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이태준 - 장마] (옛) 출근길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5. 23. 18:57

 

▲ 출근시작(수연산방~고개정점)

아직 열한점, 그러나 낙랑樂浪이나 명치제과쯤 가면, 사무적 소속을 갖지 않은 이상이나 구보仇甫 같은 이는 혹 나보다 더 무성한 수염으로 커피잔을 앞에 놓고, 무료히 앉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서면 마치 나를 기다리기나 하고 있었던 것처럼 반가히 맞아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즘 자기들이 읽은 작품 중에서 어느 하나를 나에게 읽기를 권하는 것을 비롯하여 나의 곰팡이 슨 창작욕을 자극해주는 이야기까지 해줄런지도 모른다.

나는 집을 나선다. 포도원 앞쯤 내려오면 늘 나는 생각, '버스가 이 돌다리까지 들어왔으면'을 오늘도 잊어버리지 않고 하면서 개울물을 내려다본다. 여러 날째 씻겨내려간 개울이라 양치질을 하여도 좋게 물이 맑다. 한 아낙네가 지나면서, "빨래하기 좋겠다!" 하였다.

이런 맑은 물을 보면 으레 '빨래하기 좋겠다!'나 느낄 줄 아는, 조선여성들의 불우한 풍속을 슬퍼한다.

푸른 하늘은 한 군데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에 올라서니 하늘은 더욱 낮아진다.

곰보네 [빙수]가게는 유리창도 열어놓지 않았고, 세월 잃은 '아이스꾸리'통은 교통방해가되리만치 길가에 나와 넘어졌다.

"저 따위가 누굴 쇡이긴... 내가 초약이 되는 거야 이리 내애..."

열 두어 살밖에 안 된 계집애 목소리 같은 곰보아내의 날카로운 소리다. 

▲ 남산이 보이는 고개정점(출근방향)

[...]

사내는 그 가날픈 그리고 방아깨비다리처럼 꺾어진 색시에게 비겨, 너무나 우람스럽게 튼튼하다. 어떤날 보면 보성학교 밑에서부터 고개 마루턱 저희 가게 앞까 사이다니 바나나를 한짐이나 되게 장본 것을 실은 자전차를, 사뭇 탄 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런 장정에게 한번 아스라지게 잡히고 앙탈스런 비명을 내는 것도, 그 색시로서는 은연히 탐내는 향락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비는 오고 물건은 팔리지 않고 먹을 것은 달린다 하더라도 남편과 단둘이 들어앉아 약이니 띠니 하고 무슨 내기였던지 화투장이나 제끼는 재미도, 어찌 생각하면 걱정거리 많은 이 세상에서 택함을 받은 생활일지도 모른다.

[...]

비는 다시 뿌린다. 남산은 뽀얗게 운무 속에 들어 있다. 고개는 올라올 때보다도 내려갈 때가 더 무엇을 생각하며 걷기에 좋다.

 얼굴 얽은이와 등곱은 이의 부처, 저희끼리 '난 곰보니 넌 곱추라도 좋다' '난 곱추니 넌 곰보라도 좋다' 하고 손을 맞잡았을리는 없을 것이요, 누구라도 사이에 들어서서, 그러나 한쪽에 가서는 신랑이 곰보라는 말을 반드시 하였을 것이요, 또 한쪽에 가서는 신부가 곱추라는 것을 반드시 이야기하고서야 되었을 것이다. '자기와 혼인하려는 처녀가 곱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총각의 심경은 어떠하였을 것인가?' 나는 생각하기에도 괴롭다. 아직도 고개는 더 내려가야 한다.

버스는 오늘도 놀리고 간다. 우산을 접으며 뛰어가려니까 출발해 버린다. 나는 굳이 버스의 뒤를 보지 않으려, 그 얄미운 버스 뒤에다 광고를 낸 어떤 상품의 이름 하나를 기억해야 할 의무를 가지지 않으려 , 다른 데로 눈을 피한다.

