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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빈이와 은주는 방학이 아직도 반도 더 남았으나 먼저 서울로 올라 왔다. 서울에는 마침 동경 유학생들의 강연회와 음악회가 있었다. 송빈이는 은주와 함께 강연회에 가 보았다. 낯익은 청년회관 대강당이나 이날은 어느때보다 장내 공기가 긴장되어 있었다. 연단 한편에는 정복 경관이 앉아 있었고 그 밑에는 형사들이 서너명이 나와서 연사들의 강연을 필기하고 있었다. 유학생들은 모두 전문 대학생들로서 그 서슬이 시퍼런 경계에 조금도 주눅이 들림이 없이 세련된 몸짓과 진정에 끓는 목청으로 하나같이 열변을 쏟았다.

'아! 동경 유학생들!'

송빈이는 부러웠다. 세상에 어려운 일, 청년들만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먼저 맡아 버린 것처럼 부러웠다.

이튿날 저녁, 그들의 음악회에도 송빈이와 은주는 함께 갔다.

남학생 하나가 피아노를 치는데 어쩌면 새끼손가락까지 보이지 않도록 자주 놀린다. 청중은, 청중이라기보다 관중은 요술을 보는 것처럼 반해 버려 아직도 연주 중임에 불구하고 발까지 구르며 박수를 했다. 한 여학생은 나와 노래를 부르는데 그 몸태부터 황홀하였다.

'히사시까미'보다는 더 간편하게 머리를 틀었고, 저고리 고름이 치마 고름처럼 긴 데다가, 치마 고름은 간데 없고 치마폭은 종아리가 반이나 드러나게 짧았다. 상큼한 다리를 약간 꼬는 듯이 몸을 틀면서 느린 곡조로 애수를 띄우고 부르는 노래는,

"깊은 데 숨은 장미화야

잘 있더냐.

너를 반기는

봉접이 나로고나……."

였다. 청중들은 잠 든듯이 달큼한  감상에 취해버렸다. 송빈이도 은주도 노래가 끝나기 바쁘게 박수를 재청까지 하고 프로그램을 들여다 보았다. '꾸우노의 세레나드'[Charles Gounod, 'Serenade']였다.

"깊은 데 숨은 장미화야 잘 있더냐……."

▲ 윤심덕

재청에 나와 다시 부르는 것을 은주는 눈으로 듣는듯 눈을 똑바로 뜨고 입속으로 따라 불러 보았다.

음악회에서 돌아오는 길에서도 은주는,

"깊은 데 숨은 장미화야 잘 있더냐……."

를 자꾸 곡조를 잊어 버리지 않으려 불러 보았다. 그리고,

"이름이 뭐드랬지?"

"윤심덕."

"은주두 인제 음악학교에 가면 되잖아."

"엄마가 보내줬음!"

"은주 맘 먹게 달렸지 뭐."

"남학굔 인제 오학년이 된대지?"

"아마 되나봐."

"그럼 나허구 결국 한해 졸업이지 뭐유?"

"한해 졸업하구 한해 같이 동경 가면 더 좋지 뭐!"

둘이는 동경꿈 하나가 새로 늘었다.

은주는 목소리도 맑았지만 곡조를 외는 재주도 있었다.

이튿날부터 은주는 '깊은 데 숨은 장미화야'를 제법 그 노래답게 불렀다. 은주에게서 여러번 들으니까 나중에는 송빈이까지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은주와 송빈이뿐이 아니었다. 골목마다 노래로 하모니카로 '깊은 데 숨은 장미화야'는 날로 퍼지었다. 신여성들의 머리도 치마도 그 여학생 식이 이내 퍼지었고, 이 가을부터 청년회관 대강당에는 '음악회'란 것이 자주 열리기 시작하였다.

