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이태준 - 점경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5. 17. 10:49

 

불그스름한 황토는 미어진 고무신에만 묻은 것이 아니라 새까맣게 탄 종아리에도 더러 튀었던 자국이 있다. 바지는 어른이 입다가 무릎이 나가니까 물려준 듯 아랫도리는 끊어져 달아난 고구라[일본산의 두꺼운 무명옷감] 양복인데, 거기 입은 저고리는 조선 적삼이다. 적삼은 거친 베것이라 벌써 날카로와진 바람 서슴에 똘똘 말려버렸다. 
이러한 옷매무시에 깎은 지 오랜 텁수룩한 머리를 쓴 것뿐인 한 사내아이, 그는 화신백화점 진열창 앞에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데 골똘했다.
"웬 자식이야?"
무슨 의장병처럼 게이트보이가 내다보고 욕설을 던지되 그의 귀는 먹은 듯,
"털 담요! 가방! 꽨 크이! 옳아! 운석이 아버지가 서울 올 때면 아버지가 정거장으로 지구 다니던 그따위구나!"
아이는 다 풀린 태엽처럼 다시 움직일 가망이 없던 눈알을 한번 힐끗 굴리며 눈을 크게 열었다. 눈은 곧 쌍꺼풀이 되며 윗눈꺼풀에 무엇이 달라붙은 것처럼 켕겼다. 그래서 아이는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
눈을 감자 귀는 또 앵─ 소리만이 답답스럽게 귀에 박혀졌다. 한참만에 그 소리가 빠져나갈 때에는 이마와 콧날에서 식은땀이 이슬처럼 솟구쳤고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 자식아, 왜 가라는데 안 가?"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린가 하고 정신 차려 깨달으려 할 때 게이트보이는 발길로 저보다 어려 보이는 이 아이의 정강이를 찼다. 아이는 입을 딱 벌리고 채인 정강이를 들었으나 게이트보이의 찬란한 복장에 눌려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이내 비실비실 피해 달아났다.
그러나 화려한 진열창은 또 이내 다른 것이 눈을 끌었다. 아직도 화신백화점이건만 여긴 다른 상점이겠지, 하고 서서 들여다 보았다. 
'저건 뭘까?'
아이의 눈은 또 쌍꺼풀이 졌다.
'과자! 과자 곽들!"
아이의 상큼한 턱 아래에서는 아직 여물지도 않은 거랭이뼈가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였다.
'뭐! 4원 20전! 저것 한 곽에!'
아이는 멍청하니 서서 지전 넉 장하고 10전짜리 두 닢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돈을 생각해보는 마음은 이내 꿈속같이 생기를 잃은 머리에서 지저분스러운 여러 가지 추억을 일으켰다. 한 달에 80전씩 석 달치 월사금 2원 40전이 변통되지 않아서 우등으로 6학년에 올라가긴 했으나 보통학교를 그만두고 만 것, 좁쌀 값 스물 몇 냥 때문에 아버지가 장날 읍 바닥에서 상투를 끄들리고 뺨을 맞던 것, 그리고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후산을 못했는데 약값 외상이 많다고 의사가 와주지 않아서 멀쩡하게 돌아가신 것…… 아이는 눈물이 핑 어리고 말았다. 그래서 울긋불긋한 과자 곽들이 극락에 가 비단옷을 입고 있는 어머니로 보였다.
'엄마!'
아이는 마음 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래, 걱정 말아. 내가 네 옆에서 언제든지 봐줄게…… 이 돈으로 어서 뭐든지 사 뭐.'
하는 소리가 아이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어디? 어머니?'
하고 둘러보면 어머니는 간데없고 요란한 전차 소리만 귀를 때린다.
아이는 저는 몰라도 남 보기엔 한편 다리를 약간 절었다. 그건 발목을 삔 때문은 아니요, 힘에 부친 먼 길을 여러 날 계속해 걸어서 한편 발바닥이 부은 때문이다.

아이는 향방 없이 길 생긴 대로 따라 걸은 것이 탑동공원까지 갔다. 그리고 가만히 보니까 팔각정이 '조선어독본'에서 본 기억이 났고, 공원은 아무나 들어가 쉬는 데라는 생각은 나서 여기는 기웃거리지도 않고 들어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실과 장사들이다. 광주리마다 새로 따서 과분果粉이 뽀얀 포도와 배와 사과들이 수북수북 담긴 것들이다.
아이는 '하나 먹었으면!' 하는 욕심은 미처 나지 못했다. '저게 그림이 아닌가? 진열창에 놓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났다. 그리고 웬 양복한 사람이 그 옆에 돌아서서 기다랗게 껍질을 늘어뜨리며 사과를 벗기는 것과, 그 밑에서 자기보다도 더 헐벗은 아이가 손을 벌리고 서서 그 껍질이 어서 떨어지기를, 그리고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받으려 눈과 입을 뾰족하게 해가지고 서 있는 것을 보고야 모두가 꿈도, 그림도, 진열창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투 가서 양복 신사가 어석어석 먹는 입과 껍질을 질겅질겅 씹는 아이의 입을 보고야 그제야 바짝 말랐던 입 안에 침기가 서리고 목젓이 혼자 몇 번이나 늘름거렸다.
'쟤처럼 껍질이라도 먹었으면!'
주위를 둘러보니 배를 사서 깎는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아이는 뛰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며 그리로 갔다. 한 걸음만 더 나서면 그 두껍게 벗겨지는 배 껍질에 손이 닿을 만한 데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아이의 손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는 반대로 뒷짐이 져졌다. 배 껍질은 거의거의 칼에서 떨어지려 하는데 아이의 뒷짐져진 손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는 배를 깎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조선 두루마기에 빛 낡은 맥고모자를 쓴 어른인데 눈이 조그맣고 여덟 팔자 수염이 달린 얼굴이다.

