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이윽고
태풍이 짓밟고 간 깨어진 메트로폴리스에
어린 태양이 병아리처럼
홰를 치며 일어날 게다
하룻밤 그 꿈을 건너다니던
수없는 놀램과 소름을 떨어버리고
이슬에 젖은 날개를 하늘로 펼 게다
탄탄한 대로가 희망처럼
저 머언 지평선에 뻗히면
우리도 사륜마차에 내일을 싣고
유량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면서
처음 맞는 새 길을 떠나갈 게다
밤인 까닭에 더욱 마음 달리는
저 머언 태양의 고향
끝없는 들 언덕 위에서
나는 데모스테네스보다도 더 수다스러울 게다
나는 거기서 채찍을 꺾어 버리고
망아지처럼 사랑하고 망아지처럼 뛰놀 게다
미움에 타는 일이 없을 나의 눈동자는
진주보다도 더 맑은 샛별
나는 내 속에 엎드린 산양山羊을 몰아내고
여우와 같이 깨끗하게
누이들과 친할 게다
나의 생활은 나의 장미
어디서 시작한 줄도
언제 끝날 줄도 모르는 나는
꺼질 줄이 없이 불타는 태양
대지의 뿌리에서 지열地熱을 마시고
떨치고 일어날 나는 불사조
예지의 날개를 등에 붙인 나의 날음은
태양처럼 우주를 덮을 게다
아름다운 행동에서 빛처럼 스스로
피어나는 법칙에 인도되어
나의 날음은 즐거운 궤도 위에
끝없이 달리는 쇠바퀼 게다
벗아
태양처럼 우리는 사나웁고
태양처럼 제 빛 속에 그늘을 감추고
태양처럼 슬픔을 삼켜 버리자
태양처럼 어둠을 사뤄 버리자
다음날
기상대의 마스트엔
구름조각 같은 흰 기폭이 휘날릴 게다
태풍경보해제颱風警報解除
쾌청快晴
저기압低氣壓은 저 머언
시베리아의 근방에 사라졌고
태평양太平洋의 연안沿岸서도
고기압은 흩어졌다
흐림도 소낙비도
폭풍도 장마도 지나갔고
내일도 모레도
날씨는 좋을 게다
시市의 게시판揭示板
시민은
우울과 질투와 분노와
끝없는 탄식과
원한의 장마에 곰팽이 낀
추근한 우비일랑 벗어버리고
날개와 같이 가벼운
태양의 옷을 갈아입어도 좋을 게다
(김기림,『기상도』, 1936)
반년 만에 상을 만난 지난 3월 스무날 밤, 도쿄 거리는 봄비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왔다는 상의 편지를 받고 나는 지난 겨울부터 몇 번인가 만나기를 기약했으나 종내 센다이를 떠나지 못하다가 이날이야 도쿄로 왔던 것이다. 상의 숙소는 구단九段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2층 골방이었다. 이 날개 돋친 시인과 더불어 도쿄 거리를 만보漫步하면 얼마나 유쾌하랴 하고 그리던 온갖 꿈과는 딴판으로, 상은 날개가 아주 부러져서 기거起居도 바로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있었다. 전등불에 가로 비친 그의 얼굴을 상아象牙보다도 더 창백하고 검은 수엽이 코밑과 턱에 참혹하게 무성하다.
[...]
이튿날 낮에 다시 찾아가서야 나는 그 방이 완전히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인 것을 알았다. 지난해 7월 그믐께다. 아침에 황금정 뒷골목 상의 신혼 보금자리를 찾았을 때도 방은 역시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캄캄한 방이었다. 그날 오후 조선일보사 3층 뒷방에서 벗이 애를 써 장정을 해준 졸저 『기상도』의 발송을 마치고 둘이서 창에 기대서서 갑자기 거리에 몰려오는 소낙비를 바라보는데, 창전窓前에 뱉는 상의 침에 빨간 피가 섞였었다. 평소부터도 상은 건강이라는 속된 관념은 완전히 초월한 듯이 보였다. 상의 앞에서 설 적마다 나는 아침이면 정말체조丁抹體操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늘 부끄러웠다. 무릇 현대적인 퇴폐에 대한 진실한 체험이 없는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늘 상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아끼는 까닭에 건강이라는 것을 늘 너무 천대하는 벗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김기림, '고故 이상의 추억', 19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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