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지금 이곳에 쓰러져 죽더라도 누구 하나 자기를 위하여 울어 줄 사람이 없다고 그러한 생각을 하니 끝없는 외로움이 그의 온몸을 에워싼다. 참말이지 하루바삐 죽는 게 제일인 듯만 싶었다.
"더 살면 무엇 하니? 더 살면 무엇 하니?"
혼자 중얼거리며 그대로 터덜터덜 걷다가 문득 발을 멈춘 최주사다. 길가에 아이놈 셋이 막대기를 들고 다 죽게 된 개 한 마리를 못살게 구는 것을 본 까닭이다. 여덟 살이나 아홉살…… 어쨌든 세 놈이 모두 열 살은 채 못되어보이는 아이들이었다. 한 놈이 막대기로 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순純 조선 종자의 순하고 어수룩하게 생긴 그 개는 그 아이들의 포위에서 탈출하기는커녕 그 박해의 하나하나에 비명을 지를 기력조차 상실하고 있었다.
[...]
"이놈들아! 너희들은 그래 저게 불쌍해 뵈지두 않니? 응……?"
이렇게 말하였을 때 증오가 그곳에 그대로 있었으면서도 그래도 개가 놀랄 것을 염려하여 그 소리는 한껏 작았다.
최주사는 그곳에가 쭈그리고 앉아서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그러면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감은돌[지금의 마포구 현석동] 어느 선술집에서 기르는 검둥이에 틀림없었다.
자기를 보면 컹컹 짖고 꼬리를 세차게 흔들고 하던 검둥이에 틀림없었다.
'참 그 동안 볼 수 없다 하였더니 이 꼴이 되었나?'
최주사는 고개를 들고 세 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술집 개 아니냐?"
"네, 술집 개에요."
하고 하나가 대답하니까,
"병이 잔뜩 들어서 술집에서 내버렸에요."
하고 또 하나가 설명한다.
[...]
최주사는 자기의 옆을 지나간 아낙네가 개가 쓰러져 있는 옆을 지날 때 어떠한 의사표시를 하나 하고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낙네는 아무 감동도 받지 않은 듯싶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저 빌어먹을 개! 입때껏 죽지 않었네."
하고 그러한 소리까지 하였다.
최주사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서 있었다.
[...]
뒤를 돌아다보면 응당 그의 눈에 다시 개에게로 와서 그 잔혹한 장난을 또 하고 있는 세 아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최주사는 그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아이놈들이 다시는 그런 장난을 안 하리라는 것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에는 실감實感을 상반相伴하지 않는 비애가 있었다.
만약 그렇게 오 분 이상을 최주사가 걸어갔다 하면 응당 이 노인은 개의 비참한 경우를 떠나 현재의 자기의 처지에까지 마음을 괴롭히기에 이르렀으리라. (박태원, '낙조', 1933)
**
성북동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
“저는입쇼, 이 동제 사는 황수건이라 합니다......”
하고 인사를 붙인다. 나도 깍듯이 내 성명을 대었다. 그는 또 싱글벙글 하면서,
“댁엔 개가 없구먼입쇼.”
한다.
“아직 없소.”
하니,
“개 그까짓 거 두지 마십쇼.”
한다.
“왜 그렇소?”
물으니 그는 얼른 대답하는 말이,
“신문 보는 집엔입쇼, 개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한다. 이것 재미있는 말이다 하고 나는,
“왜 그렇소?”
하고 또 물었다.
“아, 이 뒷동네 은행소에 댕기는 집엔입쇼, 망아지만한 개가 있는뎁쇼, 아, 신문을 배달할 수가 있어얍죠.”
“왜?”
“막 깨물랴고 덤비는걸입쇼.”
한다. 말 같지 않아서 나는 웃기만 하는 그는 더욱 신을 낸다.
“그눔의 개, 그저 한번, 양떡을 멕여대야 할 턴데......”
하면서 주먹을 부르대는데 보니, 손과 팔목은 머리에 비기어 반비례로 작고 가느다랗다.
“어서 곤할 텐데 가 자시오.”
하니 그는 마지못해 물러서며,
“선생님, 참 이선생님 편안히 주뭅쇼. 저이 집은 여기서 얼마 안 되는 걸입쇼.”
