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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돕만주

category 친절한 구보씨 2019. 5. 3. 16:27

첫겨울 추운 밤은 고요히 깊어 간다. 뒷뜰 창 바깥에 지나가는 사람 소리도 끊어지고, 이따금 찬바람 부는 소리가 ‘휙-우수수’ 하고 바깥의 춥고 쓸쓸한 것을 알리면서 사람을 위협하는 듯하다.
만주노 호야 호오야.
길게 그리고도 힘없이 외치는 소리가 보지 않아도 추워서 수그리고 웅크리고 가는 듯한 사람이 몹시 처량하고 가엾어 보인다. (전영택, '화수분',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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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야호야노겐마이빵 (매일신보, 1923.2.4.)

송빈이는 먼저 영신환靈神丸 장사를 해 보았다. 학교에서 나오는 길로 저녁때까지 공원과 정거장과 음식점으로 다니며 팔면, 잘 팔리는 날은 하루 열봉은 팔았다. 열봉이면 삼십 전이 남는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잘하면 일이원의 이익을 보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학생은 한둘이 아니었다. '고학생 갈돕회'라는 것이 생겼는데 거기 회원만도 백여명이었다. 손님들도 이쪽에서 말하기 전에 '이제 방금 샀어'하고, 약봉지를 꺼내 보이었고, 음식점에서들은 귀찮다고 들어서지조차 못하게 하였다. 약도 팔기가 이내 힘들어졌다. 월사금 사원이 제일 급했다. 매달 초엿샛달 아침 조례 시간에는 으례 월사금 미납자들이 불려나가는데, 송빈이는 이축에 번번히 끼었고, 이축에 끼면 월사금을 가져 갈 때까지는 교실에 못 들어가는 법이었다. 책보 대신에 약봉지 뭉텡이를 끼고 이틀이고 사흘 나흘이고 사원돈을 채우러 나서야 한다. 한봉지에 삼전씩 남으니까 일백 사십봉지는 팔아야 된다. 열사람에 한 사람씩 사준다면, 잘 팔리는 세음이니 일백 사십봉지를 팔자면, 약을 사줄듯한 사람만 적어도 일천 사백명을 만나야 한다. 서울이 넓다하나 새 얼굴만 일천 사백명은 하루 이틀에는 어려웠다. 어디선지 분명히 청해봤던 사람이요, 혹은 어정쩡하여 모른척하고 모자를 벗고 약봉지를 내어 밀면,

"번번이 나만 맛이야?"

하고 재수 없다는 듯이 일어서 가 버리는 사람도 여러 번이었다. (이태준, 『사상의 월야』, * 시간배경은 1921년경.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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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라. 글을 배워라……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양반이 되고 잘살 수가 있다.  이러한 정열의 외침이 방방곡곡에서 소스라쳐 일어났다. 신문과 잡지가 붓이 닳도록 향학열을 고취하고 피가 끓는 지사志士들이 향촌으로 돌아다니며 삼촌의 혀를 놀려 권학勸學을 부르짖었다. 배워라. 배워야 한다. 상놈도 배우면 양반이 된다.  가르쳐라. 논밭을 팔고 집을 팔아서라도 가르쳐라. 그나마도 못 하면 고학이라도 해야 한다. 공자왈 맹자왈은 이미 시대가 늦었다. 상투를 깎고 신학문을 배워라. 야학을 실시하여라.  재등齋藤 총독이 문화정치의 간판을 내어걸고 골골이 학교를 증설하였다. 보통학교의 교장이 감발을 하고 촌으로 돌아다니며 입학을 권유하였다. 생도에게는 월사금을 받기는커녕 교과서와 학용품을 대어 주었다.   민간의 유지는 돈을 걷어 학교를 세웠다. 민립대학도 생기려다가 말았었다. 청년회에서 야학을 설시하였다. 갈돕회가 생겨 갈돕만주 외우는 소리가 서울에 신풍경을 이루었고 일반은 고학생을 존경하였다.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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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第一隊는 귤장사와 고학생 약장사, 제2대第二隊도 귤장사로 차림을 차리고 나섰는데 우리는 '만주장사'를 차리노라고 헤어진 외투에 해어진 학생모까지 얻어쓰고 나섰으나 만주장사를 만나와 만주궤짝을 얻어메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회사를 나서서 제동 네거리까지 와도 '호야호야' 소리가 들리지 않고 안국동 골목골목을 돌아다녀도 웬일인지 만주장사는 지나가지 않는다. 
"오늘은 대실패로군. 낮부터 미리 약속해 얻어두었어야 할 것을…… 무어 시간만 자꾸 가는데" 
"만주장사는 단념하고 영신환靈神丸이나몇 갑 사가지고 고학생苦學生으로 개업改業을 해봅시다. 그것이 낫겟소." 

