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습관으로 말하면 혼인 갓한 신랑 신부는 서로 말도 잘 아니하고 마주 앉지도 못하며 가장 스스러운 체하는 법이요, 더구나 신부는 혼인한 지 삼 일만 되면 부엌에 내려가 밥이나 짓고 반찬이나 만들기를 시작하여 바깥은 구경도 못하는 터이라 내외가 한 가지 출입하는 일이 어디 있으리요마는, 영창이 내외는 혼인 지내던 제 삼 일에 신혼여행을 떠난다. 내외가 나란히 서서 정답게 이야기하며 [남대문]정거장으로 나가는 모양이, 영창이는 프록코트에 고모高帽를 쓰고, 한 손으로 정임이 분홍 양복 땅에 끌리는 치맛자락을 치어 들었으며, 정임이는 옥색 우산을 어깨 위에 높이 들어 영창이와 반씩 얼러 받았는데, 그 요조窈窕한 태도는 가을 물결 맑은 호수에 원앙이 쌍으로 나는 것도 같으며, 아침볕 성긴 울[울타리]에 조안화[朝顔花, 나팔꽃]가 일시에 웃는 듯도 하더라.
신혼여행은 서양 풍속에 새로 혼인한 신랑 신부가 서로 심지도 흘러 보고 학식도 시험하여 처음으로 정분도 들이고자 하여 외국이나 혹 명승지로 여행하는 것인데, 만일 서로 지기가 상합지 못하면 그 길에 이혼도 하는 일이 있지마는, 영창이 내외야 무슨 심지를 더 흘러 보고 어떤 정분을 또 들이며 어찌 이혼 여부가 있으리요마는, 유람도 할 겸 서양 풍속을 모방하여 떠나는 여행이라. (최찬식, 『추월색』,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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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잡지책에선가 보니 자네가 '달밤'이란 소설책을 냈데 그려. 이사람 내가 얘기책 좋아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 어쩌면 그거 한 권 안 보내준단 말인가? 그런데 책 이름을 어째 그렇게 지었나? '추월색'이니 '강상명월'이니만치 운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내용은 물론 연애소설이겠지? 하여간 한번 읽어보고 싶네. 부디 한 권 부쳐 주기 바라며 또 한 가지 부탁은 돈은 못 부치나 담배꽁댕이를 모아 담아먹으려 하니 아조 쬐고만 고불통 물뿌리 하나만 사서 '달밤'과 함께 똘똘 말아 부쳐주게. 야시에 가면 십 전짜리 그런 고불통이 있다네…….'
소학교 이후 그는 농촌에만 묻혀 있으니 남의 창작집을 '추월색' 따위 이야기책과 비겨 말하려는 것이 무리는 아니나 좀 불쾌하기도 하고 '달밤'을 보낸댔자 그의 기대에 맞을 리가 없을 것이 뻔하여 그 고불통까지도 잠자코 내버려뒀던 것이다. 나는 후회한다. 그가 알고 읽든, 모르고 읽든 , 한 책 보내주어야 할 정리에 쥐뿔같은 자존심만 내인 것을 후회한다. (이태준, '장마',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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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은 가죽 책가위가 세 번이나 해지도록 책 한 권을 가지고 오래 읽었다더니만, 서울아씨는『추월색』한 권을 무려 천독千讀은 했습니다. 그러고서도 아직도 놓지를 않는 터이니까 앞으로 만독을 할 작정인지 십만독 백만독을 할 작정인지 아마도 무작정이기 쉽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아씨는 책 없이, 눈 따악 감고 누워서도『추월색』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르 내리 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게 천하 명작의 시집詩集도 아니요, 성경책이나 논어 맹자나 육법전서도 아닌 걸, 글쎄 어쩌자고 그리 야속스럽게 파고들고, 잡고 늘고 할까마는, 실상인즉 서울아씨는 『추월색』이라는 이야기책 그것 한 권을 죄다 외우는 만큼 술술 읽기가 수나롭다는 것 이외에는 달리 취하는 점이 없습니다.
그는 무시로 마음이 싱숭생숭할라치면 얼른 『추월색』을 들고 눕습니다. 누워서는 처억 청을 높여 읽는데,
"각설이라 이때에……."
하고 양금채 같은 목으로 휘청휘청 멋들어지게 고저와 장단을 맞춰 가면서 (다리와 몸을 틀기도 하면서) 가끔 시큰둥한,
"……하징 아니헤야……."
조의 콧소리로 양념까지 치곤 합니다. 이렇게 멋지게 청을 돋워 읽고 있노라면, 싱숭거리던 속이 어떻게 더 이상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지는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일언이폐지하면 그 소위 흥이라는 게 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건 촌 나무꾼 총각이 육자배기를 부른다든가, 또는 기생이 궂은비 오는 날 제 방 아랫목에 누워 콧노래로 수심가를 흥얼거린다든가 하는 근경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지 않다구요.
그러므로 노래가 아무것이라도 제게 익은 것이면 익을수록 좋듯이, 서울아씨의『추월색』도 휑하니 외우게시리 눈과 입에 익어, 서슴지 않고 내려 읽을 수가 있으니까, 그래 좋다는 것입니다. 결단코『추월색』이라는 이야기책의 이야기 내용에 탐탁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바이면 차라리 책을 걷어치우고 맨으로 누워서 외우는 게 좋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건 또 재미가 없는 것이, 인력거꾼이 인력거를 안 끌고는 뛰기가 싱겁고, 광대가 동지섣달이라고 부채를 들지 않고는 노래가 헤먹고 하듯이, 서울아씨도 다 외우기야 할망정 그래도 그 손때 묻고 낯익은『추월색』을 펴 들어야만 제대로 옳게 노래하는 흥이 납니다.