하더니 돌아갔다. (이태준, '달밤', 1933)
개가 한 마리 있소. 무해무덕인가 하오. 강아지를 숫놈인줄 알고 사다가 이름을 씨사[Caesar]라고 했소. 그랬는데 크는 걸 보니 암놈이오. 그래서 이름을 카츄샤로 고치고 웃어보았소. 지금 카츄샤는 낙랑다점 주인이 데려다가 여급 대신에 두었는데 이름을 또 나나라고 갈았다 하오. 카츄샤 뒤에 들어온 개는 틀림없는 숫놈이어서 정작 씨사라 부르오. (이태준, 『신가정』, 1934.1. 앙케이트.)
다행하게도 다시 돌아간 다방 안에,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또, 문득, 생각하고 둘러보아, 그 벗 아닌 벗도 그곳에 있지 않았다. 구보는 카운터 가까이 자리를 잡고 앉아, 마침 자기가 사랑하는 스키퍼의 '아이 아이 아이'를 들려주는 이 다방에 애정을 갖는다.
[...]
조그만 강아지가 저편 구석에 앉아, 토스트를 먹고 있는 사내의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구두코를 핥고 있었다. 그 사내는 발을 뒤로 무르며, 쉬ㅡ쉬ㅡ 강아지를 쫓았다. 강아지는 연해 꼬리를 흔들며 잠깐 그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돌아서서 다음 탁자 앞으로 갔다. 그곳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는, 그는 확실히 개를 무서워하는 듯싶었다.
[...]
강아지는 다시 그곳을 떠나, 이제는 사람들의 사랑을 구하기를 아주 단념이나 한 듯이 구보에게서 한 칸통쯤 떨어진 곳에 가 네 발을 쭉 뻗고 모로 쓰러져버렸다.
강아지의 반쯤 감은 두 눈에는 고독이 숨어 있는 듯싶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것에 대한 단념도 그곳에 있는 듯싶었다. 구보는 그 강아지를 가엽다 생각한다. 저를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일지라도 다방 안에 있음을 알려 주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문득, 자기가 이제까지 한 번도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거나, 또는 그가 핥는 대로 손을 맡기어 둔다거나, 그러한 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한 일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내고, 손을 내밀어 그를 불렀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휘파람을 분다. 그러나 원래 구보는 휘파람을 안 분다. 잠깐 궁리하다가, 마침내 그는 개에게만 들릴 정도로 “캄, 히어”' 하고 말해 본다.
강아지는 영어를 해득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머리를 들어 구보를 쳐다보고, 그리고 아무 흥미도 느낄 수 없는 듯이 다시 머리를 떨어뜨렸다. 구보는 의자 밖으로 몸을 내밀어,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러나 한껏 부드럽게, 또 한 번, “캄, 히어” 그리고 그것을 번역하였다. “이리 온”.
그러나 강아지는 먼젓번 동작을 또 한번 되풀이하였을 따름, 이번에는 입을 벌려 하품 비슷한 짓을 하고 아주 눈까지 감는다. 구보는 초조와, 또 일종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맛보며, 그래도 그것을 억제하고, 이번에는 완전히 의자에서 떠나,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강아지는 진저리치게 놀라, 몸을 일으켜, 구보에게 향하여 적대적 자세를 취하고, 캥, 캐캥 하고 짖고, 그리고 제풀에 질겁을 하여 카운터 뒤로 달음질쳐 들어갔다.
구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강아지의 방정맞은 성정性情을 저주하며, 수건을 꺼내어 땀도 안 난 이마를 두루 씻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당부하였건만, 곧 와주지 않는 벗에게조차 그는 가벼운 분노를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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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화火
뜰에서 놀던 유백有白이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에 들어가 보고, 저희 엄마는 바깥마당에 나가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을까?"
부엌에도 뒷간에도 없었다. 한참 찾아다니는데 키 작은 소명小明이가 먼저 보고
"엄마? 유백이 저기 있어."
하였다.
"어디?"
"마루 밑구멍에……"
우리는 그제야 마루 밑을 들여다보았다. 유백이는 정말 마루 밑에서 씨사와 마주앉아 왜 그런지 낑낑거리고 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씨사의 볼따구니를 움켜쥐고 꼭 다문 입을 벌리게 하느라고 낑낑대는 것이었다.
유백이를 끌어내니 씨사도 꼬리를 흔들며 따라나왔다.
