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박골
'뻐스'의 출현을 나는 참말로 기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서울의 교통 발전을 기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즉 '영천행'의 몇 대가 있음으로 하여서 서울의 귀한 약물터 악박골을 다만 몇 사람이라도 더 찾아가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말입니다. (박태원, '초하풍경', 『신생』, 19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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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대로 말이지 나는 약수보다도 약주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술 때문에 집을 망치고 해도 술 먹는 사람이면 후회하는 법이 없지만 병이 나으라고 약물을 먹었는데 낫지 않고 죽었다면 사람은 이 트집 저 트집 잡으려 듭니다. 우리 백부께서 몇 해 전에 뇌일혈로 작고하셨는데 평소에 퍽 건강하셔서 피를 어쨌든지 내 짐작으로 화인 한 되는 쏟았건만 일주일을 버티셨습니다. 마지막에 돈과 약을 물 쓰듯 해도 오히려 구할 길이 없는지라 백부께서 나더러 약수를 길어 오라는 것입니다. 그때 친구 한 사람이 악박골 바로 넘어서 살았는데 그저 밥 국 김치숭늉 모두가 약물로 뒤범벅이었건만 그의 가족들은 그리 튼튼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먼저 해에는 그의 막내 누이를 페환으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미신이구나 하고 병을 들고 악박골로 가서 한 병 얻어 가지고 오는 길에 그 친구 집에 들러서 내일은 우리 집에 초상이 날것 같으니 사퇴 시간에 좀 들러달라고 그래놓고 왔습니다.
백부께서는 혼란 된 의식 가운데서도 이 약물을 아마한 종발이나 잡수셨던가 봅니다.
그리고 이튿날 낮에 운명하셨습니다. 임종을 마치고 나는 뒷곁으로 가서 5 월 속에서 잉잉거리는 벌떼 파리 떼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물 진 작약 꽃이 파리하나 가만히 졌습니다
익키 ! 하고 나는 가만히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서 또 술이 시작입니다.
백부는 공연히 약물을 잡수시게 해서 그랬느니 마니 하고 자꾸 후회를 하시길래 나는 듣기 싫어서 자꾸 술을 먹었습니다.
"세분 손님 약주 잡수세욧."
소리에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그 목로 집 마당을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우러져서 서성거리는 맛이란 굴비나 암치를 먹어가면서 약물을 퍼먹고 급기야 체하여 배탈이 나고 그만두는 프래그머티즘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나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어떤 여자 앞에서 몸을 비비꼬면서 '나는 당신 없이는 못 사는 몸이오.' 하고 얼러보았더니 얼른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 버린 데는 실없이 깜짝 놀랬습니다. 얘 이건 참 땡이로구나 하고 삼 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그 여자는 삼 년이나 같이 살아도 이 사람은 그저 세계에 제일 게으른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모르고 그만둔 모양입니다.
게으르지 않으면 부지런히 술이나 먹으로 다니는 게 또 마음에 안 맞았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병이 나서 신애[신열?]로 앓으면서 나더러 약물을 더 오라길래 그것은 미신이라고 그랬더니 뾰루퉁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가버린 것은 내가 약물을 안 길어다 주었대서 그런 것 같은데 또 내가 '약주 '만 밤낮 먹으러 다니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런 것도 같고 하여간 나는 지금 세상이 시들해져서 그날그날이 심심한데 술 따로 안주 따로 판다는 목로 조합 결의가 아주 마음에 안 들어서 못 견디겠습니다.
누가 술만 끊으면 내 위해 주마고 그러지만 세상에 약물 안 먹어도 사람이 살겠거니와 술 안 먹고는 못사는 사람이 많은 것을 모르는 말입니다. (이상李箱, '약수', 『중앙』, 19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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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큰길로 나왔다. 상기가 되었던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우리 산보나 헐까요?"
"기차 시간이 되지 않었어요?"
"오늘 못 가면 내일 첫차루 가지요. 하룻밤쯤 새우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영신 씨가 또 쫓겨나실까 봐서……."
"전 괜찮아요. 쫓겨나면 고만이죠."
영신은 동혁이가 또 그대로 뿌리치고 갈까 보아 도리어 겁이 났던 판이라 '어디로 갈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
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두 허는 덴가요?"
"여태 한 번도 못 가보셨어요?"
"온, 시굴뜨기가 돼서……."
[...]
버스는 그친 지도 오랜 듯, 큰길 양 옆의 가게는 빈지를 닫기 시작한다.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감옥 앞 넓은 마당까지 오니까 전등불이 검숭 드뭇해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드물어서 어두운 골목 속으로 드나드는 흰 옷자락만 희뜩희뜩 보일 뿐. 떠오른 지 얼마 안 되는 하얀 달은 회색빛 구름 속에 숨었다가는 흐릿한 얼굴 반쪽을 내밀고 감옥의 높은 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악박골 물터 위의 조그만 요릿집에서는 장구 소리와 함께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건달패와 논다니들이 어우러져서 약물이 아닌 누룩 국물을 마시고 그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다.
동혁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돈 십 전을 주고, 약물 한 주전자와 억지로 떠맡기는 말라 빠진 굴비 한 마리를 샀다.
