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누릅골[효제동으로 보임] 어귀[종로5정목: 1935년 원문] 전차 정류장 남쪽에 라디오상회가 요즈음 새로 생겼다. 정면에 확성기를 내 걸었는데 아침마다 그것은 거진 배오개梨峴시장[광장시장]에서 동대문까지 울릴 만한 요란한 소리로 칼멘의 발췌곡이나 혹은 이태리 민요를 연주하고 어떤 때에는 내게는 얼토당토 아니한 '울어서 무엇하리'[채규엽, '사랑은 구슬퍼'의 가사일부]를 부르기도 한다. 여하간 나는 아침 아홉시마다 그러한 음악연주에 전송되면서 그 정류장에서 유쾌하게 전차에 오른다. 그러니까 나는 서울 시내의 어느 정류장보다도 이 정류장을 불공평하다는 공격을 받는 한이 있을지라도 역시 제일 사랑한다고 할 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의 행복의 전부가 겨우 그러한 정도에 그쳐서는 안될 게다. 나는 나의 미래에 향하여 더 큰 행복을 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행복은 춘하추동 중에서도 흔히 봄하고 관련되어서 생각되고 이야기된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행복을 닥쳐오는 새해 봄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념하기로 했다.
옛날부터 시詩, 문文 속에는 봄을 그리고 봄을 즐기고 봄을 애석해 하는 것이 어느 때 어느 나라이고 수에 있어서 매우 많았다. 또한 문인 묵객 속에는 봄을 떼어다가 그 이름에다 아호에까지 붙여서 봄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일상으로 보존하려고 하는 이도 적지 않다. 춘해春海가 그렇고, 춘곡春谷이 그렇고, 춘성春城이 그렇고, 춘산春山이 그렇고, 춘정春汀이 그렇고, 춘당春堂이 그렇다.
이것은 직접 봄이라는 글자는 떼어오지 않았지만 동원東園이나 화성花城도 모두 봄을 그리는 마음을 그 이름 속에 그림자와 같이 감추고 있다. 봄은 또한 인생의 청춘과 비교하여 잘 쓰여진다. 사나이의 청춘도 봄이려니와 더우기 여자의 청춘이야말로 봄의 정화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모든 결혼식의 축시가들은 그 감격없는 연설 속에 봄을 인용함으로써 약간의 로맨티시즘을 뿌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어느날 상허常虛의 경독정사耕讀精舍에서 몇 사람의 벗이 저녁을 먹은 일이 있다. 그 자리에서 시인 이상李箱은 쥘 르나르의 『전원수첩』 [Jules Renard, Histoires naturelles(1894)]속에서 읽은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가을날 방안에 가두어 두었던 카나리아는 난로불 온기를 봄으로 착각하고 그만 날개를 후닥이며 노래하기 시작하였다고─
[겨울이 와서 우리가 난로를 때자 그는 털갈이 시기인 봄이 온 줄 아는지 뭉텅뭉텅 깃털을 빠뜨리며 난리법석을 피운다. (박명욱 옮김, 『자연의 이야기들』, 162-3쪽, 2002, 문학동네)]
우리는 르나르의 기지와 시심을 일제히 찬탄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시가 조류의 심리까지를 붙잡은 것은 아니다. 사실은 시인이 그 자신의 봄을 그리는 마음을 카나리아의 뜻없는 동작 속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 이야기를 꺼내 놓은 이상李箱의 마음에도 역시 봄을 그리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 그 감정을 그러한 실 없는 듯한 이야기 속에서라도 풀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두 장의 재판소 호출장과 한 장의 내용증명 우편물과 한 장 내지 두 장의 금융조합 대부독촉장을 항상 가지고 댕겨야 하는 이 시인과 온갖 찬란한 형용사에 의하여 형용되는 다채스러운 봄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 봄은 그러면 영구히 달콤한 것인가?
