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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 - 가로街路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4. 19. 10:08


이야기의 주인공을 거리로 끌고 나오면 그를 가장 현대적인 풍경 속에 산보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대체 어디로 그를 끌고 갈 것인가? 종이 위에 붓을 세우고 생각해 본다.

경성역과 그 앞 광장이 제법 현대 도시 같으나 아무런 용무 없이 그 곳을 거닐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시 경성역 앞에다 주인공을 세워 놓고 그로 하여금 사방을 한번 돌아보게 한다면 그의 눈에 비치는 풍경이 옹졸스럽기 짝이 없음을 느낄 것이다. 바른쪽으로 노량진행이 달리는 전차 위에 눈을 두고 잠깐만 따라가면 벌써 어느 시골 도청 소재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니 딱 마주 서서 그 앞을 즐비하였다는 소위 빌딩이란 것들을 바라보면 이건 또 치사하고 초라하기 한이 없다. 오똑한 크림색으로 무슨 생명회사가 하나 생기기는 했으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세브란스의 건물도 본래 이 곳에 있을 것이 못된다. 그러나 딱 질색할 곳은 의주통 가는 골목어귀다. 이 골목으로 땡땡땡 태고연한 종을 울리며 휘어도는 단칸방만한 전차란 어디 마포로나 가져갈 물건이다.

이러고 보니 가벼운 양장을 합시고 5월의 훈풍을 쏘이러 나선 아가씨의 비위만 상쾌할 뿐이지 도무지 유쾌할 것이 없다. 훌쩍 그를 데리고 한강으로 가서 잠시 동안을 유선流線이 줄기차게 뻗은 철교 위에 세웠다가 그 다음엔 가볍게 보트라도 태워서 돌려보내는 것이 외려 나을는지 모른다.

그래 생각 끝에 조선은행 앞을 잡아 본다.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작중 인물의 청춘 남녀는 이 곳을 여러 번 내왕하게 된다. 지드나 펄 벅의 책이나 읽히려 마루젠[환선서점]으로 보내야 할 게고, 코티나 맥스맥터 곽이나 사재도 백화점[미쓰코시 등]으로 끌고가야 할 테고, 커피잔이나 소다수잔을 빨린다든가 극장 파한 뒤에 페디니 뚜비비에니 콜다[영국 영화감독]니 하고 잔수작을 시키재도 한번은 이 광장을 통과시켜야 한다.

그러나 광고주廣告柱가 서고 새끼줄을 가끔 늘여 놓고 흰 팽키[페인트]루다 차도, 인도를 갈라 놓은 이 광장을 우리 사랑하는 되련님이라든가 아가씨를 거닐게 하기는 매우 위태하다. 전차에 앉힐라, 자동차를 피하랴, 자전거를 비키랴 여러 번 핸드백을 낀 채 뜀을 뛴다든가, 모자를 쥐고 허둥지둥해야만 한다. 연인끼리 담화를 시킬 경황은 물론 없고 간혹 혼자라고 하여도 도무지 유쾌한 보행이 될 수는 없다. 교통사고의 주인공이 되어 사회면의 한 귀퉁이 '우메구사'[신문의 여백을 메우기 위해 쓰는 짧은 기사]가 될 생각하고 상쾌해 할 청년 남녀는 대단 드물게다. 이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실로 돈냥이나 먹인 것들인 모양인데 서로 상의하고 짓지 못한 것이어서 그런지 조화라고 맛볼 수 없게 되어 있다. 저축은행은 금고나 수전노의 느낌을 주어 우리 상하기 쉬운 청년들의 마음을 우울에 잠기게 하고 다시 싱겁고 싯뻘건 우편국은 봄바람에 상기한 주정꾼 같아서 심히 어둡다. 레도크리무의 광고등은 역전으로 옮겼으면 좋겠고 묻은 백동전 같은 조선은행도 좀 더 보기 좋게 지을 수 있었을 걸 하고 가끔 건축가를 나무랜다.

그래 단연 태평통이다. 황금정에 있는 조선빌딩[반도호텔]을 부청 맞은 편 무슨 생명인가의 건축 기지에다 옮길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으나 지금 있는 곳이래도 제법이다. 부청 앞, 아스팔트를 건너서[광화문네거리를 바라며] 좌측통행을 한다.

때마침 5월의 맑은 토요일날 오후 한 시. 퇴근 시간이거나 또는 오피스의 점심 시간.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 곳까지 양쪽 페브먼트를 흐르고 있는 봉급생활자의 인파. 타이피스트의 간단한 양장. 빌미딩마다 사람을 토한다. 신문사가 세 개[조선, 동아, 경성(매일)], 부민관, 체신사업관, 토지개량, 또 무슨 회사, 회사, 우뚝 솟은 소방서[경성소방서]의 드높은 탑, 마주보는 것은 백악관[조선총독부], 오른손짝으로 가장 모던 풍의 건물은 체신 분관, 흰 벽돌에 네모진 커다란 유리창. 플라타너스는 너울너울 춤을 춘다.

이렇게 해서 나의 작중인물은 드디어 이 가운데 서게 된다. 혼자라도 좋고 한 쌍이라도 좋다. 현대적 긍지를 맛보며 이들은 5월의 페이브먼트를 양껏 즐긴다. 나도 만족한다. 그들은 비로소 그들이 현대인이라는 것, 도회인이라는 것을 몸과 마음에 느낄 것이다. (김남천, '가로街路', 조선일보, 1938.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