진실로 곡절이 그러하고, 그렇기 때문에 남이야 이를 앓는다고 흉을 보거나 말거나? 또 오뉴월에도 이야기책을 차고 누웠다고 비웃음을 하거나 말거나 아무것도 상관할 바 없고 사시장철 밤낮없이 손에서『추월색』을 놓지 않는 서울아씨요, 그래 오늘 저녁에도 일찌감치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그리헤야 드디여 돌아오징 아니……."
이렇듯 서울아씨의 추월색 오페라가 적이 가경에 들어가고 있는데, 이 짝 한편으로부터서는 도무지 발성학상 계통을 알 수 없는 버스 음악 하나가 대단히 왁살스럽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비― 비―가, 오―오…… 모― 모―가, 모―가, 모―가……."
태식이가 방 한가운데 배를 깔고 엎디어, 조선어독본 권지일, 비가 오오, 모가 자라 오를 읽던 것입니다. (채만식, 『태평성대』,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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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재희는 글자를 깨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서울 시대의 묵은 이야기책들을 끔직이는 사랑하였다.
긴 가을 밤에나 혹은 어머니나 그가 가벼운 병석에 있을 때에 그는 병풍 속 자리에 누워 신소설 『추월색』을 낭독하였다. 아름다운 이 공기는 모녀를 울리기에 족하였다. 정임이와 영창이의 기구한 운명의 축복은 한없이 눈물지어 어느덧 한 자락의 초가 다 진하면 새 가락을 켜놓고 운명의 다음 줄을 계속하여 읽곤 하였다. 어머니는 촛불과 같이 가만히 눈물지었다. 병풍 속 석류는 눈앞에 흐리고 머리맡 약 냄새는 근심스러웠다.
이야기 속의 장면으로 재희는 서울을 상상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러므로 서울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었고 옛 기억은 전설과 같이 그리운 것이었다. 물론 자란 후 다시 서울을 보았을 때에는 소녀시대의 아름다운 꿈은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고─서울은 한갓 산만한 거리로 비치었다. (이효석, '석류', 1936)
열 살 남짓해서 신소설 『추월색』을 읽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야기의 멋을 알고 문학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처음인 듯하다. 추운 시절이면 머리맡에 병풍을 둘러치고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추월색』을 번갈아가며 되풀이하여 읽었다. 건넌방 벽장 속에는 『사씨남정기』,『 가인기우』 등속의 가지가지 소설책도 많았건만 그 속에서 왜 하필 『추월색』이 그다지도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병풍에는 무슨 화풍인지 석류, 탁목조 등의 풍경 아닌 그림이 폭마다 새로워서 그 신선한 감각이 웬일인지 추월색의 이야기와 어울려서 말할 수 없이 신비로운 낭만적 동경을 가슴속에 심어주었다.
정임과 영창의 비극이 시작된 것은 '동경 상야[上野]공원'이었으나 웬일인지 상야공원이 마음속에서는 서울로만 자꾸 짐작되었다. 어렸을 때에 본 어렴풋한 서울의 기억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한데 휩쓸려서 멋대로의 꿈을 빚어낸 것이었다. (이효석, '엄마의 품에 안겨서 추월색에 탐독耽讀', 동아일보, 1937.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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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밝은 그 달빛에 동경 상야공원이 일폭 월세계月世界를 이루었으니, 높고 낮은 누대는 금벽이 찬란하며, 꽃 그림자 대 그늘은 서로 얽혀 바다 같고, 풀 끝에 찬 이슬은 낱낱이 반짝거려 아름다운 야경이 그림같이 영롱한데, 쾌락하게 노래 부르고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은 모두 달 구경하는 사람이더니, 밤은 어느 때나 되었는지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다 헤어져 가고, 적적한 공원에 월색만 교결皎潔한데 그 월색 안고 불인지不忍池[시노바즈노이케しのばずのいけ] 관월교觀月橋 석난간에 의지하여 오똑 섰는 사람은 일개 청년 여학생이더라. 그 여학생은 나이 십팔구 세쯤 된 듯하며, 신선한 조화로 머리를 장식하고 자줏빛 하가마를 단정하게 입었는데, 그 온아한 태도가 어느 모로 뜯어보든지 천생 귀인의 집 규중에서 고이 기른 작은아씨더라. (최찬식, 『추월색』,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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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파고다 공원] 팔각정 앞에서 서편으로 꺾이어 나무 그늘로 빠져서 연못 위에 놓인 다리를 지나 연못가 덩굴 밑 벤치에 앉았다. 경성 학생들이 이 연못을 불인지不忍地라 부르고, 그 다리를 추월색 소설 껍질에 있는 관월교觀月橋라 부르는 것도 젊은 학생의 짓다워서 재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네는(그들은) 항용 오늘 저녁,
“몇 시에 관월교에서 만나세.”
하고는, 이리로 모여서 다시 출발을 한다는데, 오늘도 휘문의 교복을 입은 학생 한 사람이 못가에서 금어를 장난하고 있었다. (방정환, '공원정조, 초야의 각 공원', 『개벽』 19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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