실패해 가지고 빈손으로 들어가서 편집고등계주임編輯高等係主任(?)께 몰려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초조하야 임시개업臨時改業을 결심하고 약국에 들어가 영신환靈神丸 일곱봉을 구해 들고 군자금으로 하사받은 10원 영감[수노인상] 한 장을 내었다가 거스를 돈이 없다고 약을 도로 빼앗기고 쫒겨 나왔다. 이날 운수가 누구를 골리려고 이다지 불길한 지…… 10원 돈 거스를 돈이 없어서 팔 것을 팔지 못하는 북촌상인北村商人의 형세도 무던히 가긍한 것을 알엇다. 
"여보 남의 걱정하지 말고 우리 형세가 더 딱하지 않소. 무기 없이 전장에 나온 격이지. 빈손으로야 수상한 집이 있기로 쭞아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글쎄요. 대낭패외다." 
탄식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안국동 좁은 골목을 휘돌아 화동花洞을 향하고 나가니 앗!! 들린다 들린다. 안국동예배당 편에서 만주장사의 호야호-얏 소리! 어찌도 반갑던지 소리소리 질러 부르면서 두달음질하야 쫒아가니 십칠팔세 소년이 반가이 궤짝을 내려놓고 "몇 개나 사시렵쇼" 한다.
길다랗게 우리의 용무를 설명하여 준 후에 
"그 궤짝을 빌려주면 우리가 다니면서 팔 터이니 팔리는 돈은 모두 당신이 받아가지고 한시간만 그렇게 한 후에 따로이 50전을 더 주리다" 하니까 두 말 없이 승낙을 해 준다.
"인제야 되었다!" 하고 얼굴에 먹칠까지한 능선생熊先生[채만식]이 궤짝을 메고 능청스럽게 
"만주노 호야 호야" 
"뜨끈뜨끈 합니다. 5전에 두 개씩이요. 5전에 두개씩" 야시夜市장사 모양으로 외치기 시작하니 금방 담배 팔던 가게에서 우스면서 처다본다. (影)

 

메어보니 만주궤짝도 우습게 볼 수 없는 무거운 것이었다. 허리가 저절로 앞으로 굽어지면서 호야호야 소리가 저절로 길다랗게 나간다. 시간이 열시 오분인데 연극장 구경을 일제히 갔는지 목적하는 학생 하숙은 모조리 텅텅 비었고 가끔 가다 윷 노느라고 요란한 집이 있었으나 대문을 닫어 걸고 노는 통에 들어가는 수가 없었다. 우리의 책임구역 안국동과 호동 두 동리 한 시간 동안에 들어가본 집이 45처處요 그동안에 만주를 팔아준 것이 95전! 일일이 모두 기록하자면 한이 없겠으니 수상한 곳만 몇 곳을 적어서 보고할 밖에 없겠다. (熊)

 

(波影 방정환 · 北熊 채만식, '불량남녀 일망타진, 변장기자 야간탐방기', 『별건곤』 19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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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엔 '갈돕만주'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만주장사를 부른즉 번듯번듯 눈내리는 어두움 속에 입김을 뿜으며 나타나는 것은 한반에 있으면서도 별로 말도 없이 지내온 P군이었습니다. P군의 말을 들은즉 자기 고향은 경남 어느 산읍이요 자기 집은 청빈한 오막살이에 노모 한 분이 계실 뿐이라 하였습니다. 알고 본즉 아침에 일찍 못 오는 것은 두시 세시까지 만주통을 메고 돌아다니는 탓이요 점심시간에 그림자를 감추는 것은 점심밥이 없는 것과 그 시간에 조용한 구석을 찾아가 책을 보지 않으면 복습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랍니다. (이태준, 'P군의 추억', 『학생』, 1935.4.)

 


