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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23. 09:34

 

M은, 학생시대부터 대단한 방탕생활을 하였습니다. 방탕이래야 금전상의 여유가 부족한 그는, 가장 하류에 속하는 방탕을 하였습니다. 오십 전 혹은 일 원만 생기면, 즉시로 우동집이나 유곽으로 달려가던 그였습니다. 체질상, 성욕이 강한 그는, 그 불붙는 성욕을 끄기 위하여 눈앞에 닥치는 기회는 한 번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을 만날지라도, 음식을 한턱하라기보다 유곽을 한턱하라는 그였습니다. (김동인, '발가락이 닮았다',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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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는 신세를 망쳤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성례하여 그럭저럭 살았으나, 그 남편 되는 사람이 아편쟁이가 되었더랍니다. [...] 그 뒤 그들은 평양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다가 그 남편은 용녀를 어떤 유곽에 팔아먹고 도망하였습니다. 그 뒤 용녀는 안동현 어떤 유곽에 있다고도 하고 대련 어떤 유곽에 있다고도 하는데 잘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

안동현과 대련의 유곽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았습니다. 나는 용녀라고 불렀으나 용녀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 근 일 년이나 그렇게 다니면서 [...] 참말로 거기에 용녀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 나는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떤 키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색시가,
'그것이 아마 계월인가봐! 그래 옳아. 영변이 고향이던가? 한데 키가 크고 눈이 작은……. 저 어른 말과 같이 생긴 애야요……. 참, 그 오빠가 있는데 애꾸눈이래.'
하고 나를 보더니,
'서울 신마찌 xx루에 가 찾으세요.'
하고 가르쳐 줍디다. 나는 어떻게 반가운지 미칠 것 같습디다. 이튿날 그곳을 떠났습니다. 
도보로 근 한 달이나 걸려서 서울로 갔습니다. 서울 가서 그런 색시를 찾았더니 얼마 전에 군산 유곽으로 갔다고 역시 어떤 색시가 가르쳐 줍디다. 나는 그만 어깨가 축 늘어지고 가슴이 덜렁 내려앉았습니다..." (최서해, '누이동생을 따라서',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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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 기자] K는 전차를 내려[광희문?] 어둑컴컴한 병목정[쌍림동] 거리를 톺아 올라 갔다. 거리는 들어갈수록 불이 밝고 번화하여 이 곳은 다시 초저녁이 오는 것 같았다. 바람은 잦았으나 일은 봄이라 하여도 귀가 시릴 만치 쌀쌀하였다. K는 추운 것보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 하여 모자를 푹 눌러썼다.
불 밝은 이집 저집 대문 간에는 젊은 사내들이 두루마기짜리, 양복쟁이 할 것 없이 숫개떼 모양으로 몰렸었다. K는 무시무시 하였다. 그리고 어디쯤 가서 걸음을 멈춰야 할지 몰라서 무슨 딴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간지러운 얼굴을 숙이고 쏜살같이 올라만 갔다. 이집 저집 대문깐에서 혹은 들창 안에서 게집애들이 "여보, 여보세요" 하고 완연히 K를 불렀다. 어떤 것은 술 취한 사람 모양으로 목이 잠긴 소리로 "여보오, 모자 쓰고 쓰고 가는 양반?" 하고도 불렀다. 그런 때면 K는 더 걸음을 자주 놀렸다. 그리고 보니 얼마 안가서 K의 앞에는 커다란 행길이 나오고 말았다.

그 행길은 보통 평범한 거리 같았다. K는 실소하지 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좌우를 살펴본즉 산 밑으로 올라가며 보통 상점 집과는 다른 일본식 이층집 삼층집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그때에 K는 옳구나 저기가 정말 유곽인가보다 생각하였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본즉 과연 집집마다 문안에 으슥하게 들어설 곳을 만들어 놓고 마치 활동사진관 문 앞에 배우들의 '브로마이드'를 걸어놓듯 창기들의 인형 같은 사진을 진열해 놓앗다. K는 아까 지나온 조선집 거리처럼 그렇게 난잡스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모자는 숙여 쓴 채 너덧 집이나 문간에 들어서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사진 구경을 하였다. 그러나 별로 붙잡을 것이 없었다. 그 모양으로 다니다가는 밤을 새도 기사 될 재료가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K는 다시 용기를 내어 각오하였다. 이것도 기자생활의 수련인가보다. 나선 길이니 철저히 한번 활약해 보자, 하고 다시 아까는 곁눈질도 못하고 지나온 좁은 거리로 되들어섰다.