이 이야기 뒤에 그 초당주인은 남쪽으로 뚫린 창을 가졌으며 산과 수풀과 시냇물에 둘려있는 이 초당에서 겨울을 지낼려면 봄을 기다리기가 안타까워서 못 견딘다고 말하였다. 이른 봄날 싹 돋은 뜨락의 풀이 찬서리에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양은 마음이 아깃자깃할 지경으로 애타는 일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게다. 도시의 홍진을 성북城北에 피한 이곳에서는 봄이 가고 오는 소식도 자세히 알 수 있으련만, 거리의 복판에서는 가을이 겨울로 변하고 겨울이 봄으로 옮겨가는 그 경계선의 미묘한 음영은 도시 알 수가 없다. 붉은 벽돌이 그것을 말하지 않고 검은 기왓장의 물결 위에는 계절의 표정이 나타날 줄을 모른다. 그저 벚꽃구경 광고를 전차 안에서 보고야 봄이 짙어 가는 줄 알고 김장배추 수레가 오고 가는 것을 보고야 어느새 가을을 다 지나보낸 것을 새삼스럽게 아까워하는 도시인의 생활이다.
그렇게 황망하게 왔다가 가는 사이에 봄은 한 번도 우리들의 기대를 채워주고 간 일이 없다. 딴은 봄은 동산마다 수없는 꽃을 피워놓고, 강마다 풍만한 물로써 축여 주었지만 '오늘도 벚꽃……', '내일도 벚꽃' 하는 틈에 부대껴 사월 초하룻날 펴놓았던 책장은 그 달 그믐까지도 그대로 있었고, 석양마다 집에 돌아와 보면 와 있는 편지는 납세독촉서나 백화점의 광고지나 원고독촉 통지나 최악의 경우에는 이상李箱처럼 내용증명우편이다. 나의 생활을 놀래 줄만한 아무러한 편지도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내 친구 가운데 늙은 총각 한 사람이 있다. 그는 곁의 동무들의 온갖 조소와 놀림을 당할 때마다 희망을 '내년봄'에다 걸어둠으로써 그 수없는 모욕과 분노를 참아 간다. 그렇다. '내년 봄이야 설마……' 하는 그 '내년봄'을 벌써 세 번이나 지내면서도 수없는 다른 사람들의 결혼청첩은 받았을지언정 그 자신은 끝내 결혼청첩을 발송해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새봄이 올 적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가장 희극적인 존재인 것을 스스로 느껴야 한다.
결국 그는 줄곧 봄에게 속은 것을 깨달았다. 군이나 내가 한가지로 이윽고는 봄의 사기사의 피해자인 것을 발견하는 날이 올 게다. 그렇지만 봄은 언제고 우리에게 무슨 약속을 한 일은 없는 것이고 저마다 큰 소망을 봄에게 지운 것은 우리 자신이 제멋대로 하는 일인즉, 봄에게는 실상 아무 죄도 없을 게다. 다만 우리가 미련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서양사람은 사월 초하루날을 에이프릴-풀(만우절)이라고 하여 일부러 서로 속이고 웃어주는 겐가 보다.
어느덧 나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 미련한 봄의 꿈에서 깨어나게 할 것이다. 또한 봄 자신도 이 이상의 벗이기를 거절할 것이다. 부는 바람은 강가의 버들가지를 제멋대로 흔들리라. 피는 꽃은 필 대로 피어서 그를 쫒아 모여드는 못난 남녀를 마대로 웃기려므나.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의 이름에서, 우리의 작품에서, 우리의 일기에서 봄을 떨어버릴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차츰차츰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계절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구한 봄을 만들기에 달라붙어야 할 것이다.그 봄만이 군이나 나를 속이지 않는 정직한 봄일 게다.
오늘 아침도 나는 명랑한 라디오의 주악에 전송되어 누릅골 어귀 정류장에서 전차를 타면서 다음 봄에게는 반드시 속지 않으리라고 마음에 굳게 맹세한다. 그러고는 그런 대신 변하지 않을 영구한 봄의 설계를 또 계속해 본다. (『중앙』, 1935.1. * 1948년 간행된 수필집 「바다와 육체』에서 일부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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