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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따라지] 사직동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25. 18:12

쪽대문을 열어 놓으니 사직공원이 환히 내려다보인다. 인제는 봄도 늦었나 보다. 저 건너 돌담 안에는 사쿠라꽃이 벌겋게 벌어졌다. 가지가지 나무에는 싱싱한 싹이 돋고, 새침히 옷깃을 핥고 드는 요놈이 꽃샘이겠지. 까치들은 새끼 칠 집을 장만하느라고 가지를 입에 물고 날아들고……. 이런 제기랄, 우리집은 언제나 수리를 하는 겐가. 해마다 고친다, 고친다, 벼르기는 연실 벼르면서. 그렇다고 사직골 꼭대기에 올라붙은 깨웃한 초가집이라서 싫은 것도 아니다. 납작한 처마 밑에 비록 묵은 이엉이 무더기 무더기 흘러내리건 말건, 대문짝 한 짝이 삐뚜로 박히건 말건, 장독 뒤의 판장이 아주 벌컥 나자빠져도 좋다. 참말이지 그놈의 부엌 옆의 뒷간만 좀 고쳤으면 원이 없겠다. 밑둥의 벽이 확 나가서 어떤 게 부엌이고 뒷간인지 분간을 모르니. 게다 여름이 되면 부엌 바닥으로 구더기가 슬슬 기어들질 않나. 이걸 보면 고대 먹었던 밥풀이 그만 곤두서고 만다. 에이 추해, 망할녀석의 영감쟁이 그것 좀 고쳐 달라고 그렇게 성화를 해도…….

쪽대문이 도로 닫겨지며 소리를 요란히 낸다. 아침 설거지에 젖은 손을 치마로 닦으며 주인마누라는 오만상이 찌푸려진다. 그러나 실상은 사글세를 못 받아서 약이 오른 것이다. 영감더러 받아 달라면 마누라에게 밀고 마누라가 받자니 고분히 내질 않는다. 여태껏 미뤄 왔지만 느들 오늘은 안 될라, 마음을 아주 다부지게 먹고 건넌방 문을 홱 열어 젖힌다.

"여보! 어떻게 됐소?”
"아 이거 참 미안합니다. 오늘두…….”
텁수룩한 칼라 머리를 이렇게 긁으며 역시 우물쭈물이다.
"오늘두라니 그럼 어떡할 작정이오?”
하고 눈을 한번 크게 떠보였다마는 이 위인은 암만 얼러도 노할 주변도 못 된다. 나이가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왜 이리 할 일이 없는지 밤낮 방구석에 팔짱을 지르고 멍하니 앉아서는 얼이 빠졌다. 그렇지 않으면 이불을 뒤쓰고는 줄창같이 낮잠이 아닌가. 햇빛을 못 봐서 얼굴이 누렇게 찌들었다. 경무과 제복공장의 직공으로 다니는 즈 누이의 월급으로 둘이 먹고 지낸다.

[...]

낮에 사직동 공원으로 올라가면 아키코는 가끔 톨스토이를 만난다. 굵은 소나무 줄기에 등을 비겨 대고 먼하늘만 정신없이 바라보고 섰는 톨스토이다. 아키코가 그 앞을 지나가도 못 본 척하고 들떠보도 않는다. 약이 올라서 속으로 망할 자식, 하고 욕도 하여 본다. 그러나 나중 알고 보면 못 본 척이 아니라, 사실 눈뜨고 못 보는 것이다. 그렇게 등신같이 한눈을 팔고 섰는 톨스토이다. 이걸 보면 아키코는 여자고보를 중도에 퇴학하던 저의 과거를 연상하고 가엾은 생각이 든다. 누님에게 얻어먹고 저러고 있는 것이 오죽 고생이랴. 그리고 학교 때 수신선생이 이야기하던 착하고 바보 같다던 그 톨스토이가 과연 저런 건지, 하고 객쩍은 조바심도 든다. 아키코는 기침을 캑 하고 그 앞으로 다가선다. 눈을 깜박깜박하며,
“선생님! 뭘 그렇게 생각하셔요?”
하고 불쌍한 낯을 하면,
“아니오.”
하고 어색한 듯이 어물어물하고 만다.
“그렇게 섰지 마시고 좀 운동을 해보셔요.”
하도 딱하여 아키코는 이렇게 권고도 하여 본다.