벌써 삼 년째 거의 날마다 집을 나와서는 으레 버스를 타지만, 뛰어오거나 와서 기다리거나 하지 않고 오는 그대로 와서, 척 올라탈 수 있게, 그렇게 버스와 알맞게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여러 백 번에 한두 번쯤은 그런 경우가 있는 편이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은데 아직 한 번도 그 자연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로 먼저 갈까?'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어느 편으로고 먼저 오는 버스를 타기로 한다. 총독부행總督府行이 먼저 온다. 꽤 고물이 된 자동차다. 억지로 비비고 운전수 뒷자리에 앉았더니 기계에 기름도 치지 않았는지 차를 정지시킬 때와 출발시킬 때마다 무엇인지 불부삽자루만한 것을 잡아당겼다 밀었다 하는데 그놈이 귀가 찢어지게 삐익--삐익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 총독부행의 코스를 탈 때마다 불쾌한 것은 돈화문敦化門 정류장을 거쳐야 하는데 있다. 거기 가서는 감독이 꼭 가래야만 차가 움직이는데 감독의 심사는 열 번에 한 번도 차를 곧 떠나게 하는 적은 없다. 차안의 모든 눈이 '이자식아 얼른 가라구 해라'하는 듯이 쏘아보기를,어떤 때는 목욕탕에 들어 앉았을 때처럼 '하나 둘……'하고 수를 헤어보면, 무릇 칠십 팔십까지 헤이도록 해야 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나 그뿐이 아니라 뻔쩍하면 앞차로 갈아타라 뒷차로 갈아타라 해서, 어떤 신경질 승객에게서는 '바가야로'소리가 절로 나오게 되는데 제일에나 같은 키큰 승객이 욕을 보는 것은 기껏 자리를 잡고 앉았다가 앉을 자리는 벌써 다 잊어버린 다른 차로 가서 목을 펴지 못하고 억지로 바깥을 내다보는 체하며 서서 가야 하는 것이다.

"망할 자식, 무슨 심사루 차를 이렇게 오래 세워 둬……."

또, "저자식은 밤낮 앞차로 갈아타라고만 하더라 빌어먹을 자식……." 하고 욕이 절로 나오지만, 생각해보면 그 감독이란 친구도 고의로 그러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승객 일반을 위해서는 그런 조절, 정리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학적 사고는 나중 문제요 먼저는 모두 저갈길부터 바빠서 욕하고 눈을 흘기고 하는 것이 보통이니, 이것은 조선사회에 아직 나 같은 공덕 교양公德敎養이 부족한 분자가 많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버스 감독이란 것도 형사나 세관리만 못하지 않게 친화력과는 담싼 직업이다.

오늘도 다행히 차는 바꿔 타란 말이 없었으나 헤이기만 했으면 아마 일흔은 헤였을 듯해서야 차가 움직이었다. 안국동安國洞서 전차로 갈아탔다.

(...)

"조선중앙일보사 앞이오."

하는 바람에 종로까지 다 가지 않고 내린다. 일 년이나 자리 하나를 가지고 앉았던 데라 들어가면 일은 없더라도, 이제 하품소리만큼도 의의가 없는 '재미좋으십니까?' 소리밖에는 주고 받을 것이 없더라도, 종로 일대에서는 가장 아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과히 바쁘지 않으면 으레 한 번씩 들러보는 것이 나의 풍속이다. (이태준, '장마', 『조광』, 1936.10.)

 

 

2019/03/18 - [근대문학과 경성] - [이태준 - 무서록] 성城

 

[이태준 - 무서록] 성城

아침마다 안마당에 올라가 칫솔에 치약을 묻혀 들고 돌아서면 으레 눈은 건너편 산마루에 끌리게 된다. 산마루에는 산봉우리 생긴 대로 울멍줄멍 성벽이 솟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있다. 솟은 성벽은 아침이..

gubo34.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