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은 [안국동] 김장로 집 대문을 나섰다. 수증기 많은 여름밤 공기가 땀난 형식의 몸에 불같이 지나간다.
그것이 형식에게 지극히 시원하고 유쾌하였다. 형식은 반작반작하는 하늘의 별과 집집의 전등과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슬적슬적 보면서 더할 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자기의 운수에 봄이 돌아온 것 같다. 선형은 아내가 되었다.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내 것이 되었다. 그러고 미국에 가서 대학교에 들어가서 학사가 되고 박사가 될 수 있다. 사랑스러운 선형과 한차를 타고 한배를 타고 같이 미국에 가서 한집에 있어서 한학교에서 공부할 수가 있다. 아아, 얼마나 즐거울는지. 그러고 공부를 마치고 나서는 선형과 팔을 겯고 한배로 한차로 본국에 돌아와서 만인의 부러워함과 치하함을 받을 수가 있다. 아아, 얼마나 즐거울는지. 그러고 경치도 좋고 깨끗한 집에 피아노 놓고 바이올린 걸고 선형과 같이 살 것이다. 늘 사랑하면서 늘 즐겁게…… 아아, 얼마나 기쁠는지. 형식은 마치 어린아이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장래도 장래려니와 지금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기쁘다. 그래서 이 생각하는 동안을 더 늘일 양으로 일부러 광화문 앞으로 돌아서 종로를 지나서 탑골공원을 거쳐서…… 그래도 집에 돌아오는 것이 아까운 듯이 집[교동 객주(하숙집)]에 돌아왔다. (이광수, 『무정』,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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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런 대가댁 딸이면 무얼 하나 말요. 호화롭게 자란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고 유치원 같은 데서 받는 것쯤이야 분값도 안되고 하니까 원삼이네 댁 영감한테 월급을 받아야 살지 않겠소. 월첩이란 별거요?"
하고 병화는 웃는다.
"그렇습죠. 그러나 그러면 상관 있습니까? 그렇게라도 한 세상 잘 지내면 좋지요."
"좋고 안 좋은 것은 고사하고 그런 월급을 제꺽제꺽 주는 주인 영감은 또 어떻게 되어가는지 아느냐는 말이오. 모르면 몰라도 김의경인가 하는 여자의 부친도 요전까지는 그런 월급을 몇몇 년에게 척척 치렀을 것이지만 오늘날 저렇게 된 것을 보면 그네들의 앞길이란 빤히 보이지 않소?"
"그렇기로 아무러면 우리댁 영감이야 그렇겠습니까?"
원삼은 그런 것은 상상도 못할 일 같았다.
"그러리다. 경복궁 대궐을 다시 질 때 누가 100년도 못 채우고 남향 대문인 광화문이 동향이 될 줄 알았겠소? 하여간 그 책을 잘 읽어보우 지금 내 말을 차차 터득하게 될 것이니!"
병화는 이런 부탁을 남겨놓고 헤어져서 돌아다니다가 경애를 찾아온 것이다.
[...]
아침 한 차례 판 후에 경애가 틈을 타서 집과 바커스에 다녀오기를 기다려 필순은병원으로 뛰어가 모친과 교대를 하였다. 그때까지 병화는 경찰서에서 나오지 않았다. 필순은 병상 앞에서 지키고 앉았다가 부친이 잠이 혼곤히 드는 것을 보고, 가만히 나와서 유리창 밖으로 길거리를 내다보고 섰었다. 마주 보이는 것은 개천을 새에 두고 부연 벌판에 우뚝 선 옮겨온 광화문이다. 날이 종일 흐릿하여 고단하고 까부러지는 필순의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웠다. 무슨 연들을 개천 속에서 날리는지 두 패 세가 조무래기들에게 휩쓸려서 법석들이다.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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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틈엔가 황토마루 네거리[광화문 네거리]에까지 이르러, 구보는 그곳에 충동적으로 우뚝 서며, 괴로운 숨을 토하였다. 아아, 그가 보고 싶다. 그의 소식이 알고 싶다. 낮에 거리에 나와 일곱 시간, 그것은 오직 한 개의 진정이었을지 모른다. 아아, 그가 보고 싶다. 그의 소식을 알고 싶다.
광화문통 그 멋없이 넓고 또 쓸쓸한 길을 아무렇게나 걸어가며, 문득 자기는, 혹은 위선자나 아니었었나 하고 구보는 생각하여 본다. 그것은 역시 자기의 약한 기질에 근원할게다. 아아, 온갖 악은 인성人性의 약함에서, 그리고 온갖 불행이...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