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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 경궤연선京軌沿線/경성궤도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5. 23. 12:24

▲ 경성궤도 운행구간

얼음이 녹아 오관수 아래 질펀한 냇가를 매끈한 기동차가 달리는 풍경은 몇 해 동안 ㅇㅇㅇ에 익지 않은 내 눈엔 꽤 신선했다. 서울이란 낡은 도시가 제법 제게 따른 교외의 접지接地를 가지기 비롯하는 것은 우리 예전 서울 주민으로는 마치 제 신영토新領土를 들려가는거나 같이 막연하였다. 그래서 지난 겨울 상경하여 창신정으로 이사를 온 뒤 동대문턱을 지날 적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저놈을 한번 타보려니 하고, 별러오다가 이번 기회를 얻어 올라탄 것은 뜻 아닌 경전京電 불하佛下의 낡은 전차다. 

"여보 이게 어찌 기동차요?"

"그러게 광나루를 가라니까..."

광나루廣壯里가 좋으니 그리 가자는 본웅本雄의 말을 내가 기어이 똑섬유원지를 가보자고 우겨댄 것이 이 꼬락서니가 된 셈이다. 

전차라니 말이 전차지 타고 앉으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요즘은 물론이고 벌써 4,5년 전에 서울거리에서 일소당한 낡은 차대車臺가 내로라 하고 아직 도시교통기관으로서 행세하는덴 참말 비위가 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동대문밖에서 왕십리를 지나 뚝섬으로 가는 길녘의 잡연雜然한 풍경이나 오르내리는 승객들의 행식을 살펴보면 어디인지 삼자三者가 조화되는 듯하고 우리 낡은 경성주민으로선 또한 정다운 곳이 있었다.

'오관수'[오간수]라면 예전에 서울 쓰레기가 다 밀려나가는 곳이고, 하다못해 똥, 오줌까지 이 근처에서 처치된 곳이다. 그래 왕십리주민은 으레 배추장사요, 그 거름이 봄부터 가을 김장철까지 신선한 야채가 되어 경성주민을 길러온 것이다.

결국 서울사람은 제 똥, 오줌으로 자란 무, 배추를 1년이 못가서 도로 받아먹는 셈이다.

그러나 쓰레기라는 것은 전부 거름이 될 수 없는 것이리라. 훈련원 근처로부터 차차 '오관수' 아래로 내려가 개천가로 쌓이기 시작하여 조금씩 한 언덕더미를 이루기 시작하여 그것을 이곳 사람들은 조산造山하여 그 위에 움집이 다닥다닥 붙기 시작한 게 이제보니 제법 융성한 동리를 이루고 있다. 

궤도차가 동대문을 떠나 왕십리역 못미처까지 이르는 동안 개천가 웃둑 웃둑한 언덕에 달라붙은 동리들은 대개가 이 쓰레기더미 위에 세워진 것들인 모양이다. 

▲ 경성궤도 동대문~용두정 구간

그러기에 이곳 풍경은 한용 신개지新開地 이상으로 잡연하고 웬만한 장마에는 곧잘 무너진다 한다. 차가 아무리 달려도 봄임직한 버드나무꽃 나무가지 한 그루 찾을 수 없는 게 이곳 풍경이다. 단지 뿌연 수증기를 머금은 하늘이나 멀리 있는 산들이 아른거리는 양이나 보드러운 양광陽光들이 계절을 말할 뿐이다.

"여보 무얼 보러왔소?"

"아 이 냄새 맡지 못하오"

"하하 구린내 말이요"

"봄이란 시각視覺에서만 오는 줄 아오?"

"그럼 취각臭覺에서 시작하는 거요?"

"허허...."

실상 밭에 내다붙기 시작한 거름내란 이곳에 봄다운 유일의 자극인 모양이다. 

"자, 저게나 우리 한장 스캐치 합시다"

"아, 개천 바닥 파는 것 말이요?"

오관수 아래 개천바닥은 실로 놀랄만치 파헤쳐 놓았다. 벌써 저녁해가 가까워 오는데도 부인, 아이들 합쳐 7,80명은 천저발굴川底發掘에 종사하는 모양이다. 

이게 요즘 유명한 왕십리금광이다. 금광이라니 금을 파는 게 아니라 물에 밀려내려오고, 쓰레기더미에 쌓여와 묻혀있는 썩은 양철 조각을 파내는 게다. 

시국時局의 진척進捗은 썩은 양철, 일찌기 쓰레기였던 존재의 가격을 엄청나게 끌어올려놓은 것이다. 나는 세계대전 때 혹시 이러한 진풍경을 본 일이 있다.

