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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冊肆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4. 30. 11:51

구보는 남몰래 안잠자기에게 문의하였다. 안잠자기는 세책貰冊집에는 어떤 책이든 있다는 것과, 일 전이면 능히 한 권을 세내올 수 있음을 말하고, 그러나 꾸중들우. 그리고 다음에, 재밌긴 『춘향전』이 제일이지, 그렇게 그는 혼잣말을 하였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이튿날 안잠자기가 '주인마님' 몰래 세를 내온 한 권의 춘향전을 나는 신문에 싸들고 약방으로 나가 이층 구석진 방에서 반일半日을 탐독하였다... 다음날 구보는 역시 안잠자기의 의견에 의하여 『춘향전』 다음으로 재미있는 『심청전』을 세내다 읽었다. 그러나 또 그 다음날 『소대성전』을 얻어 보려 하였을 때 어머니는 마침내 우리의 '비밀'을 알아내고 그래 꾸중을 단단히 들은 안잠자기는 다시 나의 그러한 심부름을 하려고는 안 하였다. 어린 구보는 얼마 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어느 날 종각 모퉁이에서 (아마 어데 책사冊肆에서 불이라도 났든 게지……) 한 구퉁이가 타고 누르고 한 '얘기책'을 산과 같이 싸놓고서 한 권에 이 전씩 삼 전씩에도 방매하는 사나이를 발견하자 그는 곧 안잠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매일같이 구하야 보름 뒤에는 오륙십 권의 얘기책이 어린 구보의 조고만 책상 밑에 그득 쌓였다. (박태원, '순정을 짓밟은 춘자', 19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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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한서방(본정2-10)

동경서 돌아온 지가 사오 년이니, 매삭에 십 원씩만 저금을 하였더라도 오륙백 원의 저축은 있으련마는 형식은 아직도 이 생활을 자기의 진정한 생활로 여기지 아니하고 임시의 생활, 준비의 생활로 여기므로 몇 푼 아니 되는 월급을 저축할 생각은 없이 제가 쓰고 남는 돈은 가난한 학생에게 나눠 주고 말았다. 그러나 형식은 책을 사는 버릇이 있어 매삭 월급을 타는 날에는 반드시 일한서방에 가거나, 동경 마루젠[丸善] 같은 책사에 사오 원을 없이하여 자기의 책장에 금자 박힌 책이 붇는 것을 유일의 재미로 여겼었다.

남들이 기생집에 가는 동안에, 술을 먹고 바둑을 두는 동안에, 그는 새로 사온 책을 읽기로 유일한 벗을 삼았다. 그래서 그는 붕배간에도 독서가라는 칭찬을 듣고 학생들이 그를 존경하는 또한 이유는 그의 책장에 자기네가 알지 못하는 영문, 덕문의 금자 박힌 책이 있음이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 조선 사람의 살아날 유일의 길은 우리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에 가장 문명한 모든 민족, 즉 우리 내지(일본) 민족만한 문명 정도에 달함에 있다 하고, 이리함에는 우리나라에 크게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하기를, 이런 줄을 자각한 자기의 책임은 아무쪼록 책을 많이 공부하여 완전히 세계의 문명을 이해하고 이를 조선 사람에게 선전함에 있다 하였다. 그가 책에 돈을 아끼지 아니하고 재주 있는 학생을 극히 사랑하며 힘있는 대로 그네를 도와 주려 함도 실로 이를 위함이라. 
그러나  천 원 을 어찌하는고 하고 형식의 마음은 괴로웠다. 전달에 탄 월급 삼십오 원 중에 오 원은 플라톤 전집 값으로 동경 책사에 부치고 십 원은 학생들에게 갈라 주고, 팔 원은 주인 노파에게 밥값으로 주고, 이제 그 돈지갑에 남은 것이 오 원 지표 한 장과 은전이 좀 있을 뿐이라. 아아,  천 원을 어찌하는가 하고 형식의 마음은 더욱 괴로워 간다.  천 원! 천 원!   천 원 이 어디서 나는가.... 하고 벌떡 일어나 방에 들어와 앉았다. 이 집이 천 원짜리가 될까 하였다. 또 책장에 끼인 백여 권 양장책이 천 원짜리가 될까 하였다. 옳지, 저 한 책의 저작권은 각각 천 원 이상이라 하였다. 나도 저만한 책을 써서 책사에 팔면 천 원을 받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영문으로 글짓기를 공부하여 가지고 그렇게 된 뒤에 얼마 동안 저술에 세월을 허비하고, 그 원고를 미국이나 영국에 보내고, 미국이나 영국 책사 주인이 (그 원고를 한번 읽어 보고) 그 다음에 그 책사에서 그 원고를 출판하기로 작정하고, 그 다음에 그 책사 주인이 우편국에 사람을 보내어 이형식의 이름으로 천 원 환을 놓으면 그것이 배로 태평양을 건너와 경성우편국에 와…… 아이구 너무 늦다…… 그것을 언제…… 하였다. (이광수, 『무정』,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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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낮에 조부 몰래 빠져나와 총독부 도서관에 들어가 앉아서 반나절을 보냈다. 급히 참고하여야 할 것은 아니나 어디서 시간 보낼 데가 없기 때문이다. 제삿날 집에 들어앉았으면 영감님이 안방으로 드나들며 잔소리하는 것도 듣기 싫고, 안에서는 여편네들이 법석들을 하는 통에 부쩝을 할 수 없는데다가 생전 붙잡아보지 못하던 모필로 조부 앞에 꿇어앉아서 축문을 쓰기도 싫고 제물을 괴어 올리는 데 시중을 들기도 싫었다. 하여간에 오늘 은 조부의 분부가 내리기 전에 일찌감치 빠져나왔다가 어둡거든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 대판옥호서점(본정1-28)

