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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어머니는 송빈이와 은주더러 활동사진구경이나 갔다오라 하였다. 송빈이는 우미관으로 갈까 단성사로 갈까 하는 은주를 데리고 조선호텔로 온 것이다. 전에 윤수아저씨를 따라 한번 와본 적이 있는 '로즈 가든'으로 였다. 호텔 후원에는 여러가지 장미가 밭으로 피었는데, 오십전[30전?]만 내고 들어오면 꽃구경은 물론이요 이왕직 악대의 음악연주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주고 나중에는 활동사진으로 금강산 구경까지 하는 것이었다.

▲ 동아일보 1922.8.2.

송빈이는, 장미꽃과 장미꽃 사이를 은주와 가지런히 앉으며, 노서아 소설에 흔히 나오는 리라 꽃 그늘을 걷는 애인과 애인의 환상을 그려 볼 때, 금시 살이 찌듯 소담한 행복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같이 의자에 앉았고, 같이 음악을 듣고,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같이 금강산의 절경을 바라보고, 폭포가 나오면 같이 손뼉을 치고, 그러다가 송빈이 손은 은주의 손을 덥석 잡아 보았다. 보드러운 은주의 손도 잡히지만 않고 꼭 잡아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둘이서 종이 한겹에 간격도 없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은주도 송빈이도 정열에 타는 눈들은 폭포가 쏟아지는 금강산 사진도 오히려 갑갑한 듯, 가끔 먼데 하늘을 쳐다보았다. 굵은 별, 작은 별, 모두 이들의 장례를 축복해 주는듯 붉게 푸르게 반짝거렸다. 송빈이는 더욱 날을 것 같았다. 은주의 소원이기만 하다면 한번 나래를 쳐 별이라도 따 올 것 같았다.

둘이는 '로즈가든'에서 나서자 거기서 집[다옥정]에 오는 길은 너무나 가까와, 대한문 앞으로 와서, 덕수궁 담을 돌아서, 영성문 고개를 넘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지나, 다시 종로까지 와가지고 집으로 들어 왔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1941, * 위 내용의 시간적 배경은 1923년경 여름)

 


옛날昔日은 남별궁南別宮, 장미원薔薇園의 호언豪語

 

비단 나뿐이겠습니까만은 천운이 그랬든지 세태가 그랬든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팔자를 너무도 많이 고쳐서 세상에 얼굴을 번듯이 들고 무어라고 말씀하기가 매우 겸연쩍습니다. 그러나 소위 만물의 영장이란 사람들도 팔자 고치기를 개방귀 같이 여기는 세상에서 낸들 말 한마디 못 할 것이 무엇이랴는 생각으로 남이약 웃거나 말거나 한마디 지껄여 보겠습니다.

우선 내가 팔자를 고쳐온 경로로 말하면 애당초에는 태종대왕 둘째 공주 부마 평양부원군 조대림 댁으로 우리 동명이 지금은 장곡천정이지만은 소공동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 후 그 때 말로 임진왜란 때에 일병日兵이 경성을 점령하고 왜장 우키다 후데이에浮田秀家의 사령부로 일병이 물러나간 후에는 명장明將 이여송의 사령부가 되었고 그 뒤에는 이름을 남별궁南別宮이라 하고 타국에서 오는 사신[주로 중국 사신]들을 묵게 하였더랍니다. 그 후 고종 태황제太皇帝 시절에 경운궁─지금 이름으로 덕수궁을 지으신 후 민원을 들어 대조선국 대군주로 계시든 고종태황제계서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시는 천제天祭를 지내시기 위하여 원구단圓丘壇, 별칭으로 황단帝檀을 지으셨답니다. 
지금은 조선호텔인지 무엇인지를 짓노라고 헐어버린 까닭에 없어졌습니다마는 조고모하게 지으시고 거동을 하사 천제를 지내신 후 그 날부터 대한제국 태황제太皇帝가 되시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신 까닭에 합병 이전까지 백성들이 이 날을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이라고 봉축하는 등 그 때는 참말이지 비길데 없는 호강을 했습니다.

지금 함부로 팔각탑이라고 부르는 원구단은 북경에 있는 천단天檀을 본떠서 광무 2년에 새로 만든 것인데 두돈오푼짜리 백통돈을 쌓아 놓은 것이란 말까지 듣도록 돈을 물쓰듯 하면서 지은 것이랍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호강을 했겠습니까? 합병이 떡 되고 나니 내 꼴인들 오죽했겠습니까?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고 꼭 잠궈두어서 그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진저리가 납니다.

그 몹쓸 잡풀들은 온 마당에 그득하고 음산한 바람만 휘휘 불어대니 내 마음이 우죽이나 슬펐겠습니까? 그때 같아서는 점점 늙어가기는 하고 다시는 출세할 가망이 없더니 서력기원 1914년 10월에 조선호텔이 준공되고 앞 뒤뜰에 볼상없이 난잡하게 난 잡나무들을 다 뽑아버리고 장미꽃나무를 심기 시작하니 나는 또다시 출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분수기噴水器 앞에 서서 금붕어의 꼬리치는 모양을 재롱으로 보고 있는 우리 옛날 친구 홰나무와도 가끔 이야기합니다만은 참말 행복이란 물레바퀴같이 돌아다닌다는 말이 꼭 옳습디다그려!
장미는 심는 대로 곱게곱게 자라나서 지금에는 20여가지의 형형색색으로 된 장미꽃나무가 삼천여 주나 가까이 되어 내 몸은 겨울을 제除한 칠,팔삭 동안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맑은 향기도 좋거니와 호텔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며 외국인들의 노래소리까지 듣게 되니 이른바 내 이름이 장미원薔薇園입니다.

그리되니 나에게 취醉치 않을 사람이 없이 됨에 지금부터 4년 전[1921]에 비로소 일반손님들을 맞기 시작하여 해마다 6월10일부터 10월 그믐날까지 들어오시는 어구에서 삼십전 짜리 다과권茶果券을 사시면 누구에게든지 한 때에 아름다운 느낌과 기쁨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별별 못 볼 것 없이 다 보았습지요. 춤추는 사진[활동사진]은 일주일에 네번씩 눈이 시도록 보니 더 말할 것도없거니와 노래하는 나발족을 못 보았을까요? 코 높고 키 큰 양인, 키 작은 땅딸보 일인, 둥글눙글한 청인을 못 보았을까요? 인제 나는 저승에 갈지라도 이야기거리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요새는 또 '라디오'라든가 무선전화라든가 일본서 하는 소리를 여기서 듣는 기계를 사다놓고 시험을 한다고 야단들인대 눈치를 보니까 불원간 설치가 되나 봅니다. 
그러나 밤마다 가끔보는 젊은 남녀가 뜨거운 가슴을 움켜쥐고 사랑을 속삭이는 것이 어찌도 부럽든지! 나도 인간이 되었더라면……. (동아일보, 1925.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