“오늘은 방을 좀 치워야 하겠소. 여기 내 조카도 지금 오고 했으니까.”

주인마누라는 약이 바짝 올라서 매섭게 쏘아본다. 방에서만 꾸물꾸물 방패막이를 하고 있는 톨스토이가 여간 밉지 않다.
“아, 여보! 방의 세간을 좀 치워 줘요. 그래야 오는 사람이 들어가질 않소?”
“사날만 더 참아 줍쇼. 이번엔 꼭 내겠습니다.”
“아니 뭐 사글세를 안 낸대서 그런 게 아니오. 내가 오늘부터 잘 데가 없고 이 방을 꼭 써야 하겠기에 그래서 방을 내달라는 것이지.”

양복바지를 거반 엉덩이에 걸친, 버드렁니가 이렇게 허리를 쓱 편다. 주인마누라가 툭하면 불러온다던 저 조카라는 놈이 필연 이걸 게다. 혼자 독학으로 부청에까지 출세를 한 굉장한 사람이라고 늘 입에 침이 말랐다. 그러나 귀 처진 눈은 말고, 헤벌어진 입과 양복 입은 체격하고 별로 굉장한 것 같지 않다. 게다 얼짜가 분수 없이 뻐팅기려고,
“참아 주시던 길이니 며칠만 더 참아 주십시오.”
이렇게 애걸하면,
“아 여보! 당신도 그래 사람이오?”
하고 제법 삿대질까지 할 줄 안다.
“저런 자식두! 못두 생겼다. 저게 아마 경성부 고즈카이[小使]인 거지?”
“글쎄, 그래도 제법 넥타일 다 잡숫구.”
하고 손가락이 들어가 문의 구멍을 좀더 후벼판다. 마는 아키코는 구렁이(주인마누라)의 속을 빠안히 다 안다. 인젠 방세도 싫고 셋방 사람을 다 내쫓으려 한다. 김마까나 아키코는 겁이 나서 차마 못 건드리고 제일 만만한 톨스토이로부터 우선 몰아내려는 연극이었다.

“저 구렁이 좀 봐라, 옆에 서서 눈짓을 해가며 자꾸 시키지.”
“글쎄 자식도 얼간이가 아냐? 즈 아즈멈 시키는 대로 놀구 섰게.”
“어쭈, 얼짜가 뻐팅긴다. 지가 우와기를 벗어 노면 어쩔 테야 그래? 자식두!”
“톨스토이가 잠자쿠 앉았으니까 약이 올라서 저래, 맛부리는 게 밉살머리궂지? 자식 그저 한 대 앵겨 줬으면.”
“내가 한 대 먹이면 저거 고택골 간다. 그러니깐 아키코한테 감히 못 오지 않어.”
주먹을 이렇게 들어 뵈다가 고만 영애의 턱을 치질렀다. 영애는 고개를 저리 돌리어 또 빼쭉하고,
“얘 이럼 난 싫단다!”
“누가 뭐 부러 그랬니, 또 빼쭉하게?”
하고 아키코도 좀 빼쭉하다가 슬슬 눙치며,
“그래 잘못했다. 고만두자, 쐭쐭쐭─”
영애의 턱을 손등으로 문질러 주고,
“쟤! 저것 봐라, 놈은 팔을 걷고 구렁이는 마루를 구르고 야단이다.”
“얘 재밌다, 구렁이가 약이 바짝 올랐지?”
“저 자식 보게, 제 맘대로 남의 방엘 막 들어가지 않어?”
아키코가 영애에게 눈을 크게 뜨니까,
“뭐 일을 칠 것 같지? 병신이 지랄한다더니 정말인가베!”
“저 자식이 남의 세간을 제 맘대로 내놓질 않나? 경을 칠 자식!”
“그건 나무래 뭘 해. 그저 톨스토이가 바보야! 그래도 부처같이 잠자코 있지 않아. 세상엔 별 바보두 다 많어이!”
아키코는 그건 들은 체도 안 하고 대뜸 일어선다. 미닫이가 열리자 우람스러운 걸음. 한숨에 툇마루로 올라서며 볼멘소리다.