덕기는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에 도서관에서 나와서 어디 가 차나 먹을까 하고 진고개 향하였다. 병화 생각도 나기는 하였지만 병화를 끌면 또 술을 먹게 되고 게다가 사람을 꼬집는 그 찡얼대는 소리가 머릿살도 아파서 혼자 조용히 돌아다니는 편이 좋았다. 우선 책사에 들어가서 책을 뒤지다가 잡지 두어 권을 사들고 나와서 복작대는 거리를 예서 제서 흘러나오는 축음기 소리를 들어가며 올라갔다. (염상섭, 『삼대』,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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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도 이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비는 한결같이 구질구질 내린다. 유성기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누구든지 한 사람 기어이 만나보고만 싶다. 대판옥大阪屋이나 일한서방日韓書房쯤 가면 어쩌면 월파月坡나 일석一石을 만날지도 모른다. 
'친구?' 
나는 이것을 생각하며 낙랑을 나서 비 내리는 포도를 걷는다. 
[...]
대판옥서점으로 들어섰다. 책을 보기 전에 사람부터 둘러보았으나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신간서新刊書도 변변한 것이 보이지 않는데 장마 때에 무슨 먼지나 앉았을라고 점원이 총채를 가지고와 두드리기 시작한다. 쫓기어나와 일한서방으로 가니 거기도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는 듯하였는데 그 아는 얼굴이 아니었던 속에서 한 사람이 번지르르한 레인코트를 털면서 내앞으로 다가왔다. (이태준, '장마',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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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실없는 수작에 철수가 당장 대꾸를 못하고 그대로 쓴웃음만 입가에 띠웠을 때 문득 길가 책사에서 나온 맨머리 바람의 소년 하나이

"선생님!"

하고 아는 체를 한다. 돌아다보자 철수는 곧 걸음을 멈추었다.

"너 어디 가니?"

"연필 사 가지구 지금 들어가는 길이예요."

"그럼 마침 잘됐다. 나두 너의 집으로 가는 길이야." (박태원, 『여인성장』,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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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당(관훈정 130)

점심을 마치고 나선 세 흰모시옷의 처녀는 명치정으로 나가 진고개를 걸었다. 책사로 들러 신간들을 대강 훑어 보고 나와 화옥은 캔디를 사고, 소춘은 꽃을 사고 든 지 한 달이 채 못되였다는 순남의 새아파트로 왔다.

 

[...]
셋의 걸음은 어느 책사 앞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책으로 옮기며 안으로 들어가 셋이 다 한 권씩 사들였다. 소춘은 히루디의 '우리 무엇을 할 것인가', 순남은 '신문의 연재란 읽는 법' 그리고 화옥은 새달치 '주부지우'를 샀다. 
"어쩌문, 방면이 이렇게 달러졌니 셋이?"
"이렇게 되구 봄, 책이란, 우리헌텐 인전 교과서가 아니라 생활도구의 하나구나!"
"어째서?"
"거긴 아미모노가다[뜨게질하는법]들꺼정 한봇다리나 부록이 들지 않았어?"
"너인 다 그래두 고등 교양에 속하는 거구, 난 인전 일개 직공으루서 기술이 필요한 거다"
"직공이라?"
"가정두 밥짓구, 옷직구, 공장이지 뭐냐?" (이태준, 『행복에의 흰손들』, 1942. *시간적 배경은 19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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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야소교서회(종로2-91)

현은 대학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책사에 들렸다. 양토법에 관한 책에는 토끼의 도살법까지도 씌어 있기 때문이다. 전에 아내가 빌려온 책에서는 그만 기르는 법만 읽고 돌려보낸 것이다. 
토끼를 죽이는 법, 목을 졸라 죽이는 법, 심장을 찔러 피를 뽑아 죽이는 법, 물에 담가 죽이는 법, 귀를 잡고 어느 다리를 어떻게 잡아당겨 죽이는 법, 동맥을 잘라 죽이는 법, 그리고 귀와 귀 사이의 골을 망치로 서너 번 때리면 오체를 바르르 떨다가 죽게 하는 법, 이렇게 여섯 가지나 씌어 있었다.
현은 먼저 낀 책을 도로 제자리에 꽂고 주인의 눈치를 엿보며 얼른 책사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

