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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는 전차로 한강으로 나왔다. 철교에서 한가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늘어서 물구경들을 하였다. 그들은 은주와 송빈이를 유심히 보는 것이 은주도 송빈이도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들이 없는 데로 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이들이 걸음을 멈춘 데였다. 난간에 무슨 광고처럼 써 붙인 것이 있다. '조또 맛데구다사이(잠간 참아주시오)'라고 크게 썼고 그 밑에는 '무슨 사정이든지 한강 파출소로 오시면 곤난이 펴시도록 친절히 상의해드리겠습니다. 용산 경찰서'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뭘가?"

송빈이는 알 수가 없었다.

"오빤 것두 모르네!"

"뭘 맛데구다사이야?"

"죽는걸."

"죽는거?"

"여기서 사람이 자꾸 빠져죽으니까 그럭헌거래."

"죽지 말라구? 벨!"

"저거 보구 정말 죽으러 왔다 도루 가는 사람 있을가?"

"글쎄……."

"왜 자살들 허까?"

"비관이 되면 허는거지 뭐."

"왜 비관을 해?"

"비관두 허구퍼 허나?"

"그럼?"

"비관허게 되니까 허지."

"어떻게?"

하는데, 남학생 한 떼가 가까이 온다. 은주와 송빈이는 무슨 죄나 진 것처럼 얼굴이 홧홧해 강물 쪽으로 돌아 섰다.

'이런! 꽃이 다 시들었네!"

"물에 당그지."

"에라 너나 투신해라!"

하고, 은주는 시들은 들백합을 강에 내려던졌다. 그때 학생패는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하는 이수일과 심순애 양인이로다." [장한몽가]

를 부르며 지났다.

"어떻게 비관이 되느냐구?"

"응."

하고, 은주는 수건을 내어 이마를 닦는다.

"이수일이처럼 됨 비관이 될거 아니야?" 

 

(이태준, 『사상의 월야』, 1941, * 위 내용의 시간적 배경은 1922년경 여름)

 

▲ 동아일보, 1922년 6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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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같이 아름다운 당신이여! 나는 당신이 보고 싶어요. 당신을 보지 못하면 나는 이 세상에 살 수 없어요. 당신은 나의 생명의 신神이여요! 당신은 나를 죽이던지, 살리던지 나의 생명은 오직 당신에게 맡기나이다. 한강철교에서 떨어지리까? 청량리 송림에다 목을 매리까? 아니지요! 당신같이 사랑이 많으신 이는 결코 그러실 리가 없겠지요! (이기영, '오빠의 비밀편지',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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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남까지 끌어 넣어?"
종엽이는 한참 만에 종알종알한다. 남이 원영이 말을 눈치만 뵈어도 기고만장을 해서 싸우려고 덤비는 종엽이었다. 공연한 소문만 나는 것이 분하고 창피도 하지만, 같은 신문사 속에서 이번에는 원영이와 어떻다─ 하는 말은 차마 듣기 싫은 때문도 있는 것이었다. 
"끌어 넣긴 무얼 끌어 넣었단 말요. 성인이라야 능지성인이거든! 종엽 씨가 미쳤기에 남더러 미쳤다는 말이 아니냐는 거지."
"응, 그래 정신병 의사는 모두 미쳤더라."
하고 종엽이는 엇먹다가 혼잣말처럼,
"좀더 미치게 해주쟀더니 고만둬라"
하고 상긋한다.
"무언데……?"
"무언 알아 무얼 해! 들으면 정말 동팔호로 가거나……."
"동팔호로 가거나…… 또 어디로 갈 말인데?"
"글쎄 거기 안 가면 어디로 갈꾸? 한강철교로 갈지도 모르지."
하고 종엽이는 혼자 웃으나, 봉익이는 눈이 뚱그래지며 궁금증이 나서 무슨 이야기냐고 조른다.
"미쳐나거나 빠져 죽을 일이 무어람?"
봉익이는 마담이 자기 흉을 본 거나 아닌 하여, 내심으로는 절망을 느끼면서 종엽이 눈치만 보고 앉았다. 
"죽는 것도 여러 가지거든."
"여러 가지겠지. 생활난으로 죽고, 실연을 해도 죽고, 병들어도 죽고!"
"병들어서 한강 가서 일차하는 사람도 있던가 뵈."
"그럼, 정사도 하고……."
"흥, 시인인걸!"
하고 종엽이는 웃어 버리다가,
"그래 정사하겠소?"
하고 다진다. 
"하게 되면 하지, 무어 알뜰한 세상이라구……." (염상섭, 『무화과』,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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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피로한 자여! 겨울 황혼의 '한강'을 찾지 말라. 죽음과 같이 냉혹한 얼음장은 이 강을 덮고, 모양 없는 산과 벌에 잎 떨어진 나뭇가지도 쓸쓸히, 겨울의 열 없는 태양은 검붉게 녹슬어 가는 철교 위를 넘지 않는가?……
나는 그 곳에 인생의 마지막──그러나 '인생의 마지막'으로는 당치않은 어수선하고 살풍경한 풍경을 발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박태원, '피로',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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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까, 어디 가서 죽을까, 혜련은 마치 어디 구경갈 대나 고르는 모양으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생각하였다. 혜련의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죽는 방법이 떠나왔다. 한강철교, 철로길, 쥐잡는 약, 목맨다는 것 등등. 그러나 혜련은 그 중에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아니하였다.  (이광수, '애욕의 피안',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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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서산에 지기 전에 나는 이삼 일 내로는 반드시 썩기 시작해야 할 한 개 '사체死體'가 되어야만 하겠는데, 도리는?