"온, 샘물을 다 사먹는담."
하고 한 바가지를 철철 넘치도록 따라서 영신에게 권한다.
"주전자 꼴허구, 약이 되기는커녕 배탈이 나겠어요."
하면서도 한창 조갈이 심하던 판이라, 둘이 번차례로 한 사발씩이나 벌떡벌떡 마셨다.
[...]
물이야 정하나마나 폭양에 운동을 한데다가 한여름 동안 더위에 들볶이던 오장은 탄산수를 마신 것처럼 쏴아 하고 씻겨내려가는 것 같은데, 골 안으로 스며드는 밤기운에 속적삼에 배었던 땀이 식어서 선뜩선뜩할 만치나 서퇴暑退가 되었다.
두 사람은 으슥한 언덕 밑 바위 아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등 뒤 송림 속에서 누군지 청승맞게 단소를 부는 소리가 들린다. 영신은 한참이나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감옥 속에 갇힌 사람이 자다 말구 저 소릴 들으면 퍽 처량허겠어요."
하고 얼굴을 든다. (심훈, 『상록수』, 1935)
약물에 수세 / 새문 밖에 사는 박봉규씨가 내부에 청원하여 인허를 얻었는데 악박골에 있는 약물 곁에 집을 짓되 남녀실을 분별하여 짓고 물 먹으러 오는 사람들 매명[每名]에 십오 전씩 받고 아해들에게는 칠 전씩 받는다더라. (대한매일, 190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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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점령/새문밖 악박골을 궁내부에서 약수 기지로 근일에 표목을 박았더니 일전에 그 표목을 빼어가지고 일진회 건축기지라고 꽂았다더라. (대한매일, 1908.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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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박골 물이 아무리 라듐 성분이 많이 잇고 부영府營버스가 고운 차장을 싣고 다니고 여름에 악박골 한 번을 다녀오지 못하면 행세를 못할 듯이 떠들어대도 나는 그 곳을 속지俗地에도 속지, 병목정並木町 네거리만치도 못 여긴다. 물터라고 하는 것은 물, 그것에도 물론 좋은 성분이 있어야 하겠지만 나는 그 것보다도 기분을 더 취한다. 물터에는 물터다운 환경과 조건이 있어야 할 줄 믿는다.
물은 산을 끼는 것이니 송림도 있어야 하겠고 산도 있고 바위도 있고 또 그보다 더 일종의 정적미와 유수幽邃한 맛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터에 요리점 지점이 생기고 조금 있다가는 현가유흥絃歌遊興의 취용醉容이 모여들 지경이니 이게 무슨 물터, 그것의 본의本義겠느냐. 대머리진 뒷산 그 옆에 형무소, 무엇 하나 물터다운 환경이냐. 섣불리 현가유흥을 하다가는 그러지 않아도 철창 속에서 외계를 그리는 사람들에게 차마 못할 적악積惡을 하게 될 것이다.
영장靈場인 절간이 요리집화하는 금일에 물터에 요리점 출장소가 생긴들 무어 그리 괴이하게 생각할 거리는 못된다만은 물터는 물을 먹으러 가는 동시에 욕진欲塵을 털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니 밥일랑은 팔어 주지 말았으면 한다 (윤백남, 소낙비/약수터, 『별건곤』, 19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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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악박골 약수'
서울의 명물인 '악박골약수'가 일개 회사 때문에 없어지게 되어 부근 일대의 2백호 천 여명의 주민들은 식수난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부내 현저정에 사무소를 둔 영천토지경영합자회사에서는 수 월전부터 주택건축 공사를 착수하였는데 약 1개월전에는 수백년 동안 서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든 서울의 명물 '악박골약수'를 파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약수는 자못 서울사람이 애용하는 약수로서 가치가 있는 것만이 아니요 부근 주민 2백여 인[호?]의 음료수가 되었다 한다. 그러던 것이 일조에 일 개 회사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또 수도물을 먹으려 하나 수도전이 있는 데까지는 거리가 멀고 그 위에는 부근에는 수도전이 적어서 주민이 곤란을 받고 있는 현상이므로 약수터가 파괴된 이래 부근 주민들 사이에는 물난리가 일어났었다 한다. (동아일보, 193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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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박골의 영화사榮華史가 이렇게 여지 없이 [무너진] 이유에는 부근에 주택지가 되며 오수汚水가 이 성수聖水의 수맥에 숨어든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저주할지어다 대경성의 성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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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악박골이 세상에 나오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60여년전[340여년전?]이라 한다. 그때는 선조조 임진난 때이다.당시 조선을 구하려 나왔던 명나라 이여송은 조선에 온 후에 수토水土가 맞지 않아 고생을 함으로 그를 위하여 당시 조정에서는 좋은 물을 찾던 중 이 물을 찾아내어서 이여송이 먹도록 하였다는데 당시 이 부근을 명명하여 약암동이라 하여 항간에서는 '약바위골'이라 한 것이 와전되어 악박골이 된 것이라 한다. ('영천악박골흥망사', 『매일신보』, 193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