썩은 양철이 곧 수십 전 소액지폐로 변하는 그 시절의 재림再臨이 제 생애에 또 왔던 것이다.  

겨우 7,8년 남짓한 사이에 놀라운 광경이 두번씩 되풀이하는데는 실로 우리의 시대의 파란 많은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썩은 양철조각이 돈이 된다는 것은 용이한 사태가 아니다. 이것을 파서 하루 7,80전 벌이는 된다니 헌 양철조각도 무시할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날카로운 생활감각은 역시 썩은 양철이 쓰레기로 실려 나오던 때와 그 자리에서 화폐가 되는 때와의 커다란 시대의 차이 속을 관류하지 않을 수 없다. 

▲ 청계천 조산과 판자촌(해방후)

길바닥이나 거름덩이, 혹은 냇가를 파헤치던 기억은 나에게 있어 아주 세상 물정을 판단치 못하던 소년시대에 속한다. 그때 동리에선 빈민들이 장사長巳의 열列을 지어 쌀 표票를 타러 총대總代집 문간으로 모이고 나도 비로소 안남미安南米란, 생김새가 길쭉한 쌀알갱이맛을 본 것이다. 무조건하고 그것은 경이였고 나의 어린 기억 가운데 그중 사회성이 농후한 생활관의 한 폭이었다. 

우리의 조그만 차가 지나가는 연선沿線의 이 광경은 오늘날의 시대생활이 우리가 방 속에 앉아 신문을 펴놓고 물가고를 운위하는데 비하여 월등히 심각한 것임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왕십리 평야 가운데 점점한 조산과 지저분한 집들, 유별나게 웅성대는 동리와 냇바닥을 파뒤집는 기이한 풍경은 또한 슬프게도 조화됨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이러한 것이 새로 경성에 편입된 이곳 주민의 당연한 운명인지 아닌지는 애써 말하기 어려운 것이나 어디인지 그들의 모습 가운데서 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황당한 그림자를 느낄 수는 있었다.우리가 탄 조그만 차만 해도 그들에게는 물론 새로운 것이나 우리에게는 역시 낡은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우리 자신도 역시 다른 고장 사람들에게는 이미 낡아버린 것을 새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문화의 진정한 성격적 의미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같이 분간키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새로운 시대의 풍경 같은 시련 속에 서 있는 점이다. 그러나 왕십리를 가까이 들어가는 우리의 조그만 차는 벌써 침묵한 목가牧家의 평야를 달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서울의 봄은 언제나 사방 산의 개나리와 왕십리벌의 누런 배차꽃[배추꽃]에서 시작하였다. 서울의 봄하늘을 나는 온갖 나비가 이곳에서 날아드는 것이다. 그전 서울주민의 식탁 위에 제일먼저 푸성귀도 부지런한 이곳 주민들의 손을 거쳐 들어왔다. 아직도 우리가 먹는 야채의 일부는 이곳에 심어질 것이다. 그러나 왕십리 평야엔 이미 누런 배차꽃에 나비떼들이 흩어놓는 장한長閑한 목가는 들리지 않는다. 아직도 주택지가 되지 않고 여기저기 세워진 양철창고 사이 사이에 검은 흙을 파는 한 사람의 그림자를 볼 수 있으나 그것은 이미 지난날의 '엘리지'의 한 끝에 불과하다. 

▲ 경원선/전차/경성궤도 왕십리역 

왕십리역은 내가, 7,8년 전 지내던 때와는 적어도 반세기의 차이는 있을 만큼 변하였다. 역 건물이나 구내 선로도 엄청나게 크고 많이 달라졌거니와 그 앞 동산 좌우로 용립聳立한 대大석유회사의 '탱크'는 이전엔 용산 근처의 대중공업지 아니고는 못보던 깃이었다. 선로가 모두 직접 '탱크' 시설구역까지 들어가 있고 강철제의 날씬한 '탱크'차가 2,3대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의 진화가 오히려 종로 복판보다 앞선 감感이었다. 

