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에서 북쪽으로 언덕길을 다 올라가면 화개동[현재 종로구 화동]이다.
이 화개동 마루터기에 터전을 널찍하게 잡아 기와집 한 채가 덩그러니 들어앉았는데 이것이 바로 1884년에 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해 가 있는 김옥균이 살던 집이다.
그가 한번 '역적'으로 몰린 뒤 집안 재산은 다 몰수당하고 처자들은 사는 곳조차 알 길이 없다. 집은 나라의 소유로 돌아갔으나 드는 사람 없이 빈 채로 버려두어 하루하루 퇴락해 갔고 한옆에 있는 사방이 번듯하고 편편한 터전은 김옥균이 참판 시절에 개화란 어떤 것인가를 생활에서도 보여 주려고 공을 치며 놀던 정구장인데 이제는 그물 쳤던 나무 기둥이 좌우에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오직 잡초만이 무성하여 보는 사람들의 감회를 자아낸다. (박태원, 『갑오농민전쟁』4권, 1989, 깊은샘, 74쪽)
[...]
전봉준은 오수동을 쳐다보며,
"오 두령, 요즘 서울 소식이나 좀 들려주오."
하였다.
"말씀드리지요."
오수동이가 그러지 않아도 말하려던 것처럼 선뜻 대답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기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김 참판이 일본에 가서 고생하신 건 들어 아시겠지요? [...] 그 간특한 왜놈들이 그렇게 천대를 하다가 청국으로 건너가면 좋은 수가 있다고 김참판을 속여 저희 나라에서 내쫒아 할 수 없이 지난 달 스무이튿날 청국 상해로 건너가서 동화양행이란 여관에 묵어 있으시다가 자객 홍종우 놈의 손에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소."
"원 저런!"
"김참판이 돌아가셨던 말이요?"
"끝내 그렇게 되셨군…… 음."
오수동이가 말을 계속했다.
"기막힌 일은 그뿐이 아니요. 조정에서는 김참판의 시신을 본국에 가져다 양화진에서 '대역부도죄인'이라고 하면서 죽은 시신에 칼질을 해서 능지처참을 하였소."
오수동은 말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잠잠했다. 김옥균 한 사람이 억울하게 당한 형벌도 분한 일이지만 조정에서 하는 일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 모두 기가 막혀 말들을 못하는 것이다. (같은 책 7권, 1989, 깊은샘, 81-2쪽.)
내가 일세一世의 선구자 김옥균씨를 마지막으로 만나 보이기는 그가 천재千載의 유한遺恨을 품고 홍종우洪鍾宇의 손에 넘어지든 바로 전날[1894.3.26.]이었습니다. 장소도 상해上海요 집도 그가 최후를 마지하던 동화양행東和洋行이며 또한 방도 바로 그가 짐을 푼 침실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린 망명객의 몸으로 그곳 미국 조계租界안에 있는 중서학원中西學院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상해로 건너온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 날짜를 꼽아 그가 도착하는 날에 불야불야 학교시간을 마치고 동화양행으로 찾아갔습니다. 내가 바로 동화양행東和洋行으로 들어서려 할 때에 큰 갓 쓰고 자주빛 두루마기를 입은 키가 후리후리하게 생긴 장대한 사람 하나가 나가기에 이상하구나 하고 뒤에 김옥균씨에게 물었더니 그자가 바로 그에게 육혈포를 놓은 홍종우였다고 합디다. 그는 그때 알고도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무슨 일로 홍종우와 동행하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얼굴에 조금도 의혹의 기색을 보이지 않고 태연히 "아모 관계 없는데 다만 내가 상해로 가겠다니까 나도 상해 구경도 할 겸하여 상해로 가겠노라" 하고 일본서부터 동행하는 것이라고 합디다.