성악이나 기악이나 제법 전문한 사람은 별로 없었고, 예배당 찬양원들이 중간악사들로 독창에, 합창에, 피아노에, 바이올린은 물론 코넷, 플룻, 하모니카, 요꼬후에[일본악기]까지 등장하였다. 곡조는 모두 단순한 것들로 순서는 삼십가지가 으례 넘었다. 노래는 가사가 교훈적인 것이 아니면 유모어가 있어야 환영을 받아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나의 소망이 무엇인가…….'

며,

'어떤집 식구 세사람 모두 다 반벙어리…….'

이런 것이 이런 음악회에서 퍼져나왔고, 학생들이 있는 집 들창에서는 으례 위의 '깊은데 숨은 장미화야'와 함께 이 노래들이 하모니카로 요꼬후에로 휘파람으로 울려 나왔다. 모두 기쁘고 모두 희망에 차고 그리고 한편 모두 다감스러웠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던 칠세 이상의 남녀들이 함게 고향을 떠나 천리길을 같이 오고, 함께 찬양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함께 강연을 다니고, 함께 취미를 이야기하고, 함께 이상을 토론하고, 그러는 중에 끊을 수 없는 애착이 서로 생기는 사람들도 없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남자로는, 중학교에 올 나이와 가세라면 거의 전부가 아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내 있는 남자들과 처녀들과 거기는 으례 진작부터 비극의 운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슬플 뿐만 아니라 가정에 죄인이 되고, 사회에 죄인이 되어야 했다. 한낱 사랑이라 한낱 연애라 하기보다는 먼저 부모님과가정에 전속되었던 자기를 찾아내는 새인생 운동이라, 한번 자아의 눈이 떠진 이상 여간 벌측으로서 그 눈을 스스로 찔러버리기는 어려웠다. 

아들과 아버지와 제자와 선생과 강경한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연애는 죄악이다!"

하면,

"연애는 신성하다!"

하고 맞서게 되었다. 신문과 잡지에서도 한편으로는 신사상을 고취시키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당연히 드러날 풍기 문제에 있어선 모른척하고, 부로父老들의 편이 되어 가혹한 필주筆誅를 내리었다. 원동[원서동]의 한 여학생이 자켓을 입고 다닌다고, '원동 자켓'이란 이름을 신문 잡지에서 떠들었고, 한 신여성이 단발을 하였다고 신문기자가 방문기를 쓰도록 물론이 자자하였다.

"딸자식 고등학교까지 보낼건 아니야!"

"연애니, 실연이니, 이혼이니, 자살이니, 집안 망신은 계집애들이 다 시켜!"

딸자식에 한해서 교육열은 한풀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얘? 너이 큰아버지께서 인전 널 듸려 앉치라구 그러신다"

"싫구랴!"

하고 은주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1941)

 

*위 내용의 주시간적 배경은 1921년 7~8월로 보임. 기록에 의하면 윤심덕을 포함한 동경유학생 모임인 '조선유학생동우회'는 1921년 7-8월 동안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하였으며 경성에서는 '단성사'(7월28일~7월31일)에서만 공연한 기록이 있음. 순회공연 기사 중에 '장미화'(구노의 '세레나데')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음. 동우회 일행은 전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1921년 8월 18일 경성으로 돌아와 8월 19일 오후 1시에 종로2가 중앙기독청년회관(YMCA)에서 해단식을 하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음. 이때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행사를 했다면 주인공이 윤심덕의 공연을 보았을 수 있음. 당시 신문기사들을 보면 7월 말(25일 전후)에서 9월 초(5일 전후)까지 여름방학 기간이었으므로 8월 19일은 방학이 절반 정도 지난 시점임. 신문 기록에 따른 윤심덕의 중앙기독청년회관 공연은 1923년 10월과 1924년 10월이며, 특히 후자의 경우는 이태준의 소설에서 언급한 '강연회 및 공연회'가  열려 윤심덕이 참여한 기록이 있는데, 이 행사의 주최는 여자기독청년회로 동경유학생단체와는 무관함. (주)

 

▲ Selma Kurz, 'Sérénade' (Gounod 작곡, Polydor폴리돌 1923년 일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