도리는 막연하다. 나는 십 년 긴─ 세월을 두고 세수할 때마다 자살을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나는 결심하는 방법도 결행하는 방법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다.

나는 온갖 유행약을 암송하여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인도교, 변전소, 화신상회 옥상, 경원선 이런 것들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렇다고─ 정말 이 온갖 명사의 나열은 가소롭다─ 아직 웃을 수는 없다. (이상李箱, '실화失花', 유고)

 

**

이렇게 차려 놓은 경상 앞에 가서 경쟁이는 자못 엄숙하게 북을 차고 앉아 경을 읽는데…… 북을 얕게 동당동당 동당동당 울리면서 청도 북대로 고저와 박자를 맞추어 나직하고 느릿느릿,

"해―동조―선 전라―북도 군산부―산상― 정 권씨―댁……."

무엇이 어쩌구저쩌구 한바탕 주욱 외우다가는, 목소리를 일단 위엄 있이,

"오방신자앙―"

처억 불러 놓고서 이어, 북도 빨리, 청도 빨리 몰아 들입다 귀신을 불러 대는데, 아마 세상 귀신이란 귀신은 있는 대로 죄다 나오는 모양이다. 게다가 계급도 가지각색이요, 개명을 톡톡히 한 경쟁이든지, 심지어 '한강철교 연애하다가 빠져 죽은 귀신'까지 불러 댄다.

 

[...]

"와 이리 수선을 피우노?…… 남 안 가는 여학생 장가나 가길래 이라제?"

행화는 익살맞게 그대로 까딱 않고 앉아서 태수한테 눈을 흘긴다.

"하하하하, 그래그래, 내가 요새 대단히 유쾌해!"

"참 볼 수 없다!…… 그 잘난 제미할 여학생 장가로 못 갈까 봐서 코가 쉰댓 자나 빠져 갖고 댕길 때는 언제고, 저리 좋아서 야단스레 굴 때는 언제꼬!"

"하 이 사람, 그러잖겠나? 평생 소원을 이뤘으니…… 그렇지만 염려 말게…… 신정이 좋기루 구정이야 잊을 리가 있겠나?"