그때 그의 말을 듣건대 금번 행차는 천진天津에 있는 리훙장李鴻章을 만나는 외에 또한 중국의 중요 인물를 만나 정치상으로 무엇인가 기도하는 바 있노라 하면서 여러 사람의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의 중국공사관에 있는 리훙장씨 아들의 소개장도 가지고 있었습디다. 그 날에 과거 여러 해 동안 그가 글어온 그 곡절 많은 생애…… 혹은 북해도의 풍설風雪에 혹은 오가사와라小笠原의 물결치는 해무海霧 속에 몹시 지치고 지친 용색容色을 하고 있음을 볼 때 나는 일종 애처러운 感慨에 가삼이 아품을 깨달엇슴니다. 그 이튼날 나는 여전히 중서학원에 가서 교수敎授하고 있노라니까 어떤 사람이 급히 달려와서 김옥균씨의 편지를 전합디다. 내용은 기어이 만날 일이 있으니 오후에 좀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시간이 끝나는 대로 곧 찾아 가겠다고 사환에게 이야기하여 보냈습니다. 실상 그때에 상해는 지금과도 달라 그를 찾을 만한 동포도 없거니와 또한 그가 찾아가서 흉금를 터놓고 모사를 할 만한 이도 없었습니다. 그 날 마지막 시간을 보고 있을 즈음에 한사람이 급히 기별을 가지고 왔습니다. "김옥균씨가 지금 바로 암살을 당하였다고". 나는 교편을 집어던지고 급히 동화양행으로 달려갔습니다. 아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김옥균씨는 탄환에 맞아 침대에 누운 채로 이미 절명된 후였습니다.
그때 시체를 붙잡고 우는 일본청년 와다和田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김씨를 몹시 숭배하여 일본에서도 늘 따라디는 청년이었습니다. 나는 어찌된 일이냐고 그 청년에게 물으니 "자기와 함께 선생이 방에 계실 때 홍종우가 들어와 앉아 별 말없이 있다가 차를 한잔 달라기에 차를 가지러 자기가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이에 홍은 권총으로 선생을 놓은 후 곳 중국 병영兵營으로 도망하여 버리었다"고 합니다. 나는 우두커니 섰었나이다. 너무나 급격한 변화, 너무나 놀라운 사변에 무슨 생각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어제밤 이 집 이 방 바로 이 자리에서 호방하고 담대하고 그리고도 그 외교에 능한 그를 대하던 것이 겨우 하룻밤을 지내자 그와 나는 벌써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인생의 무상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완만緩漫하고 그저 아까운 이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피눈물 나는 사실이외다. 나는 울면서 학교로 돌아와서 아까 그에게서 온 편지를 다시 휴지통에서 꺼내어 가지고 그의 최후의 절필絶筆인 편지를 읽으면서 내 사지가 점점 목석 같이 굳어지는 느꼈습니다.
그가 간지 벌써 30여년전. 이제는 무덤 속에 들어 있을 살과 뼈도 모두 자취 없이 사라졌을 금일까지 자못 유감되는 것은 그가 그렇듯이 일찍 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던들 우리 사회에 좀 더 큰 자취를 남겨 놓았을 것을. 그의 품은 큰 포부와 그의 능숙한 외교적 실현을 보지못하고 그를 구천九天에 보낸 것이 무엇보다 원통합니다. 내가 그와 사귀고 서로 굳게 믿어오기는 갑신정변 이전부터 이었으며 그가 비범한 재주를 가진 정치적 큰 인물임을 깨달은 바이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절실히 느껴집니다. 그때 우리 조선 사회는 아직 현대식 웅변이나 연설논법演說論法을 가지지 못한지라 그가 수만 대중을 앞에 놓고 대기大氣를 토하여 만인을 울리고 뛰게 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으니 그의 현대식 연설은 들을 바 없었으나 수인數人의 동지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그의 말씀을 듣기는 여러 번이었는데 그는 언제나 열의 있고 조리있게 말씀하야 일석一席을 무한히 감흥시켰던 것입니다.
그가 일본 망명시대에 이등방문伊藤博文과 같은 대정객大政客들과 논전할 때마다 그 대정치가들 가슴을 서늘케 하였던 것은 이 세상이 잘 아는 바이니 그의 호담豪膽하고 비범한 논술이 어떠하였다는 것은 그로써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윤치호, '김옥균씨의 최후', 『삼천리』, 1936.11.)
(그림의 박스 설명 내용) 김옥균씨는 조선을 망명하여 일본에 와서 암전주작巖田周作이라 칭하였었는데 명치27년 3월에 김 씨는 홍종우, 오정헌, 북원연차랑北原延次郞[和田延次郞이 잘못 알려진 듯]과 함께 일본을 떠나 상해에 상륙하여 일본 '호텔'에 투숙하였다가 누상樓上에서 그 달 28일에 홍종우에게 총살을 당하였습니다. 자세한 일은 각 신문에서 알아보시오. *그림설명은 동아일보 1925.11.14. 참고.
**
〈중동전기中東戰紀〉에서 홍종우가 김옥균을 살해한 기사를 보면, 김옥균은 갑신정변 때 역모를 하다가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재산을 가지고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김옥균은 암전주작巖田周作라는 성명을 사용하였으나 그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는 화삼和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서양의 각국을 유람하였을 때 그는 서양 옷을 입고 서양말을 하였다.
