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다. -무섭게 추운 도시의 밤이다. 어차피 추울 바에는 영하 40도의 된추위가 그립다. 털속에 파묻혀 가이 업는 눈덮힌 벌판으로 헤매고 싶은 것도 인텔리 여성의 변덕의 하나다.
아무리 추워도 하숙집 아랫목에 쪼그리고 앉어 있을 수 는 없다. 그것은 크나큰 손실이다. 이 밤의 향락을 잃어버리다니-.
밤거리로 나가거라. 그리하여 너의 젊은 날을 즐겁게 보내라.
무겁고 우울한 침통미沈痛味는 겨울밤의 감각이다. 불멸不滅의 세레나데다. 나는 이 밤을 좋아한다. 더구나 밤도 긴-겨울 깊은 밤을 좋아한다. 심야장深夜長이란 말이다.
백화점 쇼윈도의 황홀한 색채가 나를 유혹하고 울트라 모더니즘을 숭배하는 젊은 남녀의 야릇한 차림새가 내 호기심을 끈다.
거리로 나가거라. 입술을 빨갛게 물들이고 눈썹을 가늘게 그리고 윙크를 사방으로 보내며 레뷰-식으로 깡충깡충 걸어라. 단연히 값싼 모더니즘의 여왕이 될테니.
나는 이것이 좋은지 나쁜지 모른다. 하기는 아마 조선의 여성이 다 이모양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내 눈은 변으로 아름다운 것을 구하고 내 가슴은 허영과 향락으로 차 있지 않은가. 나는 도회의 딸이다. 아스팔트의 딸이다.
티룸- 이것의 탄생은 퍽이나 유쾌한 일이다. 활동사진에도 실증이난 내게 유일한 社交場이다. 일전에 어떤 잡지에 찻집이 너무 많아서 차만 마시며 사느냐고 하기는 했지만.
장곡천정長谷川町[소공동]으로 가다가 「낙랑파라」이집을 내가 제일 좋아한다.
쏙 들어서면 그 화려하고 경쾌한 맛이라니. 현대인의 미감美感을 만족시킨다. 어쨋든 얼마전 내가 시골에 다녀와서 처음으로 이 찻집에 갔을 때 얼마나 좋아했든지 같이 갔던 이가 요행 내 아저씨여서 연방 까불지 말라고 주의를 받은 일도 있다.
우선 빈 자리를 골라 앉았다. 커피를 가져 왔다. 가느다란 김이 몰몰난다. 훅 들이켰다. 그 향기로운 맛이란-그래 집에서 숭늉을 마시고 있어.
맞은 편 벽에 반나체半裡體의 여인초상화가 걸렸다. 보면 볼수록 눈을 옮길수 없게 매력이 잇다. 서양 배우의 「브로마이드」도 뒤적거려 본다.
사람이 상당히 많이 왔는데, 그래 하루종일 시달리다가 멧십분 동안이라도 이렇게 쉬어야지 꼬부라진 신경이 펴질 게다.
「레코드」가 돌아간다.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저 주는 그 음향-. 모두다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그 노래에 마음껏 취하는 복된 순간이여-.
찻심부름 하는 아이! 참 깜직하기도 하다. 외형보다 속이 너무 야무진 데 놀랐다. 나이를 물어보니 아홉 살이나 열살 밖에 안되어 보이는 군君이 열네살이란다.
흥. 이 직업이 이 아이의 성장을 방해했다. 누구나 이 아이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처럼 그는 직업적으로 별나게 되었다. 쪼라든 모양이다.
이 차한잔이 얼만지. 십전? 오십전? 멧번 왔어도 뭐 차값을 내가 내나. 여자에게서 찻갑을 받는 사람이 어디있담.
케잌을 포크로 쿡 찔러 먹었다. 갑자기 내가 몹시 올라가는 것 같다. 김치를 젓가락으로 먹는 것보다 한층 더 문화적임에 쾌감을 느낀다. 한 푼에 두 개짜리 값싼 인텔리, 그중에도 팔자에 없는 허영을 찻는 나같은 계집애- 그 머리속이란 대중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유쾌하고 즐거울 때면 세상은 차차로 물들여져 오는 것이다. 서울은 파리와 같이 생각되고 조그만 찻집도 세계에서 제일 큰 사교장같이 생각된다. 나는 그 가운데로 걷는 화형으로 자처하고-. 이리하여 화미華美와 향락욕亨樂慾의 절정에서 춤추는 것이다.
뽀이를 불러 신문을 청했다. 활동사진에 나오는 서양뽀이의 차림새다. 그리고 또 미남인데. 미남을 뽀이로 선택한 것도 직업적 수단인가.
맞은 편에 이떤 사람 하나가 앉아있다. 친구도 없이 혼자온 모양인데 찻잔은 벌써 비여 있는지가 오래고-. 네 활개를 여덟 팔자로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모양이 일백 이십분 이상인지 일백 팔십분 이상인지 저 모양을 계속한 모양인데 나로서는 그 길이를 알 길이 없다.
음악을 어느 만큼 아는지 몰라도 열심으로 듣고 있고 또 아주 흠씬 취한 것같다. 그의 탄력 많은 신경은 이 밤의 모든 것을 흡수할 때로 흡수해서 찻갑 20전이나 삼십전을 밑지지 않겠다는 생각인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라고 가야 별 것이 없다. 재미는커녕 을쓰년스러워 들어갈 수부터 없다. 조그만 셋방에 늙으신 어머님 어린애들이 뒤법석을 치고 게다가 그리 탐탁지 않은 고생주머니 아내가 있고... 김치 냄새가 후더분한 신선치 못한 방안의 공기와 합해서 야릇하게 불유쾌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 속에 화로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이런 것을 생각하면 그만 질색이 나서 발길이 돌아선 것이다. 찻집! 이것은 우리에게 현대의 감각을 자극시키는 매개장이 아니야. 이만한 데만 와도 훨씬 명랑한 기분을 맛보는 소득이 잇다.
그리하야 그 귀중한 돈 이십전이나 오십전을 아낌없이 내어 놓는 것이다. 만일 그 돈을 오늘 아침, 그의 아내에게 맡겼던들 늙은이 아이들 또 그 현숙한 아내 자기까지 하다 못해 고기국이나 생선 한토막이라도 얻어먹었을 것을-.
그러나 그런것까지 생각하면 남자가 궁해서 못쓰는 법이고 또 노-모던이 되어서 안되는 것이니 호주머니의 단 몃십전이라도 있거든 찻집으로 가거나 식당에라도 가서 「라이스 카레」 한 그릇이라도 먹으면 뱃속은 어떻든지 기분, 그 놈의 기분만은 백이십퍼센트로 유쾌하리라. 차 한잔 또 청했다. 나는 단연히 이 사교장의 여왕이나 된 것같은 자부심이 생긴다. 그리고 미칠듯이 기쁘다. 레코드가 돌아간다.
나는 언제까지나 심야파深夜派가 되고 언제까지나 이 다당茶黨 女人으로 행세할 것인가. (『별건곤』, 1934.1.)
▲ 이난영, "다방의 푸른 꿈"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939년 오케Okeh 레코드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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