K는 무엇보다 창부들 속에 계집애 많은 것을 놀랬다. 계집애라니까 정동녀貞童女를 의미함이 아니라 몸으로써 사내를 꾀이기에는 너무나 털도 벗지 않은 이제 15, 6세 짜리들이 머리채를 땋아 느린 채로 대문간에 나서서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며 이 녀석 저 녀석에게 추파를 보내는 꼴은 K가 보기에는 너무나 비극이었다. K는 고 또래 중의 하나에게 어느 틈에 손목을 붙잡히었다. 그리고 어느 집안 마당으로 끌려 들어갔다. K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 계집애의 하는 양이 흥분을 느끼기보다 측은하게만 보였으나 아까 편집국장의 주의가 이런 때의 나의 심리를 경계한 것이거니 하고 그 계집애가 하라는 대로 따라 하여 보았다. 그러나 방문을 열고 들어 가자는 데는 생각할 일이었다. 이런 때에 쓰라고 준 것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사社에서 밤참 값으로 몇 원씩 받아 넣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 돈을 쓸 목적으로는 그 방에 따라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K는 그만 툇마루에 걸터앉고 말았다. 그때 마침 빈 듯이 조용하던 옆 방에서 문이 열리더니 동 저고리 바람 노동자 하나가 얼굴을 들지 못하고 후닥닥 뛰어 나왔다. 그리고 자기 뒤를 따라나와 간드러지게 "안녕히 가서요. 또 오세요" 하고 인사하는 계집을 한번 돌아다보지도 않고 무안이나 당한 놈처럼 튀어 나갔다. K는 도적놈이나 본 것처럼 가슴이 서늘 하였다. 그리고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전차소리가 울려오는 것을 듣고 불과 지척인데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엇다. 게집애는 "어서 들어와요" 하고 입술을 생긋하였다. 어느 틈에 다른 계집들이 모여들어 K의 모자를 벗기고 K의 구두끈을 끌르고 말이나 돼지를 몰아넣듯 K를 몰아 넣었다. (이태준, '아무일도 없소',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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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 조그만 힘으로 사람 하나를 구한다는 것부터 나의 이십 평생에 처음 되는 일이니, 유쾌치 않은가! 그는 여성이다. 성욕과 허영에 타락한 여자라도 내 힘으로 구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는데, 하물며 [...]

그를 처음 볼 때 나는 놀랐다. 횟박을 쓴 그 얼굴이 백주에 도깨비를 보는 것 같고 언젠가 정초에 실없는 동무들에게 끌려서 병목정이라는 지옥 같은 마굴에 구경 갔을 때 본 그런 여자만 같아서, 나는 아주머니한테 속았나 보다고 잠깐 후회도 하였다. 그러나 집에 온 뒤의 그이! 사람이 옷과 치장에 따라서 그렇게도 변하는지? 나는 이성이란 처음 대해 보지만, 전문학교를 다니고 남자도 못 할 그런 거센 일을 한 여성으로서 그럴 수 야 있나 싶다. 시집 갓 온 색시라도 그렇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어느 것이 그의 본색인지 두고 보면 알리라. [...] (염상섭, 『무화과』, 1932)

 


[신정 유곽]

 1904년 한성의 일본인 거류민회는 높은 이자의 차입금 1만6천 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회장인 나카이 긴조는 저리로 7만 원을 빌려 차입금을 상환하고, 나머지는 유곽 건설과 학교 건축비 등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수천 원으로 묵정동[원문에는 쌍림동] 7천여 평을 매수하여 '특별 요리점'의 영업장소로 지정한 다음 신마치新町라고 이름을 바꿨다. 10월에 제일루第一樓는 일본에서 10명의 창기를 불러와 개업했다. 유곽은 개업과 동시에 번성하여 1개월 사이에 7곳이 영업을 시작했다. 유곽이 지불하는 세금은 1년간 무려 1만 7천 원에서 1만 8천 원에 달했다. [...] 1929년까지 신마치에는 55칸의 유곽이 세워져 261명의 창기가 일했다고 한다. (다카사키 소지 高岐宗司 저, 이규수 옮김,『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2006, 역사비평사, 72쪽)

 

[병목정 유곽]

다방골 기생만 명물이냐고 병목정[쌍림동] 갈보가 큰 불평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네가 너무 조급한 탓이지요. 우리도 병목정에는 갈보가 명물이라고 합니다. 밤낮 없이 그 근처로 지나가기만 하면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지나는 사람을 손짓하여 부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네인들 사람이지 생각이 없겠습니까.

눈물은 복받쳐 올라오는데 웃음을 억지로 내이고 남자를 보면 대적 같지만 반가운 듯이 맞는 것을 보십시오. 명물이 다른 명물이 아니라 불쌍하기로 첫째 가는 명물입니다.

이 명물은 한 편으로 보면 병목정 명물이 아니라 전세계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런던' 같은 큰 도회에는 팔만 여명이 있고 '파리' 같은 화려한 도회에는 오만여 명이 있답니다. 인구 비례로 보면 '파리'가 수효로 제일이랍니다. 이 명물은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다고 갈보라는 별명까지 있습니다마는 실상은 사람에게 피를 빨리는 것이랍니다. 그 증거는 갈보가 사람 이백 명 가량만 치르고 나면 피가 말라서 껍질만 남은 빈대같이 된답니다. ('병목정 갈보', 동아일보, 1924.7.11.)

