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사春史 ─ 원작·각색
양철 ─ 감독작품
이신웅 ─ 촬영
주연
나운규[도성], 김연실[정순], 임성철[세창], 박아지 기타 수명數名
영화극映畵劇 『종로』이야기
종로 ……
천구백 X십 X년도 어느 날 종로 네거리.
나는 이 거리에서 나를 잃었습니다. 동으로 갔는지 서로 갔는지 남으로 가야 옳을지 북으로 뛰어가야 만날지 도무지 알지 못하게 나를 잃어버렷습니다. 누구든지 붙잡고 내가 어데로 갔느냐고 웃고도 싶었습니다만 ……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그 사람들도 다 나와 같이 나를 잃어버린 사람같이 보이니 누구를 붙잡고 물어볼까, 나는 이 거리에 서서 지금 잃어버린 나를 찾아내려고 지나간 어린애 때 나로부터 뒤풀이해서 찾아봅니다.
내 고향은 남쪽나라. 물 맑고 여름이면 꾀꼬리 우는 작은 동리洞里였습니다. 학교는 읍내에 있는 서양사람이 예수 선전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소학교小學校에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일요일이면 예배당에 가야되는데 우리 동리에서 읍내 회당會堂에 같이 다니는 동무는 나와 정순貞順이라는 강 목사姜牧師의 딸밖에 없었습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살이 어리고 찬송가 부르는데는 회당에서 제일갈 만치 목소리가 고왔습니다. 둘이는 남매같이 다정하게 지내다가 내가 열여섯 살 되는 해에 강 목사가 서울로 이사가면서 정순이를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날 내가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공부하려고 서울 왔을 때에는 정순이도 서울 XX여학교에 다니든 때입니다.
일요일 오후면 늘 둘이 같이 시외市外로 놀러 나가는 것이 2, 3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인가 한강으로 보트 타러가기로 약속해 논 날 나는 돈을 구하려고 사방으로 쫒아다니다가 시간을 넘겨 버렸습니다. 만나자는 장소에 쫒아가 보니 기다리다 못해서 화를 내고 돌아간 후이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후에 며칠을 두고 만나려고 애를 썼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학교에서 원정遠征을 가게되는데 나도 할 수 없이 떠나가면서 동창 중에 제일 친한 친구, 박세창이에게 편지 한 장을 써서 맡기고 음악회 날에 [정순이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세창 군이 피아노를 잘 치기 때문에 음악회때면 정순이와는 늘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세창 군에게 신신부탁을 하고 떠났드니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어데 있겠습니까.
세창 군이 전부터 정순이를 사랑하든 것을 귀신이 아닌 내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세창 군의 여동생과 정순이가 친한 관계로 정순이가 피아노 치러 여러 번 다녔는데 그러는 사이에 세창 군이 혼자서 퍽 사랑했든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나와의 관계를 알고 마음 속으로는 퍽 놀랐든 게지요. 그래서 내가 맡기고 간 편지를 전하기는커녕 원정 간 동안에 부자 집 장자長子이니까 돈으로 강 목사를 꼬여 가지고 [정순이와] 정혼해 버렸습니다.
목사도 돈에는 별수 없든 게지요. 그런다고 정순이가 그렇게 함부로 넘어갔을 리가 없지만 거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세창 군이 정순이에게 "도성 군이 장가든 줄 몰랐습니까"하고 정통으로 일렀습니다. 정순이가 상경한 후에 아버지 고집에 못견디어 내가 형식적 결혼을 했지만 첫날밤에 도망을 했으니 결혼 아니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그러나 듣는 사람이야 그렇다 하겠습니까.
원정에서 돌아온 날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말을 들으니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창이를 끌어내서 때려도 보았고 정순이에게 파혼 권고도 해보았습니다만 때가 벌써 늦었습니다. 정순이는 처녀를 잃어버린지가 오래였답니다. 어떤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 그래서 돈 때문에 연인을 빼앗긴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이를 갈면서 북행차北行車를 타고 서울을 떠나든 날이 그 두 사람이 결혼식 하는 날이였습니다.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지요. 몇 해만에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서울로 돌아와 보니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강 목사는 죽고 박세창이는 한푼 없는 거지가 되었고 정순이는 카페걸이 되었습니다.
10년 가까이 이를 갈든 원수들이 내 손 하나 대지 않고 여지 없이 몰락된 것을 볼 때에 다소 낙망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카페걸 정순이에게 함부로 돈을 썼습니다. 드라이브 한번하고 백 원도 주고 칵테일 한 잔 먹고 50원 팁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정순이가 도무지 내 말을 듣지 아니 합니다. 언제든지 "당신 가지고 있는 돈이 미워요", 이 말 뿐입니다. 내가 매일 정순이에게 다니는 것을 본 세창이는 정순이를 빼앗길까봐 나를 붙잡고 애원했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돈으로 샀다. 돈으로", 이렇게 무서운 괴로움을 주어서 실연의 상처 받았던 내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없어질 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든 돈도 한정 있는 돈이니 써 버리는 수만 없어서 나는 주식에다 손을 댔답니다. 고집도 쎌 때가 따로 있지 중개점仲介店 주인이 기어이 팔라는 것을 듣지 않고 있는 돈 전부를 들여서 샀다가 'XX통상通商'이 파산되는 바람에 한 푼도 없는 거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날 나는 편지 한 장을 정순이에게 보냈습니다.
"다시 옛날과 같은 거지가 되었으니 다시는 당신 찾아갈 리도 없습니다. 행복되소서".
이날 우리 집 대문으로 마지막 이삿짐이 나오는 때 정순이가 쫒아왔다가 내 아들 영복이를 만나서 집안 일을 듣고 영복이에게 편지 한 장을 써 맡기고 가버렸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내가 무서워하든 돈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드니 어린애에게 역시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내게 준 돈 전부올시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거리로 달려 나와 정순이 있는 카페로 달려가니 역으로 나간 후였습니다.
자동차로 역으로 쫒아가니 차가 떠난 후였고 다****까지 차를 달렸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 홀로 다시 이 종로 네거리에 섰습니다. 정순이가 주고 간 돈은 수해동정금水害同情金 받는 사람의 상자 속에 넣어 버렸지만 내 몸만은 역시 갈 곳이 없습니다.
세창이는 억지로 돈을 벌려고 광산 사기를 하여서 2만 원과 기생을 싣고 문 밖으로 내달리다가 잡히고 나중에 알았지만 정순이가 만주로 팔려가는 몸값 천 원을 던져 준 마라톤 선수는 그날 세계기록을 지은 날이랍니다.
나는 종각 밑에서 하룻 밤을 새었습니다.
어데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이 거리에는 다시 나를 잃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려고 웅성거립니다.
나는 아직도 이 종로 네거리에서 나를 찾습니다.
나를 잃어버린 종로 네거리.
나를 찾는 종로.
19XX년도 어느 날 종로.
('지상紙上영화 종로', 『삼천리』, 1933.9.) [1933년 10월 5일 단성사 개봉작]
'영화와 경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몽 (5)] 정희의 학교 (0) | 2019.07.06 |
---|---|
[미몽 (4)] 애순남편 선용의 직업 (0) | 2019.06.26 |
[미몽 (3)] 포드자동차 (0) | 2019.06.24 |
[미몽 (2)] 데파트에 가요 (0) | 2019.06.19 |
[미몽 (1)] 엽주미용실 (0) | 2019.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