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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남 - 의복미衣服美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3. 6. 16:09

나는 이 봄에 새로이 좋은 양복을 한 벌 맞추어 입겠습니다(푸른빛으로 할까 회색으로 할까, 그렇지 않으면 자줏빛으로 할까?).

스프링코트는 괜찮은 것이 집에 있으니까 그것은 그만두고 대신 청우晴雨 겸용의 레인코트를 썩 값나가는 놈으로 하나 사 입겠습니다(이것도 무슨 색으로 정할까?).


모자와 넥타이와 양화洋靴도 모두 한 십여 원씩 주고 아주 호화로운 것으로 사용하겠습니다(그러면 모양이 퍽 그럴듯하리라).


이발과 면도도 자주 하여 상쾌한 기분을 돕게 하고 연초도 될 수만 있으면 스리캐슬이나 웨스트민스터 같은 박래품을 피우며 손에는 고급 스틱을 들어 보겠습니다.


참 목욕도 해야겠습니다. 이때껏 삼사 일에 한 번씩 하던 것을 거의 매일 하다시피 해야 되겠습니다. 몸이 한결 부드럽고 날씬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차리고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쾌청한 아침에 턱하니 거리엘 나서면 따뜻하고 꽃 피고 미풍의 봄날이 전혀 나 하나만을 위해 된 세계인 양 그 얼마나 아름답고 만족한 것이겠습니까? 나의 입에서는 자금색 담배 연기가 설설 피어 나와 공기 속에 나부끼고 페이브먼트 위에 나의 단장과 발자취는 아마 퍽 멋들어진 음률을 내며 갈 것입니다.


물론 주머니 속에는 돈이 있지요. 적어도 십 원짜리 몇 장은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 동안만은 전차도 안 타고, 아니 택시도 안 타고 늘 걸어다닙니다. 


시계(타반)을 내어 보면 좀 이른 편이므로 본정통을 한 바퀴 휘돌아서 산보욕을 채우고 손님이 제일 적게 모이는 티룸으로 들어갑니다. 커피를 한잔 달게 마시며 갖가지 좋은 명곡의 레코드를 듣습니다(그렇습죠. 잠깐만이죠).


서울은 좁고 갈 데가 그리 많지는 못한 곳이오니 행여 꾸지람 마세요. 그러고는 창경원이나 한강가엘 행차하옵니다. 오전은 창경원이 좋고 오후에는 한강이 훌륭합니다. 그맘때쯤 해서는  초록빛으로 움트는 풀 싹 위에 아직 상춘객의 먼지가 떨어져 있지 않고, 이른 봄의 향기를 청신한 그대로 한껏 호흡할 수 있으며, 정오를 지난 수면에는 자애로운 햇빛이 따뜻하여 우리는 또한 결단코 상스럽지 않은 꿈을 그 위에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제 영화를 보았다면 오늘은 도서관으로, 어제 책을 읽었으면 오늘은 상설관으로, 이렇게 자리를 옮겨 하루를 지낼 수도 있습니다. 천춘淺春은 아름다운 계절이어도 얄밉게 바람이 세고 먼지가 많은 날이 며칠씩 두고 계속하는 수도 있는 기후인지라 그릴에 가서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거든 종일 도서나 영화로 해를 지워도 뭐 마음과 기분에 꺼림직한 적자赤字가 생길 까닭은 없습니다(내일도 날이고).


돌아오는 길에 책 두어 권과 브로마이드 몇 장을 삽니다. 기기 고타로木木高太郞의 『절로折蘆』는 탐정 소설 중에 제일 장정이 우아하며 화려하고, 진 바카와 에리나 포엘[Eleanor Powell] 반라상은 아름답고 에로틱하고 신비롭습니다(책은 책장에 끼워 두고 브로마이드는 아내 몰래 수집 상자에다 넣어 둡니다).


그러고는 이 유쾌한 때에 이제 술잔 아니 먹고 쓰겠습니까. 저녁이 되면 훗훗하던 공기가 잠깐 서늘해지는 판이니 우선 며칠 안 가서 작별하게 될 오뎅집이라는 데를 들러 '송죽매'를 두어 잔 한 다음 '월계관'이나 '백록'으로 건들하게 상기가 되도록 마십니다(카, 좋다).


문 밖으로 나오면 전등이 어느새 저 홀로 봄밤을 화장하고 있습니다. 술기운과 합하여 정말 꿈같은 정취입니다. 그때 응당 나와 흡사한 거리의 귀공자인 한 친밀한 벗과 상봉하여, 어찌 서로 만나기가 이다지 늦었느뇨, 하며 악수를 합니다. 보아하니 친구의 얼굴 역시 불그레하고 우리는 담박 어깨를 끼어 의기 상합하는 것입니다.


봄에는 천하의 여성들이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미인이 되는 법입니다. 카페도 좋고 바도 괜찮습니다(에레나, 가요코, 기누요, 사다코, 미도리).


나는 이제부터 단장과 책과 브로마이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절대 주의를 합니다. 그러나 입으로 떠드는 것은 정신을 차리지 않게도 하고 못 하게도 합니다. 유아독존의 문호文豪 청년이 되어 그 장광설이 짧은 봄밤에 끝이 없는 것입니다. 비루와 압생트와 위스키가 폭포처럼 나의 위낭 속에 쏟아지고(그러고는 이것은 피력하고 싶지 않지만 오전 두 시경에 이제 설렁탕을 한 그릇 다 집어치우고 귀가합니다).


▲ 조선은행 앞 야경



나는 이 봄에 새로이 좋은 양복을 한 벌 맞추어 입겠습니다(푸른빛으로 할까 회색으로 할까, 그렇지 않으면 자줏빛으로 할까?). 스프링코트는 괜찮은 것이 집에 있으니까 그것은 그만두고 대신 청우 겸용의 레인코트를 썩 값나가는 놈으로 하나 사 입겠습니다(이것도 무슨 색깔로 정할까?). (안회남, '의복미', 『조광』, 1938.3.)



▲ 박태원의 첫 창작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대한 안회남의 북리뷰 (동아일보, 1938.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