 

[미생정 유곽]

용산구 도원동(만리창의 일부, 일본인은 미생정이라고 불렀다)에 미생정유곽 일명 도산유곽이 생긴 것은 광무光武 10년(1906)이었으며 러일전쟁 후 한국내 각지에 유곽이 생길 때 용산에도 생긴 것이다. 용산이 일본의 일대전사기지가 되고 그것에 소집된 일본군병의 수가 늘어나자 대도정(지금 용문동) 일대에 또 하나의 유곽이 생겼으나 그 연도는 알길이 없었다.  (서울특별시사편집위원회, 『서울육백년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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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이 되자 공창가에 대대적인 개편이 일어났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일본인 유곽업자들과 창녀들은 이 땅을 떠나간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일본 유곽들을 한국인 유곽업자들이 접수해 버린다. 서울의 경우 신정 유곽과 용산 미생정 유곽은 쌍림동의 한성 유곽에서 일제 때부터 공창을 경영해 왔던 한국인들이 나누어 접수했으며, 일부는 폭력조직 같은 세력들이 인수하여 운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방의 유곽들도 마찬가지였다. [...]

미군정은 공창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남녀평등, 인권 옹호 등을 표방하고 평화의 사도使徒임을 자처했던 미군정청이 공창제도를 그대로 방치할 리가 없었다. 광복 다음 해인 1946년 5월 17일 미군정 당국은 법령 제70호로 '부녀자의 매매 또는 매매계약 금지령'을 발표한다. (손정목,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1, 2005,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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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창기의 수

공창公娼폐지의 획기적 재생의 선물을 받아 뛰어나올 창기娼妓는 서울시내에 대체 얼마나 있으며, 이 여인들이 휴대한 금액은 얼마나 되는가. 서울시내의 유곽조합은 신정新町, 한성(병목정並木町·서사헌정西四軒町), 용산 합하여 3개소이며, 창녀는 17세부터 30세까지 699명(4월 말 현재)이 있다. 이것을 조합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 창기娼妓

신정新町[중구 묵정동] 293명

병목정[중구 쌍림동] 87명 

서사헌정[중구 장충동] 193명 (병목정+서사헌정 -> 한성유곽)

용산미생정[용산구 도원동] 126명

○ 업자

신정 99명

한성 65명

용산 20명

(동아일보, 1946.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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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창公娼 폐지후, 전국에 사창私娼 증가

지난 [1948년] 2월 14일 공창이 폐지된 후 어언 세월이 흘러 8개월을 맞이하게 된 경향 각지의 동향은 사창을 제멋대로 늘어가게 하였다.

서울 묵정동墨井洞[쌍림동 등 일대 포함]에서 풀려나온 700여 명의 창녀와 아울러 허영에 들뜬 이 땅의 교양없는 계집들과 생활고에 허덕이는 내인, 가을바람 설레이는 독수공방을 지킬 수 없는 청상들이 종로 뒷골목을 비롯한 서울 장안에 흩어져 고약한 바람과 내음새를 풍기고 있는 것이 독립된 한국의 수도 서울의 모습이라 할진대 변전무쌍한 세계의 공기를 호흡하며 건설되어 가야할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심히 통탄할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용산구 일대에는 외인을 상대로 하는 ‘양갈보’의 무리 수 백을 헤아릴 그들이 퍼뜨리는 독소는 가정을 파괴하고 물자를 잃어버리게 하고 있으니 이도 이 시대의 가르침이라고만 단정하여 버리고 속수무책으로 고약치료를 하는 정도로 버려두려는 당국자의 무능무력은 이러한 부면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정치의 요체는 민심의 안정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소위라 할 것이니, 당국자들은 종래의 인순고식因循姑息적인 시책을 버리고 독창적이며 건설적인 시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야 할 것이 요청된다.

서울시 후생국장 변호진邊皓鎭씨 이야기: 공창폐지 후 각종 사회단체에서 철저한 대책을 세우도록 당국에 요청하여 왔으나 예산관계로 당국으로서의 확고한 대책은 없이 대흥루大興樓에다 200여 명을 수용하고 부녀관에서 교도하여 왔으나 한 둘씩 달아나 버린 것이 2개월 동안에 전부 거리로 새어버렸다. 그 후로는 별로 대책이 없이 왔던 것으로 얼마 전 여자경찰서에서 매음녀를 수용할 건물을 물색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왔으므로 시로서도 적당한 장소를 물색중이다.

여자경찰서장 이야기: 밤거리를 단속하는 것만으로 사창을 없이 할 도리는 없는 것이다. 달마다 더 많은 범법자를 내고 있으니 딱한 시내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허영에 사로잡힌 몽매한 부녀자는 있으려니와 생활고에 허덕이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아 정부에서 하루바삐 민생생활의 안정을 가져올 확고한 시책이 급속하게 실시될 것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적당한 건물을 시청에서 주선하여 주면 여자경찰서에 검속된 매음녀들을 수용하고 적당한 교화를 하도록 계획을 진행중이므로 앞으로 사회에서는 많은 성원을 하여 주기 바란다. (국민신문, 1948.10.17.)


2019/04/12 - [친절한 구보씨] - 화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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