"아이갸! 내 차 타고 서울로 가서 한강 철교에 자살로 할라 캤더니, 그럼 그 말만 꼬옥 믿고 그만두오, 예?"

"아무렴, 그렇구말구…… 다아 염려 말래두 그래!"

시방 행화는 농담으로 농담을 하고 있지만, 태수는 진정을 농담으로 하고 있다. 그는 초봉이와 약혼을 한 그날부터는 근심과 불안을 요새 하늘처럼 말갛게 싹싹 씻어 버렸다.  (채만식, 『탁류,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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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선인은 틀림없이 음모가형이구나 하고 나는 단정지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하혁명운동을 하면서 살아온 이 망명객은 수수하고 침착하며 자제력은 있었지만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야위고 감정을 잘 드러내는 저 얼굴에는 감옥의 창백함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의 지혜롭고 반짝이는 눈동자는 
정직하고 사리가 분명한 것 같아서 나는 용기를 냈다.
"나는 작년 여름의 대부분을 조선과 만주에서 보냈답니다." 
하고 나는 과감히 말을 꺼냈다.
"금강산도 구경하고 싶었고 조선을 알고 싶기도 해서 조선에 갔던 거지요. 그다지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등산은 마음껏 했어요. 금강산에 올라갔다가 최고봉 정상에서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지독한 태풍을 만나기도 했지요. 거의 모든 다리와 길과 쇠줄이 파괴되어 있더군요. 곳곳에서 급류를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하지만 조선인 안내자가 우리를 무사히 산 아래까지 데려다 주었지요."
"그렇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큰 물난리가 났었습니다."
"나는 그 후 서울의 어느 다리 위에서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어요. 소, 돼지, 닭, 집들이 흙탕물 속으로 마구 떠내려가고 있더군요."
"그렇지만 조선의 시냇물이 평상시에는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아십니까?"
이 질문에는 향수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중국에서는 맑은 강물이나 시냇물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조선의 강에서 투신자살 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답니다. 중국의 강들은 그러기에는 너무 더럽지요."
"당신네 조선인들도 일본사람만큼이나 자살을 좋아하는 모양이지요?"
"자살은 식민지 민중이 요구할 수 있는 불과 몇 안 되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살마저도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서울의 그 다리 위에는 벌써 오래 전에 일본 놈들이 푯말을 세워 두었지요. 거기에는 '5분만 기다리시오.'라고 씌어 있답니다. 굶주린 아기 엄마들이 종종 자기 자식을 강물에 집어던지고는 자신도 뛰어든답니다. 그래서 전담 경찰이 파견되었지요. 그들은 혼자 그곳에 와서 심각한 얼굴로 강물을 내려다보는 사람을 감시합니다. 이것이 우리 조선사람에 대해 베푸는 훌륭한 친절이라고 그놈들은 생각합니다. 안동 부근에 있는 압록강 또한 자살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지요. 자살하지 않으려면 강을 건너서 망명하는 길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김산·님 웨일즈, 『아리랑』, 1941)

 


'자살' 명소로 유명했던 한강철교는 한강인도교

 

철도가 다니는 다리라는 뜻의 한강철교와 사람이 다니는 다리라는 뜻의 한강인도교는 별개의 다리이나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구분하지 않고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신문 기사와 소설 등에서 언급되고 있는 '투신자살'과 관련된 한강철교는 모두 한강인도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경성 시내에서 한강인도교 앞까지는 전차와 버스가 닿았고,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전차가 확장 개설되어 인도교 위를 지나 노량진에 이르렀다. 경성 시내에서 한강인도교로 이어지는 교통 접근성은 끝없이 되풀이된 한강인도교 위의 비극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주)

▲ 동아일보, 1923.8.18.
▲ 동아일보, 1932.5.9.
▲ 동아일보, 1938.10.8
▲ 한강인도교는 사람의 출입이 용이한 구조
▲ 서울신문, 1962년경 (출처: http://bitly.kr/pO0Ss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