[...] 현재 우리회의 회원은 대략 천명 가량인데 백여명 가량은 기숙사에서 거처하옵니다만 현재 그들이 먹는 것은 껍질이 벗지 못한 조밥을 하루 두끼씩 아침저녁으로 먹습니다. 밥이 그와 같으니 국 같은 것이나 있었으면 나으련만 국물이라는 소금물 같은 것을 만들어 먹으니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는 견딜 수 없지요. 이 조밥 한 그릇 값이 육 전이므로 매일 십이 전이면 살게 되니까 한 달에 삼 원 육십 전이면 지냅니다. 그러나 이 매일 십이 전이라는 것도 벌지 못하여 연명을 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그 중에 제일 곤란한 것은 방이 없어서 재울 곳이 없는 것이 올시다. 현재 백명 수용한 것도 한방에 다섯 사람 내지 여섯 사람이 있으니까 도저히 더 들일 수는 없는데 일기는 추워오고 있을 곳은 없는 그들은 날마다 와서 들이어 달라고 울며 애걸하나 방은 없으니 어찌 하여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에는 순회연극으로 몇천 원 생기어서 얼마간 지내기가 나았으나 금년에는 장마가 계속하여 그것도 나가지 못하고 다른 수입도 도무지 없으므로 더욱 고생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고학생들이 하는 일은 약 파는 것과 신문 파는 것인데 제일 많은 것이 만두 파는 것이올시다. 매일 밤에 팔리는 것이 대략 일천 개 가량인데 이 만두 파는데 대하여 세상에서 고학생이 요리집이나 기타 주석[酒席] 같은 곳에 들어오는 것을 시비하는 사람이 많으나 이것은 우리들의 사정을 생각지 못하고 하는 말인줄 아옵니다. 하루 두끼의 밥을 변변히 얻어먹지 못하고 밤새도록 돌아다니는 그들이 어찌 이곳저곳을 가려서 들어가겠습니까. 그저 염치를 불고하고 그러는 것이지만은 그 다음은 약 파는 것인데 이것도 처음에는 약을 자유로 팔도록 되었었으나 그후 차차 경찰서에서 문제가 되어 모두 매약행상의 허가를 맡아가지고 팔러다닙니다. 이 외에 총독부 전매국의 연초갑 부치는 것을 맡아하던 일이 있었으나 그것도 요새는 낙찰落札이 되지 못하여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속사정을 자세히 모르고 "왜 약장수나 만두장사 같은 것만 하느냐 좀더 힘드는 일을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는 생활만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슨 힘드는 일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나 지금 어디 그런 일을 할 공장이 있습니까. 사회유지 중에서 무슨 공장 같은 것을 세워서 우리가 근육노동을 할 자리만 만들어주면 힘껏 하여 볼터이니 일반 사회유지는 이 점을 좀 돌아보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 만두를 사 잡숫는 어른중에 우리 만두는 다른 만두보다 더 적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그 속을 모르는 이의 말이라 중국의 호떡집에서 만드는 것은 '소다'를 많이 넣어 겉만 엄부렁하게 만들어 얼른 보기에 우리 만두보다 매우 크게 보이나 우리는 그렇게 '소다'를 많이 넣지 아니함으로 형용은 적어도 실질은 같을 뿐 아니라 만두속 넣는 팥도 껍질을 버리고 속만 넣고 사탕도 특별히 넣어서 같은 값이면 우리것을 사 잡숫도록 하기에 힘쓰는 중이올시다... ('1천명의 고학생...', 동아일보, 192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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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돕회의 주지主旨는 그 이름과 같이 서로 돕는데 있었습니다... 「갈」이 '서로'란 뜻이요 「돕」이 '돕는다는' 뜻[입니다]... 가향家鄕을 멀리 떠나 남과 같이 부형父兄의 재력으로 편안히 수학할 처지가 못되어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산미酸味를 맛보며 냉혹한 세태인정에 시달리는 고학생들을 규합하야 친목과 상호부조의 정신에서 한 개의 집단을 만들어 보고자 그때(대정大正 9년도*1920) 전혀 최현崔鉉 씨의 힘으로 관철동貫鐵洞 일각一隅에 남의 집 셋방 하나를 빌여서 비로소 갈돕회 간판을 부치고 사무소를 차렸댔습니다. 
그래 그때 처음으로 사람을 두어 사람 사다가 갈돕만주란 것을 만들어서 갈돕회 고학생들이 팔고다녔습니다. 갈돕만주래야 별 것이 아니고 보통 만주에다 손을 서로 잡은 갈돕회 낙인을 찍었을 뿐이지요. 그리하야 그 만주를 팔어서 얻는 이익으로 고학생들의 생활을 간신히 지탱해 나갔습니다(팔다가 못팔면 만주를 먹고 지내기도 햇지요). …
그렇게 지내다가 다시 효자동孝子洞에 있는 이완용李完用 소유가所有家를 세 없이 빌려서 숙소의 불편을 느끼지 않고 넓으나 넓은 집에서 잘 지냈었지요. 그리하야 점차로 사회의 신임도 얻고 기초도 잡혀서 갈돕회 사업이 진취進就되어가는 중도中途에 갈돕회 가운데 불미한 일[공금횡령사건]이 생겨서 물질적 타격을 입었고 다음 대정大正 13년도에 최현씨가 갈돕회와 손을 끊고 상해로 떠나가게 되자 드디어 쇠운衰運에 빠진 모양이지요. 아무 재미 있는 로맨스도 없었습니다. 같은 길로 나아가는 마음 맞는 동무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왁신거리면서 기쁜 얼굴로 갈돕만주를 만들던 그때가 제일 재미난 추억으로 남어 있습니다. ('민간사업의 창시 당시 로맨스, 당임當任했든 이의 회상담回想談'<최진순, '갈돕회'>' , 『별건곤』, 19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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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칼라'라는 신어에서 '모던'으로 '모던'에서 '첨단'으로, 이렇게 신어가 유행된다. 시내거리에서는 '모던빵!', '모던빵'의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갈돕만주'에서 '로시아빵', 또 '겐마이[현미]빵'에서 '모던빵'. 어쨌든 유행의 시대상은 사람 몸의 차림차림에서 '빵'에까지. 이 다음엔 '첨단빵'이 생길 차례. ('휴지통', 동아일보, 193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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