 

그런 때 옆에 앉아있던 밭쟁이풍風의 중년 사나이가 "살곶이다리는 없어지고 새다리가 놓인다오" 한다. 사실 얼마안가 냇가를 지나는데 높이 약 30척 가까운 철근콘크리트로 쌓아올린 허연 다리가 나타났다. 아직 공사중에 있는 모양인데 이 아래로 한 5,6십미터 내려 다릿발은 다 묻힌 돌다리가 보이는 게 살곶이다리인 모양이다. 예전에 이 근처에서 가장 위풍 있는 건조물의 하나였던 것이 이젠 보기에도 초라히 아주 냇바닥에 묻히다시피 했다. 옛다리는 뚝섬에서 문안 들어오는 유일의 길목이오, 따라서 주막도 번창하여 이야기꺼리도 많은 곳이다. 

▲ 성동교 위의 기동차 (해방후)

내려보지 못하고 지내는 것이 유감이나 일후日後 한가한 날을 기약하고 본웅과 더불어 그전에 홍수나던 이야기가 벌어졌다. 지금도 여름에 장마가 져서 큰물이 나면 뚝섬, 왕십리, 청량리역 근처까지 침수가 되나 그전에 벌써 살곶이다리가 넘었다 하면 경성주민은 홍수의 위험신호로 알았다. 이 다리가 넘으면 여기서부터 왕십리, 오관수다리까지는 질펀한 들이라 단번에 물이 밀려들고 또한 뚝섬과의 교통이 끊어지므로 나무값, 야채값이 하룻밤 사이에  곱절이나 오른다. 그러나 이젠 이런 물자들의 공급중심은 왕십리에서 딴 곳으로 옮겨가고 이런 이야기들은 전에 서울에서 자란 중년이나 늙은이들 기억에 남아있을 따름이다. 

봄으로부터 여름, 가을까지 이 전차는 뚝섬 간다느니보다 실상은 한강에 만들어 놓은 유원지를 왕래하는 게 본분이라 한다. 왕십리로부터 유원지까지 가는 사이는 몇 개 역이 있기는 하나 탑승객도 별로 없고, 있다고 해야 뚝섬역(유원지 바로 못미처)이 제일 많고, 그러고는 대개가 유원지까지 가서, 거기서 강 건나 봉은사를 간다거나 또는 광주로 가는 손님들이 있을 뿐이다. 우리 일행이 유원지에 내렸을 때는 석양이 뉘엿뉘엿 서빙고쪽으로 기운 때였다. 아직 꽃도 잎도 안핀 유원지는 즐길 아무것도 없고, 황량 그것이었으나 역시 지난 여름의 영화榮華에 지친 듯한 일종 버리기 어려운 정취가 있었다. 유원지를 들어가는 길녘에 높다란 방수제방防水堤坊을 지나면 긴 포플러숲이 나오는데 이곳이 하절夏節엔 '캠프촌'이라 한다. 캠프촌이 되었을 때 풍경이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날 우리의 행락중 그중 정취 깊은 곳이 나에게 이 숲이었다. 

▲ 경성궤도 살곶이~뚝섬 구간

아직 잎도 안피고 긴 줄기들만 거의 한 평에 한 줄기씩이나 틀어박힌 한가운데로 내깔린 궤도는 영화에서 보는 삼림철도 그것 같았다. 우리는 차를 내려서도 몇번 이곳을 거닐어보고 러시아문학을 좋아하는 E군 같은 사람은 백화림白樺林[자작나무숲] 같다고 찬미한다. 

유원지는 그리 호화로운 시설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강안江岸에 닿아있고, 근처 풍경이 좋은 곳이라 여름 하루 소일하기엔 훌륭한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료히 돌아올 수도 없고 하여 강가로 나가 본웅이 스케치를 한 장하고 봉은사로 건너가려 하였으나 타가지고 나온 군자軍資가 이미 진盡한지라 우리는 다시 예의 포플러숲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늘날의 우리 청년들이 어째서 이런 황량한 풍경에 마음을 주는지 제 마음이 한 개 비극 같아서 그런지, 단지 차차 저물어가는 이른 봄의 찬기운이 무릎으로 스미는 것 같았다. (동아일보, 1938, 4.13~17.)

 


뚝섬유원지는 1934년 7월 기동차를 운영하는 경성궤도주식회사가 동회사의 동뚝섬역 600미터 되는 지점 한강 가에 유원지, 수영장, 어린이 놀이터 등을 만들어 피서객에게 편의를 제공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유원지까지 기동차가 연결되었다. 조선시대에 나루터였던 뚝섬유원지에서 여름이면 시민들이 수영을 즐겼다. 뱃놀이도 유명하였다. 특히 강변에는 포플러가 무성한 속에 매운탕 집이 즐비하였다. 그러나 1986년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강폭을 넓히는 과정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는 한강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한강유람선의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 뚝섬유원지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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