'저이가 내가 이렇게 배가 고픈 걸 알아줬으면! 그래 그 껍질이라도 먹으라고 주었으면!'
하는데 그 여덟 팔자 수염이 한번 찡긋하면서 입이 열리더니 맑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배의 한편 모서리를 덥석 물어댄다. 아이는 깜짝 놀라 그 사람의 발 앞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아이는 소리 지를 만치 낙망하였다. 그 두껍게 벗겨진 배 껍질이 그새 흙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은 넓적한 구둣발로 그것을 짓이겼고, 작은 두 눈을 해끗거리며 '요걸 바라구 섰어?' 하는 듯한 멸시를 아이에게 던지는 것이다. 아이는 얼굴이 화끈하여 그 자리에서 물러선다.
'무슨 까닭일까?'
아이는 낙엽이 떨어지는 백양나무 밑으로 가서 생각해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자기가 먹지 않고 버리는 건데 남두 못 먹게 할 게 무언가?'
아이는 한참 만에 까부러지려는 정신을 이상한 소리에 다시 눈을 크게 뜨고 가다듬는다. 웬 키가 장승 같은 서양 사람 남녀가 섰는데, 남편인 듯한 사람이 벤또만한 새까만 가죽 갑을 안고 거기 붙은 안경만한 유리알을 나한테 향하고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였다. 아이는 얼른 일어서 옆을 보았다. 옆에는 아까 그 아이, 저보다도 헐벗은 아이가 역시 어디선지 사과 껍질을 한 움큼 들고 와 질겅거린다. 가만히 보니 그 서양 사람의 알지 못할 기계의 유리알은 자기와 그 애를 번갈아 향하면서 소리를 낸다. 아이들은 그게 활동사진 기계인 줄은, 그리고 그 서양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그들의 행복된 가족을 모여 앉히고 돌릴 것인 줄은 알 리가 없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 알지 못할 기계의 눈알이 자기를 쏠 때마다 왜 그런지 무섭다. 그래서 일어나 달아나려 하니까 웃기만 하고 섰던 서양 여자가 얼른 손에 들었던 새빨간 지갑을 열더니 은전 한 닢을 내던진다.
'돈!'

그때 아이는 비수 같은 의식이 머릿속을 스치자 나는 듯 굴러가는 돈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은전 한 닢에 달려든 것은 자기만은 아니었다. 그 사과 껍질을 먹고 섰던 아이는 물론, 웬 시커멓게 생긴 어른도 하나가 달려들었고, 

그 어른의 지카다비 신은 발은 누구의 손보다도 먼저 그 백동전을 눌러 덮쳤다. 두 아이는 힐끔하여 원망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쳐다보니 돈을 밟은 지카다비 발의 임자는 의외에도 돈을 얼른 집으려 하지 않고 그냥 기계만 틀고 서 있는 서양 사람에게 금세 달려들어 멱살이나 잡을 듯이 부릅뜬 눈을 노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 부부는 이내 기계를 안은 채 돌아서 다른 데로 갔고, 이 사람은 그제야 돈을 집더니 뭐라고 중얼걸리면서 행길 쪽으로 보이지도 않게 팔매를 쳐버렸다. 그리고 역시 흘긴 눈으로 두 아이와 모여 선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그도 다른 데로 어청어청 가버렸다.

'웬일일까? 웬 사람인데 심사가 그 지경일까?'
아이는 이것도 모를 일이었다. 자기가 갖지 않으면서 나도 못 집어 가게 하는 것이 이 아이로선 터득하기 어려운 의문이었다.
그날 밤, 아이는 자정이나 된 때 어느 벤치 위에서 곤히 자다가 공원지기에게 들켰다.
"이놈아, 나가!"
"여기서 좀 잘 테야요."
"뭐야? 이 자식 봐!"
하고 왁살스런 손은 아이의 등허리를 움켜 끌어냈다. 
"그냥 둬두는 데서 좀 자문 어때요?"

공원지기는 대답이 없이 아이의 머리를 한번 더 쥐어박으며 팔을 질질 끌어다 행길로 밀어내고 무거운 쇠문을 닫았다.
"꼬마! 거기 왜 섰어?"

▲ 종로 야경 (동아일보 1939.2.10)

이번엔 칼 소리가 질그럭거리는 순사가 나타났다. 아이는 소름이 오싹하였다. 그러나 순사는 아이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역시 이제 공원에서 자다가 쫒겨나온 듯, 그래도 공원 안을 넌지시 들여다 보고 서 있는 한 어른에게로 오는 것이다. 어른은 힐끗 순사를 한번 마주 보더니 쏜살같이 돌아서서 전찻길을 건너가는데, 그는 시커먼 지카다비까지, 낮에 그 돈을 집어 버리던 사나이가 틀리지 않았다.
아이는 '그 사람도 거지드랬나' 하고 이상한 느낌이 솟아 그의 뒤를 바라보는데, 정신이 번쩍 나게 목덜미에서 철썩 소리가 난다.
"가라! 이 놈의 자식아!"
아이는 질겁을 하였다. 순사를 한번 쳐다볼 사이도 없이, 한편 발바닥이 부은 다리로 끝없는 밤거리를 달음질쳤다. (『중앙』, 19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