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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관에서는 무슨 소위  대활극을 하는지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가 들리고 청년회관 이층에서는 알굴리기를 하는지 쾌활하게 왔다갔다하는 청년들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이광수, 『무정』,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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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이란 말에 은주는 먼저 나서며 앞을 섰다. 배다리로 나와 광교 큰길을 건너 샛길로 관철동에 들어서니 벌써 군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무슨 곡조인지 몰라도 잰 걸음을 걷는데 신이나게 맞는다. 가까이 가보니 전등을 구슬 꿰듯 해 여러 줄을 느리었고, 이층 노대路臺에서는 눈이 불거진 사람, 볼이 불룩한 사람, 배가 내민 사람들이 새로 닦은 놋그릇 같은 악기를 메고, 들고, 흥겨운 몸짓을 하며 불고 있다.. 

그 노대 밑에는 큰 간판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첫머리엔 '명금대회名金大會'[영화 '명금' 상영]라 쓰여 있었고, 달리는 말 위에서 소나무로 뛰어 오르는 그림, 큰 다리 위에서 그 밑으로 달아나는 기차로 내려 뛰는 그림, 천야 만야한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자동자전거를 탄채 건너 뛰는 그림,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는 사람들로 마당이 그득 찼다.
윤수아저씨는 이층표를 샀다. 은주는 자주 와 보는 데인 듯 이층 길이 어수선한 데도 익숙하게 곬을 찾아 먼저 뛰어가 앞줄에 자리를 맡았다. 은주가 먼저 앉고, 윤수아저씨가 앉고, 그 담에 송빈이가 앉았다. 앉아서 보니 청년회관 대강당은 어림도 없게 넓고 그런 아래웃층이 별로 남는 자리가 없었다. 
이윽고 밖에서 나던 군악소리가 무대 뒤에서 나더니 그 군악에 맞춰 변사가 나타났다. 변사가 무대 한가운데 머물러 관중을 향해 예를 하자 군악소리는 뚝 끊쳤다. '오늘 저녁에도 우미관을 사랑하사 이처럼 다수 왕림……' 어쩌고 한참이나, 다음 주일에는 무엇을 상연하겠으니 그때도 많이 와 달라는 말까지 늘어 놓고야 다시 군악에 발을 맞춰 들어갔다. 이내 불이 꺼지며 사진이 나타나는데 모두가 서양사람들이다. 송빈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은주와 윤수아저씨는 어느게 '기지꾸레'[Kitty  Gray/Grace Cunard 각본.주연]니 어느게 '후레디리꾸 백작'[Count Frederick/Francis Ford 감독.주연]이니 하고, 알아맞추며 지껄였다. 영사막 옆에서 아까의 변사가 다시 나서서 목청을 높여 어떤 일정한 장단이 나게 떠들어댔으나, 송빈이는 한마디도 자세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 재미있어, 하는 은주를 가끔 어스름한 속에서 엿보았다. (위 내용의 시간적 배경은 1920년경)

[...]

송빈이는 쓴 침을 돌멩이 삼키듯 몇번 목이 메게 삼키는데, 행길쪽 들창 창살이 갑자기 드르륵 긁힌다. 송빈이는 물론 형섭이도 깜짝 놀랐다.

그러나 형섭이는,

"승겁긴!"

하고, 옆에서 보는 것처럼 입을 빼죽할 뿐 '누구냐' 소리는 치지 않는다.

"누굴까?"

송빈이는 형섭이에게 물었다.

"그런 사람 있어요, 승거운." [유팔진]

"누군데?"

"백작."

"백작이라니?"

"왜 명금名金에 사치오 백작이니 후레데리꾸 백작이니 나오지 않아요?"

"그래?"

"명금이래문 오금을 못쓰구 명금 대회 땐 줄곧 우미관 가 살어요. 그래 우리들이 사치오 백작이라구 했다 후레데리꾸 백작이라 했다 인전 그냥 백작 백작하는 형님이 하나 있어요."