유백이는 씨사를 좋아한다. 씨사도 유백이를 좋아한다. 유백이가 그의 콧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쑤시면 재채기를 하면서도 또 유백이는 씨사가 재채기하는 바람에 놀래어 뒤로 주저앉으면서도 그들은 강아지끼리 놀 듯 좋은 동무가 되어서 즐긴다.
나는 그들이 아무런 의사도 표현할 줄 모르면서 친구가 되는 데 생각해 볼 무엇이 있지 않은가 느끼었다. (이태준, '강아지', 『신가정』, 19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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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그럼, 개라도 한 마리 기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나는 본래 개라는 짐승에게 호의를 가질 수가 없었다. 저를 돌보아 주는 주인 한 사람에게만 긴하게 보이려 애쓰고, 그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혐의와 적개심을 품고 있는 이 동물을, 나는 거의 증오하기조차 한다. 따라서 나는 개를 둔 집에 대하여도 좋은 감정을 못 가졌다. 그들은 자기 가족 이외의 모든 사람을 한 번씩은 도적이나 그러한 수상한 인물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두라는 훈련을 개에게 내리기에 골목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약간의 재물이, 그들에게는 행복보다도 오히려 그처럼 불안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나는 그러한 그들에게 연미을 느끼기조차 하였다. 저렇게 불안하여 가지고야 어찌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결코 개도 기르려고는 안 하였던 것이나, 나와 나의 가족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처럼 우리집의 담이 얕은 것을 염려하고, 개를 한 마리 두지 않은 것을 불안스러이 여기는 것은, 구경, 우리집이 문밖 외따른 곳[돈암동]에 위치하였기 때문이었다. (박태원, '투도', 1941)
축견畜犬 무용無用의 변辯
나는 남들처럼, '개'라고 일컫는 축류에 대하여 호의나 동정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슬프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마음을 애고愛苦로이 하여 이 짐승을 거두어 기르는 이들을 딱하게 여기기조차 한다.
개는 주인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 한다. 무슨 '충견'이니 '의견義犬'이니 하여 고래로, 그 가화미담이 더러 전하여 나려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수많은 개 중에서 오직 몇 마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대개는, 저를 거두어 주는 주인집 식구 이외의 사람에 대하여, 무턱대고 짖고 흥얼거리는 것을 일삼을 따름이다.
사실, 동리 안에 있어 개처럼 괘씸한 것은 다시 없다. 그는 늘 불안하다.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는 흡사 절도나 악한같이만 보인다. 그래 그는 잔뜩 겁을 집어 먹고 혹 앞으로 달려들어 사나웁게 짖어도 보고, 혹 뒤를 밟아 의심스레 냄새도 맡는다. 낯설은 개가 신변에 접근하는 것에 불안과 협의를 느끼는 것은 오직 아녀자에 그치는 일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버려두고, 유독 내게만 극성을 떠는 개 앞에서는 장부도 까닭 없이 얼궁를 불히고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늦도록 슬하에 일절 혈율을 갖지 못한 내외가 외로운 심사를, 혹, 그러한 것에나마 붙일 수 있을까 하여 과히 사나웁지 않은 강아지의 뒤를 거두는 것은, 이를테면 눈물겨운 노릇이라, 구태여 탓하지 않겠다. 그러나 집 속에 약간의 재물을 감추고 있으매, 그 마음에 불안이 또한 없을 수 없어 가장 의혹 많고, 가장 잘 짖고 가장 잘 무는 개를 대문 안에 감추어 두는 것에는 우리는 연민의 정과 함께 일종 분노조차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처럼 찾아간 객에게 우선 개로 하여금 시끄럽게 짖게 하는 풍습은 접객의 예에도 어긋나거니와 그 객이라는 자가 설혹 일개 걸인에 지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어떻든 만물의 영장을 축생을 가져 쫓는다는 것은 거의 인도상人道上 문제이다.
심한 자는 문전에 '맹견주의'라는 그러한 문구를 기입한 종이쪽을 내붙이어, 동리가 소란하게 개 짖는 소리 나기 전에, 행상이나 걸객배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것에 자못 득의로운 표정을 갖기도 하나 춘풍에 늘어나는 것은 묘령의 시골 색시만이 아니어서, 하룻날 아침, 그동안 밥 먹여 길러준 은공도 잊고서 곧잘 행위불명이 되는 것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자못 당황하여 일변 사람을 사방으로 풀어 놓으며 일변 신문에 광고를 내며, 그러는 꼴이란 가소로웁기 짝이 없다. (박태원, 『문장』, 19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