그리고 홍종우는 각국의 방언을 잘 알았고, 그도 역시 서양 복장을 한 후 독일과 프랑스를 유람하였다. 그리고 그는 혹 김옥균과 서로 만나면 반가운 척하였다. 그 후 계사년(1883) 김옥균이 오사카로 왔을 때도 홍종우는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갑오년(1894) 봄에 그들은 서로 중국을 유람하기로 약속하고 2월 21일 상해에 도착하여 북하남로北河南路 동화가東和街에 있는 길도덕삼吉島德三의 객사客舍에 숙소를 정하였다. 김옥균은 왜노倭奴 북원연차랑北原延次郞[和田延次郞]을 데리고 청국인 오정헌吳靜軒과 함께 덕삼德三의 객사 2층에서 거처하고, 홍종우는 다른 방에서 혼자 거처하였다. 이때 김옥균은 그가 자기를 해치려고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22일 새벽 홍종우는 서양 돈 5천 원권을 김옥균에게 보이며 소동문小東門에 있는 천풍전장天豊錢莊에 보내어 함께 무역을 하자고 하더니, 잠시 후 그는 다시 와서 “천풍전장 주인이 출타하여 오후 6시 정각에 온다고 하니 그때까지 기다립시다.”라고 하였다. 김옥균은 그 말을 유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홍종우는 오후 4시쯤에 조선관복으로 갈아입고 김옥균의 방으로 갔다. 김옥균은 서쪽 창가에 있는 침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홍종우는 북원연차랑을 밖으로 나가라고 한 다음 갑자기 총을 꺼내어 쏘았다. 첫번째 맞은 곳은 왼쪽 볼이었다. 그 탄환은 볼을 뚫고 올라가서 턱의 오른쪽을 관통하였다. 선혈이 낭자하였다. 그는 통증을 못이겨 미친 듯이 아우성을 쳤다. 홍종우는 다시 총격을 가하였다. 그 탄환은 왼쪽 가슴을 뚫고 오른쪽을 통과하다가 피막皮膜을 뚫지 못하고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제3탄은 어깨 밑을 관통하였다.
이때 길도吉島 등 여러 사람들은 다락 밑에 있다가 별안간 탕 하는 소리를 듣고 문밖에서 어떤 사람이 불꽃 놀이를 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다락 3층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들이 떼를 지어 내려와 보니 김옥균이 총을 든 채, 동쪽의 다섯 번째 방앞으로 도주하다가 땅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길도吉島 등은 일본 영사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그는 한국 사람들끼리 원수가 되어하는 일이라며 들어보지도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상해령上海令 황승훤黃承暄은 일본, 영국, 미국 등 각국 관리를 대동하고 홍종우를 심문하였다. 홍종우는 모습이 훤칠하고 복장도 단정하게 입었다. 그는 강경한 어조로, “그는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사람으로 사람마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나라를 위해 적을 죽였으니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그는 또 “나라의 명령을 받아 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청나라 관리들은 조선으로 전화를 하였는데 그 내용을 대충 열거하면, 김옥균은 조선의 반신反臣이며 홍종우는 관리이다, 이번 사건은 합리적인 일이므로 속히 석방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16일, 상해령 황승훤은 홍종우를 호위하여 현서縣署로 갔다가 다시 군문軍門의 용정勇丁 4명을 시켜 홍종우를 조선으로 송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원연차랑은 처음에 김옥균의 시체를 싣고 일본으로 가려하였으나 청나라 관리가 저지하자, 그는 초 7일, 25일에 조선으로 보낼 관이라고 하면서 호남회관湖南會館에다가 갖다 놓았다. 그 후 홍종우는 그 관을 싣고 귀국하여 길거리에 달아 놓고 소금물을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김옥균이 참변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유발遺髮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이때 모여든 조정 대신 및 시골 신사紳士와 상하의원上下議院의 인원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모두 그의 상여를 메려고 하였다. 그 후 시체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각 신문사는 그 사실을 일제히 보도하며 그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하였다.
한편, 홍종우가 귀국한 이후, 그 사건이 만리 밖에서 발생하여 들리는 말이 서로 다르므로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동전기〉에 기재된 내용을 인용한 것은 청나라 사람들의 목격에 착오가 없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하였다.