"백작형님! 그런데 창살은 왜 긁구 달어나?"

"그러게 승겁죠."

"백작으룬 좀 점잖이 못하군!"

하고, 송빈이도 잠들고 말았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1941) * 시간적 배경은 1923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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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 년 전의 오월

서울 수전동[水典洞, 인사동 일부] 골목 안에 모여 노는 아이들 틈에서 열세 살 먹은 은식이는 가장 자랑스러웠다.

철없는 부러움을 가지고 대하는 아이들에게 향하여, 자기가 입은 이백일혼댓 냥짜리 양복을 한껏 뽐낼 수 있었던 은식이였던 까닭이다.

더욱이 우미관에서 보고 온 명금名金 놀이를 흉내내어 놀 때에 은식이는 언제든 -후레데리꾸 백작[Count Frederick]이 될 수 있었다.

까닭에, 그가 골목 안에서 첫손 꼽아 어여쁜 계집아이 순남이가 분장한 기지꾸레[Kitty Gray]와 손을 맞잡고 싸치오 백작[Count Sacchio]의 무리를 피하여 옆 골목으로 몸을 숨길 때, 로로[Roleau]의 소임을 맡은 만돌이는 입술 위에까지 흘러내린 시퍼런 코를 훌쩍 들이마실 것도 잊고, 그 어린 양복쟁이의 멋진 뒷모양을 한참이나 멀거니 바라보기조차 하였다. (박태원, '오월의 훈풍',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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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열 해 전...
조선사람 즉 XX이라고 할 만큼 14,320방리方里 전토全土에는 열정적 OO 기분이 팽창하여 있던 시절입니다. [3.1운동 직후의 조선민중의 분위기를 말하는 듯]
그도 역시 그 조류에 따라가는 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라고는 하였으나 그것만 가지고는 누구인지 모를 것이요, 본명을 쓰자니 좀 거리끼는 일이 있고, 그러면 그의 특징 하나를 잡아서 임시로 이름을 지읍시다. 그의 특증이 많이 있습니다. 
[...]
가장 눈에 띄는 그의 특징은 저무나 새나 나막신을 신고 양산을 들고 단이는 것임니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큼직한 키에 굽 놉흔 나막신을 끌고 감장 바랑이 횟그름하게 바란 양산을 들고 멀그럭 덜그럭 이동을 하는 양은 奇物이라면 확실히 滿點짜리의 奇物이엿슴니다. 우리는 편의상 압흐로 그의 이름을 全(공교하게도 그의 姓이 全가임니다.)나막신이라고 불으기로 합시다.
[...]

