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갑오농민전쟁] 순라군에게 붙잡힌 '대감'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24. 13:31

칠월 백중날[음력7월 보름].
달이 휘영청 밝은 한밤중의 일이다.
웬 체소한 중년 선비 하나가 장안 대로상에서, 정확하게 말하여 황토마루 서편 야주개[야조현, 현재의 당주동] 큰길 위, 그것도 바로 행길 한복판에가 가랑이를 쩍 벌리고 서서 오줌을 좔좔 깔기고 있었다.
뎅 뎅 인경이 울린 게 그게 벌써 언제냐?
꽝 꽝 사대문이 닫히고 거리 위에 행인들의 발자취가 끊인 지 이미 오래다.

▲ 동아일보, 1972.4.22.

저마다 꽁무니에다 육모방망이 하나씩 찬 순라군들이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지금 한창 거리거리 골목골목으로 순을 돌고 있는 판이다. 
[...]
한동안이나 걸려서 늘어지게 볼일을 다 보고 나자 부르르 진저리를 한번 치고, 괴춤을 여민 다음에 지척지척 앞으로 몇 발짝 걸어나가다가,
[....]
"아니, 가만있자. 예가 참 야주개랬지?…… 야주개면…… 바루 조금 더 가 오궁굴[신문로2가 방면]이 아닌가?…… 그러구보니 섬월이 본 지두 오래구나…… 예라, 기위 예까지 온 김이니 섬월이헌테루 가볼까?……[...]"
[...]
취한다 소리를 연발하고 술주정꾼은 바로 활개짓을 해가면서 다시 걷기 시작하였는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걸음걸이는 문자 그대로 '갈지자'요, 가는 방향도 오궁골[신문로 2가 방면]과는 정반대 되는 황토마루 쪽이다. 그러고 걸어가며 그는 계속 중얼중얼거렸다.

[...]
그 사이에 황토마루 네거리는 벌써 지나고, 이때 혜정교 다릿목까지 왔는데, 술취한 이는 지금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나 알고 있는지 연해 '묘방'[순라군에게 할 변명거리]만 찾으면서 다리를 건너서자 큰 길에서 바른편으로 꺽어져 선전線廛[비단가게] 병문屛門[동네어귀의 길가] 안으로 들어섰다.

▲ 광통교를 건너는 고종의 어가행렬 (1895년 이전)

