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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 - 가을 (2)] 수남아범의 인력거

category 근대문학과 경성 2019. 5. 21. 19:55

열한 시나 지나 겨우 기호는 곤창이 되게 취한 태주가 잠깐 변소에 간 틈을 타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의외에도 후두둑 빗방울이 던지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두통과 오한이 나서 전차로는 집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한 기호는 자동차를 붙들려 했으나 별안간 비가 오기 시작한 때문에 휘황하게 가고오는 자동차는 하나도 빈것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W 차고까지 걸어갔으나 그곳에는 또 가솔린이 없어 차를 못 내겠다고 한다. 

황금정 네거리까지 온 기호는 하는 수 없으니 전차라도 탈까 했으나 전차를 타면 창경원서부터 걸어가야 할 것이 난감했다. 그때 마침 길 저편에 헌 인력거 한 채 오는 것이 보였다.

"인력거……"

그는 부르며 고개를 숙이고 길을 뛰어 건너갔다. 

"네."

인력거는 대답한 채로 그곳에 섰다.

"혜화정까지 얼마요?"

묻는 데도 부들부들 떨린다.

"일 원만 줍쇼."

"일 원? 자동차값허구 맞먹어? 육십 전만 허우."

"그렇게 안됩니다. 비두 오시구 허는데."

그러나 비는 그때엔 벌써 멎었다. 뿌리기도 잘하고 걷기도 잘하는 것은 지나가는 가을비다. 

"비는 무슨 비야. 팔십 전만 하지그래."

말하다가 기호는 별안간,

"어 이거 누구야. 수남아범 아니우?"

하고 외쳤다. 등이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긴 했으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틀림없는 수남아범이었다. 그제서야 저편에서도 놀라 고개를 들고,

"어유 이거 서방님 아니세요. 웬일이십니까?"

기호는 잠자코 인력거를 탔다. 수남아범은 내뛰기 시작했다.

"혜화정이시랬죠?"

"응. 아범은 어디서 살우?"

"수중바꿀[수중박골] 삽니다."

"그래 지내긴 어떻구."

"그저 밤낮 그꼴이죠. 그래도 요샌 좀 난 셈입니다만."

종로를 채 못 와서 늙은 차부는 벌써 숨이 차서 허연 입김을 헉헉 내뿜더니 전동[견지동]을 들어서자 그만 뛰지를 못하고 타박타박한다. 몸만 괴롭지 않다면 넌지시 타고 앉았지 못할 만큼 보기에 안타까왔으나 하는 수 없었다. 그러자 길은 조금 비탈이 되고 수남아범은 아주 걸음을 떼놓지 못한다. 자기딴은 힘껏 뛰는 것이나 발은 자꾸 제자리로만 떨어지는 것이다. 바짝 굽어버린 잔등이─ 기호는 수남아범이 돌아간 그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인력거를 올라앉은 것이 무슨 바늘방석에나 안은 것 같다. 마침 수남아범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참 소문에 들으니까 영감께서두 돌아가셨대죠?"

숨이 가빠 허덕허덕하면서도 띄엄띄엄 말을 묻는다.

"돌아가셨다우. 벌써 다섯 해 전에……"

▲ 관상감지 관천대(1913)

그순간 수남아범은 그 옛날 웃똥골[가회동으로 보임] 참판댁 행랑에 있을 때 아침마다 영감을 뫼시고 잿골[재동] 골목을 내리달려 병문을 돌아 관상감지(당시의 휘문학교)를 지나 대궐[창덕궁]로 가던 그시절을 잠깐 추억하였다. 이 추억은 당장 숨이 가쁜 때문에 번개같이 지나가고 말았으나 차 위에 앉아 있는 기호는 그 대화가 실마리가 되어 다음다음으로 그의 어렸을 때 일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수남아범이 끄는 인력거를 타고 안상호 병원[종로3정목 16번지 소재]에 다니던 일, 안 어른이 안 계실 때면 수남어멈들이 기호를 놀려대던 수남이하고 맹현동산[孟峴東山, 맹사성의 집터 일대]을 넘어 복주 우물[화동 47번지]로 약물 뜨러 가던 일 ─ 옳지 그러고 보니 수남이도 기호와 동갑이었던 것이 생각난다.

"수냄인 지금 무얼 허우?"

"삼년 전에 함경두루 일허러 갔답니다."

"함경도 어디?"

"뭐 나진이라던가요."

길이 내리받이가 된 데까지 온지라 수남아범은 조금 숨을 내두른 듯이 또 뛰기 시작한다.

"천천히 갑시다그려."

대답이 없다. 한참 있다가,

"마넴은 안녕히 계신가요?"

"마넴도 돌아가셨어."

"네?"

깜짝 놀라며 잠깐 주춤한다.

"언제요?"

"삼년 전에……"

"……깜박 몰랐구만요."

"어멈은 잘 있소?"

"것두 작년에 뒈졌답니다."

"뭐?"

이번에는 기호가 놀랐다. 잠깐 그는 죽었다는 수남어멈을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때 수남어멈은 한때 기호에게 젖을 먹인 일이 있어 제법 유몬 척 세를 쓰던 것이었다.

기호가 일고여덟 살쯤 되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수남어멈은,

"되련님, 장가갈 땐 어멈 뭘 해줄라우?"