현은 단단히 앙가슴과 뒷다리를 움켜쥐고 마루로 왔다. 딸년이 방에서 나오다가 소리를 친다.
"얘들아 아버지가 토끼 꺼냈다!"
큰녀석 작은녀석이 마저 뛰어나온다.
"왜 그류 아버지?"
"병 났수?"
"마루에 가둬. 우리가 가지구 놀게"
"이뻐서 그류, 아버지?"
딸년은 제 손에 들었던 빵쪽을 토끼의 입에다 갖다 댄다. 토끼는 수염을 쫑긋거리더니 빵쪽을 물어떼이려 한다. 현은 잠자코 아까 책사에서 본 여섯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이태준, '토끼이야기', 1941)


여운형呂運亨씨는 무엇하고 계시나

 
전前 신문사장의 그 뒤 소식
  
정간된지 햇수로 이미 두해, 금일까지 나오지 못하는 신문 중앙일보中央日報의 뒷 소식도 궁금하거와 한때는 그 현하懸河같은 웅변으로 조선은 물론 널리는 세상을 떨치엇고 또 늘 빈약한 중앙일보의 유지를 위하야 불분주야不分晝夜 맹활동을 하시든 여운형 선생은 그 뒤 매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소일을 하고 계신지 기자만이 아니라 독자 여러분도 알고 싶은 분이 많으리라. 
그래 여 사장의 그 동안의 생활상황을 엿볼까 하고 기자는 북악산 넘어로 불어치는 늠렬凜烈한 삭풍을 무릅쓰면서 이 해도 저물어 가는 지난 초나흘날 아침 계동정桂洞町 선생 사택私宅으로 발을 옮기었다. 
(...)
신문사를 그만두신 후 나날이 무얼로 소일을 하십니까? 
- 뭐 별게 있습니까? 전부터 관계 많던 각 스포츠단체의 회합에나 틈틈히 참석하고 독서 두 좀 하고 등산도 가끔단이고 밤에는 라디오를 듯는 것을 요좀은 큰 재미로 삼고 지냅니다.  
 
최근은 무얼로 소일하시는가?  
- 독서는 어느 방면의 것을 주로 하십니까? 

▲ 마루젠丸善 경성지점(본정2-3-2)

- 시기가 시기니만치 시국방면의 책을 주로 봅니다. 그러나 그 밖의 책들도 될 수 있는대로는 많이 읽어 볼 작정입니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 책을 그리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전에 중국 있을 때는 분위기가 늘 긴장했고 또 나 자신도 늘 다망多忙한 정치적 생활을 보낸 터이라 독서할 겨를이나 마음의 안정이 별로 없었지요. 책이라구 참 몇 책을 정신들여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비교적 독서를 많이 하기기는 조선 나와서 감옥에 있을 때입니다. 그 3년 동안에 책수로 따지자면 아마 그때까지의 나의 읽은 전부의 책수보다 더 많았지요. 그리구는 금년에 또 내 딴으로는 어지간히 독서에 마력을 내는 셈입니다. 요새는 독서가 아주 습관화되시피 돼서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무얼 잊어버린 것 같이 허전해지군 하더군요. 
- 독서는 대개 하루에 몇 시간 가량 어디서 하십니까? 도서관에는 종종 단이시는지요? 
- 뭐 도서관엔 별로 가지 않읍니다. 집에서 틈있는대로 읽지만 나는 대개 본정本町 환선서점丸善書店에 가서 합니다. 경제문제로 신간서를 일일히 사보는 수는 없고 환선서점엘 가면 거기는 그 전 중앙일보 사장 시절에 래가 많았던 관계로 특별히 친절히 대해 주군하더군요. 그래 거기서 의자를 하나 빌려 가지고 점두店頭에 앉아서 읽구 싶은 책을 마음대로 한 서너너덧 시간씩 읽습니다. 대개 새로 한 시쯤까지 가서 다섯 시쯤까지 있지요. 홍군洪君두 이 다음 나를 만날려면 그리루 오면 아무날이나 대개 만나게 될 겁니다. 
- 남의 상점 가운데 가서 그렇게 계시기 거북지 않으세요? 
- 좀 거북하긴 하지요만 그만 것이야 참을 수밖에 없지요. 마치 술먹는 사람이 돈 없으면 선술집에 가듯이 돈이 없으니 서점에 가서 다찌요미立讀라도 하는 수밖에 없지요. (『삼천리』, 19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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