[...]
"아니, 그래, 묘방이 정말 없단 말이야? 이거 야단인데…… 가만있자……참, 정수동[정지윤]두 한번 순라군한테 잡힌 적이 있지. [...]"
이 사이에 그는 모교다리로 나왔는데, 곧장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릿목에서 왼편으로 꼬부라져 큰광교 쪽을 바라고 북쪽 천변을 걸어내려가는 꼴이 바로 자기 갈 데를 잘 알고 걷고 있는 거나 같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역시 갈지자요, 저 혼자 지껄이는 것도 여전하다.
[...]
"양반이 못되고 역관 집에 태어나서, 제 재주를 한번 펴보지 못허구 오십평생을 불우허게 지내다 죽은 게, 그게 애석해서 그러는거지 죽기야 잘 죽었지 더 살면 뭘허누?…… [...]"
한때 그처럼 흥분했던 것이 어느 틈엔가 많이 가라앉은 모양으로 그는 연방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큰 광교 다릿목까지 와서 또 발길을 멈추었다.
"가만있자…… 대체, 예가 어디냐?……"
그는 몽롱한 눈을 들어 앞에 걸린 돌다리를 잠깐 살펴보다가,
"아니, 이게 수표교 아니라구?…… 내가 어떻게 여길 왔을까?……"
취한 눈에 큰광교를 수표교로 잘못 본 모양이다.
 그러한 말을 한마디 하고는 바로 개천 건너 남쪽 천변을 건너다보며,
"영감이 바루 저 뒷골목에서 살었겄다……"
[...]
꼬끼요─
"이것봐라, 닭이 운다……"
술취한 사람이 새삼스럽게 놀라,
"이러다 길에서 밤을 밝히겠는걸. 그만 집으루 가야지…… 그런데 대체 어디루 해서 가야 헌다?…… 예가 수표교니까……"
하고 방향을 잡느라 연해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는 판인데,
"이게요, 수표교가 아니라 큰광교올시다, 나으리……"
누군지 다리 아래서 이렇게 일러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성이 애녀석이다.
"거, 웬놈이냐?……"
술주정꾼은 천변가로 한걸음 나서서 허리를 구부정하고 목을 길게 늘여 소리난 곳을 살펴보았다.
물이 많지 않아 개천 한복판으로만 흐르고 양옆은 그대로 마른 바닥인데, 다리밑으로 북쪽 개천벽에 붙어서 다 떨어진 거적 두어 닢에 둘려 있고, 그 틈으로 낯바닥에 양괭이를 그린 여남은 살 먹은 깍정이 녀석 하나가 쑥대강이[봉두난발]를 쑥 내밀고 길 위를 쳐다보며,
"헤헤, 나으리. 제가 알으켜드리지 않았더라면 댁을 못 찾어가실 뻔했습죠? 둔이나 한푼 던져줍쇼. 헤헤헤……"
하고 눈을 끔벅끔벅한다.
"예라, 이녀석……"
술취한 이는 너무 머리를 직수그리고 서서 다리밑을 내려다보다가 하마터라면 개천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뻔하고 깜짝 놀라서 얼른 뒤로 두 발짝 물러서며,
"아, 내가 술이 취헌 줄 아느냐? 내 아무렇기구러서니 수표교허구 큰광교를 분간 못헐까? 아까 헌 말은 그저 짐짓 한번 그래봤을 뿐이지, 에헴!"
바로 점잔을 빼어 큰기침까지 한번 하였으나 깍정이녀석에게는 그 꼴이 도리어 가소로웁게만 느껴졌던 모양이다. 
"체!……"
하고 혀를 한번 차며,
"둔 한푼 주기가 그렇게두 아까워?……"
아주 비양스럽게 한마디 하다가 문득 좌편을 바라보더니,
"잘코사니! 어서 열음기[조선시대 통행금지(인경과 파루 사이) 시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가 파루 후에 볼기 열대를 때려 내보내는 것]나 가서 치르지. 히히히……"
가볍게 조소를 퍼붓고 나자 쑥대강이는 다시 거적 틈으로 스르르 움츠러져 들어가 버렸다.
"아니, 저런 고현놈이─"
술주정꾼은 호령을 내리다가 중동무이해 버리고 슬며시 돌아서서 큰길로 걸어나갔다. 이때 서린동 골목에서 천변으로 나온 순라군 둘이 그를 발견하고 부리나케 쫒아오고 있었는데 뒤늦게나마 그 발자취라도 들은 모양이다. 

술취한 이는 연해 활개짓을 해가며 종로 네거리쪽을 바라고 바로 점잖게 걷는다. 아직도 좀 비척거리기는 하지만 이제는 갈지자가 아니라 제법 여덟팔자에 가까웁다.
그 뒤를 쫒는 순라군들은 둘이 다 키가 컸는데, 하나는 말상이요 또 하나는 들창코다.
[...]

▲ 1898년 이후의 종로

앞을 선 양반자는 뒤도 안 돌아다보고 좀 비척거리기는 하지만 점잖은 걸음걸이로 종로네거리로 나오자 동편으로 꼬부라져 동관[창덕궁] 쪽을 바라고 걸어간다. 
[...]
"아니 여보. 다 왔는데 어디루 자꾸 가우?"
열음기막은 바로 종로 뒤켠에 있는 것이다. 
술취한 이는 여전히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나가며 고개만 뒤로 돌려 말상이 한 말에 대답을 한다. 
[...]
술취한 이는 앞을 서고 두 순라군들은 뒤를 따르고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철물교 다리[탑골공원 앞 종로거리에 있던 개천다리]를 건너서자 말상이 또 물었다. 
"아, 머지 않다더니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요?"
"조금만 더 가면 되우."
술취한 이는 돌아다도 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며 원각사[탑골공원 자리] 앞을 지나 교동 병문 앞에 이르자 그 안으로 들어섰다.
말상이 자칫 앞을 서고 들창코가 뒤를 따라 순라군들도 병문 안으로 들어섰다.

