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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20. 13:49


안국동서 전차로 갈아탔다.
[...]
"조선중앙일보사앞이오."
하는 바람에 종로까지 다 가지 않고 내린다. 일 년이나 자리 하나를 가지고 앉았던 데라 들어가면 일은 없더라도, 인전 하품 소리만큼도 의의가 없는 "재미좋으십니까?" 소리밖에는 주고받을 것이 없더라도, 종로 일대에서는 가장 아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과히 바쁘지 않으면 으레 한 번씩 들러 보는 것이 나의 풍속이다.
그러나 들어가서는 늘 싱거움을 느낀다. 나도 전에 그랬지만 손목만 한 번 잡아 볼 뿐, 그리고 옆에 의자가 있으면 앉으라고 권해 볼 뿐, 저희 쓰던 것을 수긋하고 써야만 한다. 나의 말대답을 하다가도 전화를 받아야 한다. 손은 나와 잡고도,
"얘! 광고 몇 단인가 알아봐라."
소리를 급사에게 질러야 한다. 선미禪味 다분한 여수麗水[박팔양]가 사회부장 자리에서 강도나 강간 기사 제목에 눈살을 찌푸리고 앉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비극이다. 동아에선 빙허憑虛[현진건, 일장기 말소사건 연루 구속 상태]가 또 그 자리에 썩는 지 오래다. 수주樹州[변영로] 같은 이가 부인 잡지에서 세월을 보내게 한다.
"이렇게까지들 사람을 모르나?"
좋게 말하자면 사원들의 재능을 만점으로 가장 효과적이게 착취할 줄들을 모른다. 내가 한번 신문, 잡지사의 주권자가 된다면, 인재 배치에만은 지금 어느 그들보다 우월하겠다는 자신에서 공연히 썩는 이들을 위해, 또 그 잡지 그 신문을 위해 비분해 본다.
"왜, 벌써 가시렵니까?"
"네."
나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동경 신문 몇 가지를 뒤적거리다가는 그들이 나의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시간들이 없는 것을 느끼고 서먹해 일어선다.
"거, 소설 좀 몇 회치씩 밀리게 해 주십시오."
"네."
대답은 한결같이 시원하다. 그러나 미리는 안 써지고 쓸 재미도 없다. 이것은 참말 수술이라도 해야 할 악습이다. 이러고 언제 신문소설이 아닌 본격 장편을 한 편이라도 써 보나 생각하면 병신처럼 슬퍼진다.

출판부로 내려와 본다. 여기 친구들도 바쁘다. 돌리는 의자들을 끝까지 치켜 올리고는 그 위에서도 양말을 벗어 내던진 발로 뒤를 보듯 쪼크리고 앉아 팔을 걷고 한 손으로는 담뱃재를 툭툭 떨어 가면서, 한 손으로는 박짝박짝 철필을 긁어 내려가는, 아명 신복씨(兒名信福氏)는 바쁜 사람 모양의 전형일 것이다.
"원고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웬 원고는요?"
난 몇 번 부탁은 받았으나 아직 써 보낸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억된다.
"인제 써 주시면 감사하겠단 말씀이죠."
하고, 역시 여기서 간쓰메[통조림]가 되어 있는 윤 동요작가[윤석중, 당시 『소년중앙』 주간]가 해설해 준다.
"그럼, 인제 써 드리리다."
하였더니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신복씨는 의자를 뱅그르르 돌리며 내려서더니 원고지와 펜을 갖다 놓는다.
"수필 하나 써 주십시오."
"무슨 제목입니까?"
"바다 하나 써 주십시오."
나는 작문 한 시간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바다!"
멀리 쳐다보이는 것은 비에 젖은 북한산이다. 들리는 건 처맛물 떨어지는 소리와 공장에서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다.
"바다!"
암만 바다를 불러 보아도 내가 그리려는 바다는 오백오십 리를 동으로 가야 나올 게다. 한 줄 쓰다 찍 두 줄 쓰다 찍 작문 시간에서 학생들에게 심히 굴지 말아야 할 것을 느낀다. 파리가 날아와 손등에 앉는다. 장마 파리는 구더기처럼 처끈처끈하고 서물거리는 감촉을 준다. 날려 버리면 요 파리란 놈이 달라 붙어 가지고 처음 날릴 때 멀리 달아나지 않는 것을 얼마나 후회할까 생각해 본다. 그러다 보니 '바다'를 써야 할 것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선생님?"
"네?"
"조광朝光 내월호 어느 날 나오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알더라도 모른다고 해야 할 대답이다. 신문들의 경쟁보다 잡지들의 경쟁은 표면화되어 있다. 중앙과 조광에 다 그만치 놀러다니는 나를 이 두 군데서 다 이런 것을 묻기도 하는 반면 요시찰인시할지도 모른다. 모른다가 아니라 그럴 줄 알아야 할 사실이다. 좀 불쾌하다. 또 깨달으니 '바다'를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태준, '장마', 『조광』,1936.10.)