그렁저렁 우미관優美館에서 연속사진 '명금名金'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전全나막신은 표 받는 친구의 대대적 환영리에 아랫층 맨 뒤 자리에 들어서는 특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이 꺼지며 스크린에서 로로[Roleau/Eddie Polo 분]가 뛰고 치고 키티 그레이[Kitty Gray]가 말을 타고 달리고 하는데 전全나막신의 앞에서는 어느 친구가 모자를 쓴 채 서 있기 때문에 적지 아니한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전全나막신은 앞에 있는 '모자' 친구의 어깨를 턱 치며 "이 친구 모자 좀 벗읍시다" 하였습니다. 모자 친구는 남이 지금 한참 재미가 나게 구경을 하는데 웬 놈이 더구나 어깨를 쳐가며 이 지랄인가 하고 골난 김에 모자를 벗지 아니하고 버티었습니다. 
전全나막신은 속으로 '흥 요놈 보아라' 하는 생각으로 다시 한 번 모자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이 친구 모자 좀 벗어요"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자 친구는 못 들은 채 하고 있습니다.
전全나막신은 모자 친구의 귀에다 바싹 입을 대고 남이 보기에는 아주 정다운 친구끼리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소근소근 "이 자식아 왜 모자를 좀 벗으라니까 아니 벗어?" 하였습니다. 이 말에 모자 친구는 "이게 어느 자식이 이래?!"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지금은 옛날에 낫이 익은 사람을 물색하며 종로네거리로 돌아 다니면서  "10전만 줍시요, 나리님. 옛날 서상호徐相昊를 이렇게 괄세하십니까?" 하며 아편에 인이 몰려 거의 죽게 된 그 서상호─ 그래도 옛날의 그 때 당시면 '명금名金'과 한가지로 영화계의 거물인 그 서상호의 해설에 집중되었던 청중들은 방해되는 소리를 질르는 자를 향하여 
"시끄럽다─"
"끌어내라"
"이 자식아"
"집어 치워라"
하는 욕이 빗발치듯 하였습니다. 모자 친구는 다시는 꿀꺽 소리도 못하고 그러나 모자는 종시 벗지 아니하였습니다.  
전全나막신은 다시 모자 친구의 귀에다 입을 대고 소곤소곤 "이 자식야 왜 아니 벗고 괜히 소리만 질러? 소리만 질르다가 꼴 조-타! 이 자식아 . 그래도 아니 벗을테야? 뭔 네 어미 뱃 속에서부터 쓰고 나온 모자냐?"하고 자꾸만 골을 올려주었습니다.
모자 친구는 어두운데 아무리 소리를 쳐야 자기만 욕을 먹을 줄을 알고 꼭 참았다가 불이 켜진 뒤에야 뒤를 돌아보며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고) "어느 놈이 남의 귀에다 대고 욕을 했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전全나막신은 모른체 하고 시치미를 뚝 떼고 서서 있기만 하였습니다. 관중들이 보기에는 모자 친구가 아무리 하여도 저 혼자만 떠드는 미친 놈 같았습니다.
그러자 또 불이 꺼지고 사진이 시작되었습니다. 全나막신은 또 모자 친구의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욕을 하였습니다. 모자 친구는 참어 가다가 못 견디겠으면 한마디씩 소리를 질렀으나 그 효과로는 관중으로부터 욕이 오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다시 불이 켜 졌을 때에 모자 친구는 이를 갈며 적을 찾느라고 야료를 놓았으나, 전全나막신은 여전히 시치미를 뚝 떼고 있으므로 그는 이제야말로 혼자서만 떠드는 정말 미친놈이 되엿슴니다. 군중은 몰아내라고 소리를 지르고 순사는 와서 모자 친구를 등을 밀어 내였습니다. 이 꼴을 본 전全나막신을 완이이소莞爾而笑할 따름이었습니다. (백기白夔, '넌센스인간', 『삼천리』, 19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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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백작은 원래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 어떠한 고서 중에서 '구레쓰호헨국 ○○ 곳에 막대한 금이 파묻혀 있는지라... 이곳을 알고자 한다면 라틴말을 새긴 금화를 찾으라'고 하였으므로 자기도 찾아 보고 로로에게도 부탁하였더니 그간 프레데릭 백작이 깨진 조각 하나를 발견하였더라. 그러나 다만 반쪽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다시 로로는 키티[키티 그레이]의 것을 훔쳐 기선이 상륙하자 즉시 프레데릭 백작은 희열이 가득한 로로를 보고 첫번째 인사가 명금을 찾았느냐 물으니 기꺼움에 마음이 뜬 로로는 입이 함박 같이 벌어져서, "영감 정성이 지극하면 지성이 감천이올시다. 영감을 위하여 삼년간 쌓은 고생은 오늘에야 열매를 이루었습니다" 하고 새빨간 거짓 명금[로로가 명금을 찾아 자신의 뒤를 쫒고 있는 것을 알게된 키티 그레이가 가짜 명금을 만들어 일부러 흘린 것]을 내어 놓았더라. (송완식 역, 『(사진소설대활극) 명금』, 1924, *그레이스 큐나드 Grace Cunard 원작 시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