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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몽 (1)] 엽주미용실

category 영화와 경성 2019. 5. 3. 12:03

 

미용사: 어쩜 그리 고우세요?
애순: 뭘요. 별 말씀을 다 하세요.

 

 

 

(머리손질이 끝난 후 손거울을 보는 애순)
미용실에서 어떤 남자의 통화를 듣게 되는 애순은 
애인 창건의 집전화번호인 광화문 120번이 세탁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애순은 창건이 세탁소집에 세 들어 사는 무일푼의 건달로 자신을 줄곧 속여왔음을 깨닫는다.

 

 

(착잡한 마음으로 미용실을 나서는 애순)

유리로 된 출입문에 세로로 '葉舟美容室'이라고 적혀 있다. 

 

**

엽주미용실葉舟美容室

오엽주는 본정의 여자미용원에서 기술을 배워 1926년 경성부 운니동 87번지에 조선인 최초의 미용실로 알려진 경성미용원을 열었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배우로 활동하던 오엽주는 배우생활을 그만두고 귀국하여 1933년 3월 화신상회 2층에  화신 미용부를 개설하였다. 1935년 1월 화신상회 화재 후 종로 2정목 82번지 영보빌딩 4층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용실을 개업하였다(1935년 12월).  

▲ 엽주미용실 홍보전단 (출처: http://bitly.kr/YZCY6k)

위의 사진은 엽주미용실 홍보전단으로 알려져있다. 이 사진에는 오엽주 엽주미용실 원장(가운데 안경착용)과 미용실 소속의 5 명의 직원이 등장한다.  영화와 사진을 비교해 보면 애순(문예봉)의 머리를 다듬으며 "어쩜 그리 고우세요?"라는 대사를 한 미용사는 다름 아닌 오엽주 원장(사진 가운데)임을 알 수 있다. 그를 돕는 미용실 직원역 역시 실제 엽주미용실 소속(맨왼쪽).  오엽주는 경성미용원 개업한 이듬해인 1927년에 일본 영화계에 데뷔한 일도 있다. 오엽주는 『미몽』의 배역소개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  오엽주(동아일보, 1936.1.6)

 

▲ 해방 후의 영보빌딩


오엽주 씨의 미용원

 

지난 어느 한때에 '조선의 아가씨로 이역異域의 스타'니 '이역異 영화계에 피는 경성傾城의 일가인一佳人'이니 하고 한참동안 오엽주의 이름이 신문지상으로 부지런히 보도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또 한때는 그의 종적조차 알 수 없으리 만큼 그의 소식이 두절된 때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오사카 가서 ㅇㅇ고등여학교까지 졸업하고 또 얼마간 보통학교 선생의 자리도 차지해 보았었다.
그러나 보통학교 선생 그것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몹시 동경하던 영화예술을 찾겠다고 단언 동경으로 뛰어갔던 것이다.
본래 인물 예쁘고 또 스크린에 나타나서 밉지 않을 스타일의 소유였으므로 촬영소 안에서나 일반대중에게 많은 귀염과 환영을 받았었고 따라서 예상외의 호화로운 생활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변하기 쉬운 것은 사람의 환경이다. 그는 모든 것을 성공하기 전엔 조선에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 어찌된 까닭이었던지 그는 호화로운 그 생활을 버리고 조선에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허나 그를 맞아줄만한 기관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그는 시내 모 카페에까지 이르게 되여서 그를 보려고 일부러 카페 출입하게 된 남자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조선 영화계에서 기대한 인물인 만큼 그가 그곳에까지 흘러 들어갔으므로 일반(그를 아는 사람)은 애석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에 즐거운 소식을 듣는다. 그가 화신상회 2층에서 미용원을 열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는다.
복잡한 백화점 2층 한편 구석에 얌전하게 차려 놓은 오 씨의 미용원을 찾던 날은 봄날로서는 몹시 음산한 날이었다. 
"얼마나 분주하신가요?"
"뭐 아직 개업하지 않았어요." 
오 씨는 말을 맺지 않고 웬 커다란 방쪽을 돌아본다.
"설비는 다 되었지요."
"하느라고는 했지만 아직도 불충분합니다."
설비가 덜 됐다고는 하나 여기저기 달아 놓은 체경이라든가 의자 그 외 여러 가지 이름 모를 모를 도구들이 모조리 정돈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많은 직업 중에서 하필 이 직업을 택하시게 된 동기는 어디 있습니까?"
"동기라고는 별 것 있겠습니까? 저는 전에 일본 쇼치쿠松竹키네마에 있을 때부터 미용에 대해서 특히 연구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느낀 바가 있었든가요?"
"네! 우리 조선 여성들은 너무나 미용에 관한 상식이 없습니다. 그저 얼굴에 분을 희게 바르면 좋은 줄 알고 분칠하듯이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폐가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연독이 많은 분을 그렇게 많이 바르면  어린 아이에게까지 많은 해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꼭 한가지 표어標語를늘 여러분에게 말씀해 드립니다."
"어떤 표어요?"
"네 그것은"
"「여성이여! 튼튼하고 또 건강하라」 고요"
"얼굴에 분바르고 머리 빗기는 것으로서 튼튼해질까요? 어여뻐는 지겠지만."
"미용이라고 해서 단지 곱게만 하는 거라고 일반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건강하게도 합니다."
미용원이라곤 이름만 들었지 근방에도 가보지 못한 기자는 오 씨의 말에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가서 배우노릇 하시다가 왜 그만 두었습니까? 미용원을 목적하고 그만두시게 되었는가요?"
"아니요. 그때는 단지 어머님 한 분이 고향에서 외로워하시는 것 때문에 나온 것이랍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재미 없으니까 그만두지 않았습니까? 어머님을 모셔다가 함께 계셨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네.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만은 어머님이 어디 일본에 가시겠다고 하서야지요. 일본 있을 때의 저의 생활이야말로 퍽이나 호화로운 생활이였고 유쾌한 생활이였습니다." 
"일선인日鮮人 간에 차별적 대우가 심하지 않아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보수같은 것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꾸 묻기만 해서 안되었습니다만은 저 XX[카페]에 들어가시게 된 동기는요?"
"동기라기 보담 저는 인생의 속속까지 좀 알고 싶은 생각에서 들어갔습니다. 세상 사람이 말할 때 XX은 매춘부나 마찬가지로 여긴다고 하지만은 참인생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려면 그곳에 한 번 가보는 것도 다시 없는 배움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볼 땐 제 생애 중에 있어서 한 검은 점이라고 볼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한 달 동안의 그 생활이 제에게는 너무나 커다란 교훈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 씨는 몹시 열렬한 태도로 말한다.
"인제 더 해 보시고 싶은 일이 없습니까?"
"인제요? 글쎄올시다."
"아니  미용원을 성공하시겠다는 생각뿐인지요. 또 다른 것도 해보실 작정이십니까?」
"네. 물론 미용원으로서 내 일생의 직업을 삼겠습니다."
그는 모든 자기를 모조리 청산했다는 듯이 굳게 말한다.
"개업은 언제부터지요?"
"사실은 오늘부터인데 신문에 내일(3월 16일)부터라고 되었기 때문에 내일로 했습니다."
"오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됩니까?"
"글쎄요. 처음이니까 모르겠습니다. 우선 선생님같은 분들이 먼저 오셔야지요."
오 씨는 어여뿐 얼굴에 가는 미소를 띈다. 오 씨의 얼굴이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미용법을 익숙히 아는 까닭인가도 싶어서 기자는 한 번 받아보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면서 오 씨와 작별했다.  (『삼천리』, 19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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