김옥균을 길거리에서 효수할 때 그곳을 지나던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기록을 참고하면, 그 사건을 국치國恥로까지 언급하였으니 김옥균이 무슨 덕을 쌓아 일본인들에게 그와 같은 인심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갑신정변 때 역적들 중에서도 김옥균이 가장 흑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가 만일 죽지 않았다면 갑오경장 이후에는 정반대 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김옥균의 재주가 서광범과 박영효보다 더 낫기 때문에 그가 갑오경장을 맞았다면 그의 솜씨를 볼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황현, 『매천야록』2권, 1894)
**
시체는 얼굴을 아래로 하여 땅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상태로 되었고, 머리와 사지는 쉽게 잘라낼 수 있도록 나무받침으로 받쳐졌다. 우선 머리가 지루한 톱질 과정에 의해 몸체로부터 절단되었다. 그 다음 오른손이 관절로부터 잘려져 나왔고, 왼손은 관절과 팔꿈치의 중간에서부터 절단되었다. 발은 도끼에 의해 발목에서 잘렸다. 마지막으로, 몸체의 뒷부분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베어져서 측면에 칼자국을 세 개 만들어 놓았는데 길이 7인치, 깊이 1인치였다. 머리는 거친 밧줄로 묶인 낡은 대나무 막대기들로 만들어진 삼발이로부터 아래로 매달려 있었고, 손과 발은 하나로 묶인 채로 머리의 한쪽으로부터 드리워져 있었으며, 측면에 세 개의 칼자국이 난 몸체는, 수족들은 절단하기 위해 놓인 모습 그대로, 땅 위에 내버려져 있었다. 이 과정은 양화진 강변의 보리밭에서 수행되었다. 본래 그 절단된 수족은 약 2주 동안 노출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 구역질 나는 과정은 16일에 끝났다. 몸체는 강물에 버려졌고, 머리는 소금에 절여 경기도에 있는 치구산[죽산]에 보내졌다. 거기서 전시된 후 반도 전체에 종횡으로 보내지다가 마침내 다시 치구산으로 되돌아와 그곳 야산에 버려짐으로써 독수리[?] 밥이 되었다. 손과 발은 역시 소금에 절여져 손과 발이 한 짝씩 칸쿄오와 케이쇼도로 보내졌다. (출처: 서울대 독일학연구소 옮김, 『한국근대사에 대한 자료』, 1992, 신원문화사, 152-3.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2005, 푸른역사에서 재인용.)
**
우리나라 근대 중등교육의 시발점인 경기고는 1900년 조선조 명문 거족들이 몰려 살던 홍현(현 서울 종로구 화동 정독도서관)에서 문을 열었다.
원래 경기고 터는 개화파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이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자 조선 정부가 집을 몰수해 학교 터로 삼은 것이다. 이후 한성고-경기고보-제1고보-경기중의 교명을 거친 경기고는 1954년 고교 입시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드는 명문고로 부상했다. 1957년 졸업생부터 고교 입시 마지막 세대인 1976년 졸업생들까지는 10명 중 6명 이상이 서울대로 진학했다. 1970년의 경우 서울대 진학률은 무려 81.8%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박정희 대통령이 강남 개발을 국정과제로 삼으면서 정부는 강북 명문 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을 추진하게 된다. 1972년 문교부 장관은 명문고의 상징인 경기고 이전을 발표하는데,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사업비 6억9600만원을 들여 3만2000여평의 대지에 최신 시설을 갖춘 교사를 지어 옮긴다는 것이다. 바로 직전에 유신헌법 발표와 비상계엄령 선포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재학생 뿐만 아니라 국내외 동문까지 합세한 강력한 반대여론이 일자 정부는 기존 교사를 그대로 유지해 지금의 정독도서관으로 사용한다는 조건을 걸고 합의를 받아낸다. 당시 강북에 있던 숙명여고 서울고 경기여고 등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교사가 모두 헐린 것에 비해 경기고만 예외를 둔 것이다. 1976년 경기고가 현재의 삼성동 교사로 이전한 뒤 서울시 교육청 직속기관으로 운영되는 정독도서관은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국민일보, 2005.6.7.)
'친절한 구보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조] 매약행상賣藥行商 최주사의 일일 (0) | 2019.04.29 |
---|---|
[김유정-따라지] 사직동 (0) | 2019.04.25 |
[갑오농민전쟁] 순라군에게 붙잡힌 '대감' (0) | 2019.04.24 |
추월색 (0) | 2019.04.23 |
탑동/탑골/파고다 공원 (0) | 2019.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