둥당 둥당……
둥당 둥당……

얼마 안가서 어디선지 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라군들이 서로 돌아보며 눈을 찡긋한다.
걷는 대로 장구소리가 차차 크게 들려온다.
마침내 길 왼쪽에 드높은 솟을대문이 나타났다.
김좌근, 김병기 부자가 사는 집이다. 
...
술취한 이는 그저 곁눈으로 한번 흘겨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을 뿐으로 그 앞을 지나쳤으나, 순라군들을 그렇지 못하였다.
...
어느덧에 교동을 다 지나왔는데 대체 집이 어딘지 술주정꾼은 그대로 계속 걸어 구름재雲峴를 바라보고 올라간다. 
"아니 여보, 대체 어디까지 가는거요?"
말상이 다시 한번 물었다. 말투가 이제는 시비조다. 이거 혹시 주정뱅이한테 농락이나 당허구 있는 게 아니야? 허턱대구 따러오는 게 아닌 걸 그랬나보아…… 다 늦게 그렇나 생각이 들기라도 하였는지 모르겠다. 
"예. 이제 다 왔소."
[...]
"정말 다 왔다니 대체 어느 집이기에?……"
그들이 걸음을 멈추고 서 있는 길 옆으로 개천이 흐르고 돌다리가 하나 걸려 있었다. 그 돌다리 너머로 저만치 들어간 곳에 솟을대문이 있고 대문 좌우로 행랑채, 행랑채에 죽 잇대어 담이 삥 둘려 있는데 술취한 이는 그 집을 빤히 바라다보고 서서,
"글쎄 다 왔대두 그러는구려."
하고 바로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저 집이?…… 순라군들은 좀 어리둥절해 하는 모양으로 물끄러미 그 집을 바라본다.
그것은 터전도 아주 널찍하게 잡아서 제도에 맞게 지은 상당히 큰 집이었다. 
바로 내노라 하고 본래는 행세하던 사람이 살던 집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두고 도무지 거두지를 않아서 이제는 퇴락할 대로 퇴락하였다.
대문은 한쪽으로 씰그러지고 장원은 군데군데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사이사이로 사랑채와 안마당과 안채가 다 들여다보이는데,
아무데서도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는다.
달빛이 가득한 안마당 한구석에 장명등이 하나 서 있는 모양인데 거기도 불은 켜 있지 않았다.
아무도 사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꼭 흉가 같은 집이다. 
들창코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술취한 이의 소매를 놓는 줄도 모르게 놓고서,

"아니, 저건 운─"
하고 말을 꺼내다 만 채 좀 어리뻥뻥한 모양으로 말상을 돌아다보는데, 술취한 이는 그대로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예까지 떠러들 오느라구 수고했소. 자아 누추한 곳이나마 잠깐 들어들 가십시다."
한마디 하고는 돌다리를 썩 건너서자, 그 한옆으로 씰그러지고 지붕 위에는 풀까지 난 솟을대문을 바라고,
"에헴!"
"에헴!……"
연방 큰기침을 해가며 걸어들어간다. 
순라군들은 그대로 다리 너머에가 서 있는 채,
"아니, 저건 운…… 운현궁雲峴宮인데……"
하고 들창코가 한마디.
"글쎄 말이야……"
하고 말상도 한마디.
둘이 다 흡사 도깨비에게라도 홀린 것 같은 얼굴들을 해가지고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그 사이에 술취한 이는 대문 앞까지 다 가서 발길을 멈추고 서자 행랑 들창을 쳐다보며,
"이애 문열어라─"
기탄없이 큰소리로 외친다.
순라군들은 눈이 그만 휘둥그래가지고 서로 돌아보며,
"아니, 저게 그러니까…… 바루 흥선대감인 모양이지?"
"아마 그런 모양일세…… 제기, 재수가 없으려니까……"
들창코가 망건 뒤를 긁적긁적하며 돌아서니까 말상도 돌아서서, 둘이 도로 교동 쪽을 바라고 터덜터덜 내려가며,
"흥선대감, 흥선대감 허드니 위인이 과연 개차반이군…… 그래 종반宗班 명색이 그 꼴을 허구서 술먹구 돌아다니다가 순라군한테 붙잽히구…… 그게 그래 무슨 꼴이야? 원, 참……"
"아 그러기에 세상에서들 개망나니니 모주꾼이니 그러구 놀려들 대는 게 아닌가?……"  (박태원, 『갑오농민전쟁』3권, 1989, 깊은샘, 140-158)

 

▲ 흥선대감의 동선 (1907 「신경성전도」에 표시)

 

'친절한 구보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유정-따라지] 사직동  (0) 2019.04.25
김옥균이 살던 집  (0) 2019.04.24
추월색  (0) 2019.04.23
탑동/탑골/파고다 공원  (0) 2019.04.23
유곽  (0) 2019.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