사진출처: 영남일보 2019.1.3. http://bitly.kr/rB0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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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방에 와 낯선 어린 학생들과 책상을 모으고 앉아보니 정신만은 얼마 새로워지는 것 같다. 더구나 원섭이와 형섭이는 생긴 것도 얼굴이 하얗고 몸매가 가냘픈데, 그 뾰족스럼한 입으로들은 잠시를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나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하면 하나가,
"듣기 싫여."
하고 쏘았고, 쏘은 쪽이 얼마 안 있다가 '이팔청춘'을 휘파람으로 내이면,
"건 누가 듣기 좋대나!"
하고 오금을 박았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1941, * 위 내용의 시간적 배경은 1923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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