“아니 여보슈! 남의 세간을 그래 맘대로 내놓는 법이 있소?”
“당신이 웬 챙견이오?”
얼짜는 톨스토이의 책상을 들고 나오다, 방문턱에 우뚝 멈춘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저주저하는 양이 대담한 아키코에 적이 놀란 모양…….

[...]
“사글세를 내랬으면 좋지, 내쫓을려고 하니까 그렇게 분란이 일구 하는 게 아니야?”
“아닙니다. 누가 내쫓을려고 그래요. 세를 내라구 그러니깐 그렇게 아키코란 년이 올라와서 온통 사람을 뜯어먹고 그러는군요!”
“말마라. 내쫓으려구 헌 걸 아는데 그래, 요전에도 또 한번 그런 일이 있었지?”
순사는 노파의 뒤를 따라오며 나른한 하품을 주먹으로 끈다.

[...]

“나리! 저 좀 보세요. 문 부서진 것하구 대접 깨진 걸 보셔두 알지 않어요?”
“어떤 조카가 죽었어, 그래?”
“이것이 그렇게 죽도록 경을 치고도 바보가 돼서 이래요!”
“바보면 죽어두 사나?”
하고 순사는 고개를 디밀어 마루께를 살펴보니 딴은 그릇은 깨지고 문은 부서졌다. 능글맞은 노파가 일부러 그런 줄은 아나, 그렇다고 책임상 그냥 가기도 어렵다. 퍽도 극성스러운 늙은이라 생각하고,
“누가 그랬어, 그래?”
“저 아키코가 혼자 그랬어요!”
“아키코! 고반[파출소]까지 같이 가.
“네! 그러세요.”

하도 여러 번 겪는 일이라, 이제는 아주 익숙하다. 저고리를 갈아입으며 웃는 얼굴로 내려온다. 그러나 순사를 따라 대문을 나설 적에는 고개를 모로 돌리어 구렁이에게 몹시 눈총을 준다. 순사는 아키코를 데리고 느른한 걸음으로 골목을 꼽든다.

쪽다리를 건너니 화창한 사직원 마당, 봄이라고 땅의 잔디는 파릇파릇 돋았다. 저 위에선 투덕거리는 빨래 소리. 한옆에선 풋볼을 차느라고 날뛰고 떠들고 법석이다. 뿌웅, 하고 음충맞게 내대는 자동차의 사이렌. 남치마에 연분홍 저고리가 버젓이 활을 들고 나온다. 그리고 키 훌쩍 큰 놈팡이는 돈지갑을 내든다.

“너 왜 또 말썽이냐?”
하고 순사는 고개를 돌리어 아키코를 씽긋이 흘겨본다. 그는 노파가 왜 그렇게 아키코를 못 먹어서 기를 쓰는지 영문을 모른다. 노파의 눈에도 아키코가 좀 귀여울 텐데, 그렇게 미울 때에는 아마 아키코가 뭘 좀 먹이질 않아 그랬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 다 제쳐놓고 아키코만 씹을 리가 없다. 생각하다가,
“뭘 말썽이유, 내가?”
“네가 뭐 쥔마누라를 깨물고 사람을 죽이고 그런다며? 그리구 요전에도 카페서 네가 손님을 쳤다는 소문도 들리지 않니?”
하고 눈살을 접고 웃어버린다. 얼굴 똑똑한 것이 아주 할 수 없는 계집애라고 돌릴 수밖에 없다.
“난 그런 거 몰루!”

아키코는 땅에 침을 탁 뱉고 아주 천연스레 대답한다. 그리고 사직원의 문간쯤 와서는,
“이 담 또 만납시다.”
제멋대로 작별을 남기고 저는 저대로 산 쪽으로 올라온다.

활텃길[황학정]로 올라오다 아키코는 궁금하여 뒤를 한번 돌아본다. 너무 기가 막혀서 벙벙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주먹으로 나른한 하품을 끄는 순사. 한편에선 날뛰고, 자빠지고, 쾌활히 공을 찬다. 아키코는 다시 올라가며 저도 남자가 됐더라면 ‘풋볼’을 차볼걸, 하고 후회가 막급이다. 그리고 산을 한바퀴 돌아 내려가서는이번엔 장독대 위에 요강을 버리리라 결심을 한다. 구렁이는 장독대 위에 오줌을 버리면 그것처럼 질색이 없다.