 

**

그[이상李箱]의 ' 오감도'는 나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거의 동시에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지에 발표되었다. 나의 소설의 삽화도 '하융河戎'이란 이름 아래 이상의 붓으로 그리어졌다. 그러나 예기하였던 바와 같이 '오감도'의 평판은 좋지 못하였다. 나의 소설도 일반 대중에게는 난해하다는 비난을 받았든 것이나 그의 시에 대한 세평은 결코 그러한 정도의 것이 아니다. 신문사에는 매일같이 투서가 들어왔다. 그들은 '오감도'를 정신이상자의 잠꼬대라 하고 그것을 게재하는 신문사를 욕하였다. 그러나 일반 독자뿐이 아니다. 비난은 오히려 사내에서도 커서 그것을 물리치고 감연敢然히 나가려는 상허尙虛[이태준]의 태도가 내게는 퍽이나 민망스러웠다. 원래 약 1개월을 두고 연재할 예정이었으나 그러한 까닭으로 하여 이상은 나와 상의한 뒤 오직 십수 편을 발표하였을 뿐으로 단념하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박태원, '이상李箱의 편모片貌', 『조광』, 1937. 6.)

 

**

그러한 때 내가 중앙일보사로 놀라갔었던 것은 아무래도 경거망동이랄 밖에 없다. 내가 2층 조사부에서 심산心汕[노수현]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우연히 공장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가 나를 유심히 보고 나가더니, 다음에 다른 직공이 또 들어온다. 그가 나를 곁눈으로 살피고 나간 뒤에 또 다른 사나이가 들어왔다. 그렇게 드나들기를 무려 수십 명이라면 거짓말이 되지만 7~8명은 착실하다. 어인 까닭을 모르고 있을 때, 이번에는 당시 사회부장 여수가 들어왔다.
"아, 오셨습니까?"
그는 내게 인사를 하고 실내를 둘러본 뒤 말하였다.
"이상 씨 오셨다니, 가셨습니까?"
"안 왔는데요, 누가 왔다구 그래요?"
"아, 지금 공장에서 야단인데요, '오감도' 작자가 왔다구..."
그제야 알겠다.
먼저 들어왔던 직공이 경망되게도 나를 이상으로만 여기고 그래 소문은 쉽사리 퍼지어 '미친놈'이 왔으니 가보자고 일이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상이 내 앞에서 자리가 거북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밖에 없다. (박태원, '제비', 조선일보 1939.2.22.-2.23)

 


조선중앙일보 약사

1922.9. 최남선의 주도로 『동명주보』 창간. 황금정[을지로] 2정목.
        * 1923.4.15. 동명주보 소년컬럼에 박태원(경성고보 2년)의 '입학' 당선

1924.3. 최남선이 주간지인 『동명주보』를 일간지인 『시대일보』로 재창간. 명치정[명동] 2정목.

1924.7. 창간한지 불과 3개월만에 경영난에 빠진 『시대일보』를 최남선 등이 보천교(종교단체)에 신문발행권을 넘기면서 사내 분쟁에 돌입.

1926.11. 『시대일보』의 후신 『중외일보』 창간. 경성부 화동 138.

1931.10. 『중외일보』의 후신 『중앙일보』창간. 경성부 견지동 60.

           ▲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의 몽양 여운형

1933.2.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취임(2월)하여 『중앙일보』를 『조선중앙일보』로 제호 변경(3월). 같은 해 6월 경성부 견지동 111번지(구조선일보 사옥)로 이사. 

1934.6. 자본금 30만원의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여운형 사장 재취임. 
       * 1934.8.1.~ 9.19.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연재

1936.9.5.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와 관련된 손기정 선수의 메달 수여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것(1936년 8월 13일자)이 뒤늦게 발각되어, 자진 휴간 형식을 취했으나 사실상의 무기한 발간정지 조치를 당함. 장기간의 정간으로 재정이 악화되고, 속간續刊 허락 조건으로 총독부에서 자신들이 지명하는 친일파 인물로 사장을 교체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 신문법 상에서 발행정지 또는 휴간 후 1년2개월 내에 속간되지 못할 경우 발행권이 취소된다는 규정에 따라 1937년 11월 5일 폐간됨.

 

**

"손孫 군이 일착하였다는 쾌보는 라디오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기쁘고 감격된 것은 무어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곧 호외를 내게 하였지요.
손기정孫基禎군 쾌승은 누구나 다 진심으로 경하하며 감격할 일입니다. 그러나 손 군이 쾌승함을 멋없이 떠들어 상점에서 상품을 보내겠다느니 누구는 학자學資를 대어주겠다니 하는 것은 손 군 자신도 그리 반가워할 것 못되고 사회적로도 아무런 의의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봅니다. 참으로 쾌승한 손 군을 위하야 사업을 한다면 기념체육관을 창설하야 금후 조선 청년의 체육향상을 꾀함이 가장 좋을까 합니다." (여운형, 『삼천리』, 1936.11.)

**
"아까 저는 스타디움에서 남 형[남승룡]을 끌어안고 통곡하였습니다. 군중 틈에서 권 선생을 붙잡고도 울었습니다. 승리는 기쁨보다도 눈물을 먼저 가져오나 봅니다. 동경에서 전화가 자꾸 들어옵니다. 그러나 서울서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물론 저의 소식은 아까의 라디오를 통하여 들려졌으리라고 믿습니다. 내 눈앞 앞에는 고향의 모든 정경이 떠오릅니다. 기뻐해주실 여러분의 얼굴도 그려집니다. 그러면서 나는 또 눈물이 솟습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눈물만 나오나요." (손기정,『중앙』, 19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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