하고 장난삼아 물었다. 기호는 기껏 생각하다가,

"금쪽도리, 금비나, 금귀개, 금버선, 금신……"

하고 대답한 까닭에 온 집안이 깔깔거리고 웃던 것이 어제 일같이 생생하게 생각이 난다. 한 십여 년 전 수남이네가 아주 어디로 가 사는지 모르게 될 때까지도 어쩌다가 기호의 집에 다니러 오면 수남어멈은,

"아, 그 금버선 금신은 언제 해주시는 겝니까?"

하고는 수선을 떨어대는 것이었다.

안동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이자 기호의 눈에는 언뜻 동편 하늘에 뜬 눈썹 같은 달이 비쳤는데 이곳에는 또 우수수하고 빗방울이 던지기 시작했다. 수남아범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우장을 내려 기호의 앞을 막아준다.

우장 속에 앉아 흔들거리며 기호는 깊은 구렁으로나 빠져들어가는 것같이 마음이 까물까물했다. 돌아간 그의 부모, 작년에 죽었다는 수남어멈, 산 사람도 서로서로 영락해 헤어져서 찾을 길이 없고 그리고 수남아범은 사십 년이 하루같이 인력거를 끌고…… 아,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인가. 사람의 일생이란 이렇게도 허잘것이 없는 것인가. 사람의 일생을 좀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던 옛날의 꿈은 정말로 젊은이의 아름다운 무지개에 지나지 않았던가.

▲ 창경궁 홍화문 앞

창경원 정문 앞까지 왔을 때 기호는 수남아범에게 인력거를 세우라 했다. 비도 어느덧 멎었고 거기서부터는 집까지 불과 십 분  남짓한 거리라 암만 몸이 괴뢰와도 못 걸어 갈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남아범은,

"왜 혜화정이래시드뇨?"

하고 좀처럼 인력거 체를 놓지 않는다.

"아냐 다 왔어. 박석고개만 넘어서면 바루니까."

"그럼 박석고개까지 모셔다드리지."

"고만두. 천천히 걸어가지 뭐. 여기서부터는 길 고치느라구 파허쳐놔서 가지두 못헐 게유."

그제서야 수남아범은 인력거 체를 내려놓고 우장을 열어주고 손등으로 얼굴의 땀을 이리 씻고 저리 씻고 한다.

기호는 내려서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얼마나 줄 것인가. 주머니에는 잔돈이 일 원 남짓 있으나 그밖에는 십 원 지폐가 한 장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참이나 그는 망설였다. 일 원만 주기는 딱하고 십 원은 ─ 앞으로 월급 때까지 가용을 쓰기 위해 애지지중지해 남겨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순간 무슨 말없는 영혼의 명령 같은 것이 머리에 뜨며 그는 십 원 지폐를 꺼내 수남아범에게 내밀었다.

"잔돈 없으세요?"

"그냥 넣구 가우."수남아범은 거스름돈이 없어 곤란해 한다.

"네?"

"어멈 살었을 때 금버선을 못해준 대신이오."

▲ 수남아범 인력거의 동선

기호는 빙긋이 웃었다. 그래도 수남아범은 웬 영문인지를 몰라 한참이나 기호를 쳐다보다가 내내 그 십 원을 정말로 자기한테 주는 것임을 알자,

"아유, 너무도 고맙습니다. 그전 참판 영감 때부터 댁에 진 은혜는 언제나 무엇으루 갚을는지요. 너무두 황숭헙니다."

하면서 허리를 굽혀 코가 깨지게 절을 한다.

"어서 가우."

말해놓고 기호는 동소문 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몇발짝 걷다 돌려다보니 수남아범은, 인력거를 들고 돌아서면서 아둠속으로 사라지려는 기호의 뒷모양을 돌려다보고 또 돌려다보는 것이었다.

기호는 오늘 처음으로 마음일 포근해졌다. 그만한 기쁨도 그로서는 오래간만에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무슨 적선을 했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기쁨이었다. (유진오, '가을', 『문장』, 1939.5.)

 


버스는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근래에 구경하지 못한 쾌속력으로 종로네거리를 돌파하고 구리개로 향하였다. 

'이만하면 세계 일一로 빠른 버스일 테지. 과연 세계 일일까? 그럼 세계 일이고 말고. 세계 일일 터이지. 세계 일일 수도 있지. 세계 일일..."

그러자 나는 '걸'이 조금 아까부터 내 앞에 와 서 있는 것을 깨닫고 돈을 꺼내주었다. 오 전이라니 오 전이라니, 동소문에서 한강까지 또는 동대문에서 악박골까지 오 전이라니... 이야말로 틀림없이 세계 일로 값싼 버스다. (박태원, '적멸', 1930)


2019/05/07 - [근대문학과 경성] - [유진오 - 가을 (1)] 기호의 산보

 

[유진오 - 가을 (1)] 기호의 산보

"산보 좀 허구 오리다." 빨래하던 손을 멈추고 놀라 멍멍히 쳐다보는 아내에게 말해버리고 기호는 집을 나섰다. 暮雲千里色 모운천리색 無處不傷心 무처불상심 ─ 형숙荊叔 거리에는 벌써 저녁빛이 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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