“망할년! 이 담에 봐라! 내 장독 위에 오줌까지 깔길 테니!”

이렇게 아키코는 몇 번 몇 번 결심을 한다. (『조광』,1937.2.)


어디든 좋았다. 동경이든, 상해든, 만주든, 오직 내가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만 있으면 나는 틀림없이 행복될 것같이 생각되어 내가 참말 오래 전부터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번개같이 기억 속에서 찾아내고 내게는 정말 이 길밖에는 없다고 작정하였던 것이나 그러나 대체 여비는 하고, 당연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 나는 갑자기 실망을 느끼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뜻밖에도 사직동으로 나는 대체 어디를 어떻게 걸어서 여기까지 이르렀는지를 알아낼 수 없었으나 이제 또 어디로 가야 옳은가 생각하였을 때 가장 필연한 형세로 이 동리에 사는 벗이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

그러나 나의 부름에 응하여 나온 그의 집 하인은 동저고리 바람인 나를 일종 모멸을 가져 훑어보고, 간단히 한마디, 안 계십니다고 말하였다. 나는 갑자기 전신에 피로를 느끼며, 벗이 일찍이 신경쇠약의 고통을 호소하고, 수이 어디로든 전지요양을 가겠노라 하던 것을 생각해 내었다. 나는 그대로 사직공원을 향하여 기운 없는 다리를 내어 놓으며, 그가 아직 서울에 남아 있는 동안에,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하였던 것인가 뉘우쳤으나, 문득 그 집 사람의 안 계십니다, 한마디로는 그의 소식이 분명치 않아, 혹은 어디 잠깐 외출하고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깨달았으나, 다시 돌아가 그것을 물을 기력도 없이, 나는 그대로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간밤에 내린 비는 이곳 풍경을 좀더 삭막하게 하여 놓은 듯싶어, 내가 낙엽을 밟으며 술 속을 찾아들어, 그곳 돌 위에 지친 몸을 의지하여 앉았을 때, 내 마음에는 다시 새로운 슬픔이 솟아나왔다. 차차로이 저물어 가는 하늘을 우러러, 아무런 빛도 이제는 바랄 수 없는 내 앞길을 한숨지었을 때 나는 문득 의외의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박태원, '거리', 1936)

 

**

그때 나와 유정은 사직동 한 구석에서 앞뒷집에 살고 있었다. 유정의 누님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집  뒤에 조그만 기와집 한 채를 사고 있었는데 그 집에 유정은 기류寄留하고 있었다. 매부되는 이는 충청도 땅에 금광을 하러 가고 없고 그의 누님 혼자만 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생활이 그리 유족裕足치 못한 것 같았다. 혹 군의 매부 되는 이가 작은 집이라도 하고 있어서 큰댁은 살뜰하게 돌보지 않았던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매부란 이를 본 적이 없다. 유정은 본디 입이 무거운 사람이므로 이러한 내정內情까지는 토파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었다. 유정도 한 때는 매부의 광산에 금金 잡으러 가 있었다. 나는 저녁을 먹은 뒤 개천 골목을 지나 그의 집을 찾는 것이 예例가 되어 있었다. 그도 가끔 우리집에 왔다. 유정이 있는 방은 키 낮은 대문 옆마루 건넛방인데 서편으로 개폐할 수 없는 작은 영창이 있었고 두꺼운 조선 종이로 봉해 두었었다. (이석훈, '유정의 면모 편편', 『조광』, 1939.12.)

 

**

각설, 누님댁에 거처할 때 '히스테리'가 심한 누님의 구박으로 그렇게 게으르던 유정이도 할 수 없이 누님이 공장엘 간 후면 나와서 대문을 걸고 누님이 돌아오면 열고 했으며, 당시 유정의 밥값으로 하는 사무라고는 사실 이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를 찾으려면 그의 누님의 출근시간 전후로 가서 (심심하고 급하니까) 대문을 쿡 찔러보고 걸렸으면 마음놓고 어쩌니 저쩌니 떠들었다. "유정아" 하고 불렀던 것이다. (안회남, '겸허 - 김유정전', 『문장』, 19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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