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 지는 아직도 초저녁이다. 음력 섣달 그믐이 내일 모레라서 그런지 그래도 이 동네[수하동:주]는 부촌이라 이집 저집에서 떡치는 소리가 들리고 거리가 질번질번한 것 같다. 떡도 안 치고 설이란 잊어버린 듯이 쓸쓸한 집 안에 있다가 나오니 딴 세상 같다. 덕기는 전차에 올라탔다. 오는 길로 병화에게 엽서라도 띄울까 하다가, 분잡통에 와도 변변히 늘고 이야기할 경황이 없을 것 같아 틈나면 가보지 하고 그대로 두었었다. 지금도 새문 밖으로 갈까, 경애를 찾아서 바커스로 갈까 망설이며 그대로 전차에 올라탄 것이다. 전차가 조선은행 앞을 오니 경성우편국이 차창 밖으로 내어다보인다. 불을 환히 켠 유리창 안에 사람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자 덕기는 속으로 내릴까말까하며 그대로 앉았다가 사람이 와짝 몰려들어오며 막 떠나려 할 제 뒤로 비집고 휙 내려버렸다.
우편국 옥상 시계를 치어다보니 아직 8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다. 덕기는 그대로 우편국으로 들어섰다. 창훈의 말이 자기 손으로 경성우편국에서 전보를 놓았다 하니 물어보면 알리라는 생각을 하였던 터에 지금이 앞을 지나니 생각이 다시 난 것이다. 우편국에서는 귀치않아 하였으나 조 한가한 때라 그런지 그래도 돈 부쳤다는 날짜에서 전후로 일주일간이나 경도로 띄운 전보라고는 덕희가 친 것밖에 없었다. (염상섭, 『삼대』, 1931)
▲ 조선은행(한국은행) 맞은편 경성우편국(현 서울중앙우체국 자리)
▲ 경성우편국 현관 위쪽의 벽시계
▲ 경성우편국(왼쪽) 진고개(본정통/혼마찌, 충무로) 입구
▲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 구관, 오른쪽)과 경성우편국. 뒷편에 남산 자락
▲ 무선전신(전보) 업무를 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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